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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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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멈춰!”
준은 큰 소리로 외치며 붉은 거인의 앞에 착지했다. 가슴이 저릿저릿 할 정도로 마나를 뽑아 쓴 상태라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방금 전 싸워본 느낌으로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거인은 맨손으로 준을 후려쳤다. 덩치가 큰 만큼 그 위력도 상당했지만, 그런 일직선의 공격을 맞아 줄 만큼 준도 바보는 아니었다.
쿵!
땅이 들썩이며 준의 몸이 허공으로 점프했다. 보통의 경우 자세제어를 할 수 없는 공중공격은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게 된다. 중력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고 허공으로 떠오른 이상 관성에 따라 일정한 궤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붉은 거인도 날아오는 준의 움직임에 맞추어 내리친 주먹을 다시 휘둘렀다. 하지만 다른이들과 달리 준에게는 관성제어라는 기술이 있었다. 허공에서의 관성력을 마음대로 제어하는 준은 그대로 진행방향을 ‘ㄱ’자 모양으로 꺾으며 공격을 회피하고는 완전히 무방비가 된 붉은 거인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하앗!”
생명체의 가장 약한 부위중 한 곳인 쇄골사이, 목아래 부분의 약한 지점을 준은 소형 니들리스 스피어를 꺼내어 냅다 내질렀다. 골렘들이 사용하는 것이 비해 비교적 작게 만들어 인간의 손에 맞게 만든 물건으로, 지금처럼 한점에 공격을 집중할때는 스패너보다 훨씬 더 유용한 무기였다.
꿀럭.
그리고 그 순간 괴물의 쇄골사이가 불쑥 솟아오르더니 준의 스피어를 튕겨냈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그 종양처럼 생긴 살덩이는 준의 공격을 막아 내고 난 뒤에도 그대로 솟아오른 상태로 녀석의 목 아래 매달려 있었다. 마치 혹이 달려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방어기술인가...?”
준은 니들리스 스피어를 다시 고쳐쥐고는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쪽으로 분노한 거인의 주먹이 떨어졌다.
콰직!
돌바닥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후웅! 훙!
괴물은 한손에는 브랜든을 쥐고 한손으로 마구잡이 공격을 퍼부었다. 다행히 힘만 셌지 별다른 기술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준은 틈이 날 때마다 스피어를 찔러넣었다. 준의 공격이 명중 할때마다 녀석의 몸에는 기포처럼 종양이 솟아올랐다. 평범한 살덩이처럼 보이는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준의 공격을 튕겨내고 있었다.
‘까다롭군. 확실히 다른 던전에 비해 강한 놈들이야.’
매크로 어택을 실어 공격을 한다해도 매번 튕겨내는 통에 일단은 마나소모가 적은 일반공격을 이용해 시간을 끌면서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자꾸만 끌리자, 붉은 거인은 초조한듯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느린 스피드가 갑자기 빨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빈틈만을 내어줄 뿐이었다.
‘노란색 외도 정도...? 공격력도 그렇고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다만 방어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준은 녀석의 눈이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다는 점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노란 색의 안광을 뿌린다는 것은 녀석이 노란 색 외도라는 것이다. 준의 현재 공격력이라면 그정도 외도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죽일 수 있었다. 당장 매크로 어택 한방이면 녀석은 꽁지를 말고 도망쳐야 했다.
마치 방금 전 웜홀 바깥에서 녀석이 준에게서 도망친 것 처럼.
‘그러고보니 저 이상한 혹도 바깥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어.’
준과 거인은 웜홀 바깥에서도 맞부딪혔다. 그때 준은 매크로 어택을 이용해 녀석에게 정타를 먹였고, 놈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놈은 준에게 방어를 도외시 한채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반면 준의 공격은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이 차이는 단 하나, 바깥과 안의 차이였다.
‘이 던전 안에서는 외도들의 힘이 강력해지는 건가?’
아니다. 준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해야 옳았다. 그러니까, 이 던전 안의 외도들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그 힘이 약해지는 것이다.
“개도 자기집에서는 오 할은 먹고 들어간다는 건가.”
준은 녀석의 어깨위에 널브러져 있는 브랜든을 흘깃 보았다.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던전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브랜든이 이 던전의 입구를 열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그 능력과, 이 이상한 던전.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진 브랜든을 어떻게든 던전핵까지 가지고 가려는 저 붉은 거인. 이 세 가지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꽤애액!
그때 하늘위에서 수십 마리의 날개날린 외도들이 나타났다. 그 아래에는 또 그만큼의 육상외도들이 이를 드러내며 이곳을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준이 이곳까지 오면서 스쳐지난 외도들이었다. 준보다 조금 늦게, 붉은 거인을 돕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역시 다른 던전과 다르다는 거로군.’
던전은 본래 외도들의 일정 구역이 있어서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나면 다시 리스폰 되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는 일정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규칙이 없다. 점점 더 준은 자신의 확신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워마라! 고통없이 보내주마!]
“누구맘대로.”
쿵!
아군의 등장에 기세가 등등해진 붉은 거인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준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인벤토리에서 니들리스 시리즈를 우수수 꺼내었다. 시간을 끌면서 상황을 지켜보려 했지만 적의 수가 늘어난 이상 준도 전력을 다해야했다.
“인벤토리 개방.”
