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젝트 델타-138화 (138/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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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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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어...?”

“좋았어요?”

그녀의 말에 패닉에 빠져있던 준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대체 언제부터...”

쉘터는 준이 직접 설치했으니 처음부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간부터라고 해도 민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준과 그녀는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고 있었으니까.

“하암.”

시미는 과장스러운 태도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졸려요.”

시미의 몸이 점점 커지며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이 약해졌다. 어느새 1미터가 넘게 자란 시미가 천천히 준을 향해 다가왔다.

“나도 잘 거에요. 깨우지 마요.”

“뭐...?”

스윽.

그리고는 시미는 자연스럽게 준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준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 순간 루나가 몸을 뒤척였다.

“으음...”

준은 돌이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만약 지금 그녀가 깨어난다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미도 애초에 거의 옷을 입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기 때문에 이 모습을 들킨다면 곤란하기가 이루 말 할데 없었다.

‘졸리는 군...’

헌데 이런 상황에서 급격이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피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맘편하게 잠이 들 정도로 그의 신경이 무딘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자면 안되는 데...’

다음날 아침에 이꼴로 일어났다가는 루나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시스템메시지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요정의 가루로 인한 진정효과가 시전 됩니다. 시전자와의 접촉으로 인해 정신력에 의한 저항을 무력화 합니다. 적대행위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눈을 떠보자 쉘터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옷을 대충 입고 호숫가의 집으로 가자, 주방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자 루나와 시미가 사이좋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순간 머리칼이 쭈뼛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음을 애써 가장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 일어나셨어요?”

루나가 입을 열었다.

“굳이 아침을 준비할 필요까진 없는데.”

“떠나는 날 정도는 제가 준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이러고 있는거야?”

준은 닿지 않는 팔을 억지로 뻗으며 음식재료를 다듬고 있는 시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도와주고 싶다고 하네요.”

“어차피 먹지도 못할 텐데.”

“시미도 같이 할 거에요.”

요리 준비를 하는 동안 준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루나는 평소 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준을 대하고 있었다. 역시 어른이라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닌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맛있는데.”

“다행이에요.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네요.”

루나의 말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바로 다음날부터 태도가 바뀐다는 것은 어려운 일 일테고, 그녀도 충분히 부끄러워 하고 있을테니까.

사실 준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테이블 옆에서 아삭거리며 당근을 씹고 있는 시미의 존재가 영 신경쓰였다. 준이 잠들기 직전 그녀의 모습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그녀가 먼저 눈을 떴다면 시미의 존재를 확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무어라 말을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루나는 딱히 할 말이 있어보이지 않았고, 시미도 태연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마치 내가 꿈을 꾼 것 같잖아.’

하지만 그건 확실히 