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뒤 쪽으로 이백여개의 니들리스 시리즈들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홀연히 떠올랐다. 근접용 스패너, 스피어, 해머와, 원거리용 니들건, 6연발 식스팩과 불스원샷까지. 준이 지금까지 만든 거의 모든 무기들이 속속 튀어나왔다. 15레벨 이후 염동력의 힘과 반경이 늘어났고, 그 동안 준도 놀고있지만은 않았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기술을 계속해서 연습했고 지금에 와서는 약 이백 여개의 무기들을 간단한 명령만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지 미리 입력된 궤적에 따라 니들리스 시리즈들이 수십마리의 비행형 외도를 향해 쏟아졌다.
[우워어!]
갑자기 붉은 거인이 준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준은 혀를 차며 슬쩍 몸을 피했다. 꼬리에 불이 붙은 황소처럼 밀고들어오는 데야 준도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매크로 미사일!”
니들리스 시리즈들은 비행행 외도에게 쉴새없이 화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준은 그중 일부의 니들건과 매크로 미사일을 이용해 자신에 등을 보인 거인에게 집중적으로 화력을 퍼부었다.
콰콰콰콰!
붉고 푸른 빛이 어지럽게 뒤얽히며 거인의 등에 명중했다. 폭발과 동시에 계속해서 거품처럼 녀석의 등이 부풀어 올랐고 준은 혀를 차며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저건 단단한 것도 아니고... 대체 저 혹들은 뭐야?’
녀석은 준의 공격에 브랜든을 끌어안고는 몸을 웅크렸다. 어떻게든 녀석을 보호하려는 것을 보니 더욱 수상했다.
준은 공격을 멈추고 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체 그 녀석을 왜 데리고 가려는 거지?”
[크르르.]
대답대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4미터에 이르던 근육덩어리의 거인은 이제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주렁주렁 매단 끔찍한 생물이 되어 있었다.
“끔찍하군.”
괴물은 이제 처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그 볼록 튀어나온 혹덩이들은 준의 공격을 모조리 되팅겨냈고, 엑조틱 에너지를 흡수하며 자가증식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증식이라... 흡수한 에너지에 의해 세포복제가 일어나는 건가?’
준은 녀석의 몸을 뒤덮고 있는 혹덩어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반적으로는 어떤 세포이든지 간에 복제를 할 때마다 노화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 현상은 가속된다.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는 한정된 횟수의 세포분열을 한다. 수명이 긴 동물의 분열 능력이 수명이 짧은 동물에 비해 크며, 동물의 연령이 높을수록 세포의 총 잔여 분열 횟수는 감소한다. 세포분열이 계속됨에 따라 염색체 말단(텔로미어) 반복구조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서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더 이상 DNA 복제가 일어나지 않고 세포분열 능력이 사라지는 세포 복제노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화가 일어나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종양세포는 그런 텔로미어마저도 복제를 하는 특이효소를 통해 무한증식을 일어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괴물의 몸에서 증식하는 세포 역시 일종의 종양세포, 즉 암덩어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계속 된 공격을 받게 되면 녀석의 온몸이 암덩어리로 뒤덮여 결국 신체기능이 붕괴되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한가지 문제라면 녀석의 몸이 어디까지 버틸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준의 능력을 벗어날 정도의 내구력을 지니고 있다면 녀석이 죽기 전에 먼저 준이 지쳐버릴지도 몰랐다.
“좋아.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매크로 미사일!”
준은 되는대로 화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혹위에 혹이 생기고, 또 그위에 혹이 생겨났다. 녀석은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덩치를 키웠다. 어느덧 4미터 정도의 크기였던 녀석의 몸체는 5미터를 넘어 6미터를 향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마치 풍선을 불듯 녀석의 몸은 터질듯이 커져갔다.
[그만... 그만해...]
이윽고 7미터에 이르렀을때 녀석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준은 공격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준의 마나가 거의 바닥을 드러냈을 시점이었다.
“드디어 대화를 할 생각이 드셨나보지?”
[드디어 찾았는데... 왜 방해하는 거지...]
“찾았다는 건 브랜든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그 녀석이 지닌 오리진의 조각을 말하는 건가?”
[오리진의 조각... 맞아. 그것이 필요해. 난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찾아왔다. 부유하는 우주의 조각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각이 있어야만, 이 부서진 세계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어.]
“부서진 세계라... 나는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거기에 왜 조각이 필요한거지?”
[나는 탈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주의 충돌로 인해 부서진 공간으로 빨려들었지. 이 공간은 조각난 우주의 파편. 그리고 그 우주에서 나는 하나의 작은 힘을 발견했다. 그 힘은 너무나도 미약해서 곧 꺼질 것처럼 위태로웠지.]
“탈출? 혹시 너도 로오나 인인건가?”
[로오나...? 그래 나는 로오나지. 그리운 이름이군. 얼마만에 그 이름을 듣는지 모르겠다. 이곳에는 대화를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지.]
준은 생각지 못한 전개에 혼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로오나인이 어째서 외도와 함께 있는거지? 너희들은 서로 적이 아니었던 건가?”
[적. 그래. 하지만 나는 홀로 이곳에서 2000년을 살았다. 그 사이 내 육체는 붕괴하고 엑조틱 에너지에 의해 변화하여 지금의 육체를 얻게 되었지. 하지만 결국 부서진 세계는 수명을 다했다. 내 육체가 먼저 스러지기 전에 이 작은 우주가 붕괴하고 있는 거지. 내 말 알겠나?]
“대충은. 그래서 그 조각이 있으면 그걸 막을 수 있다는 건가?”
[그래. 오리진의 조각이라면, 어쩌면 붕괴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 세계를 유지해서 네가 하려는 것이 무엇이지? 외도와 같은 몸을 하고, 괴물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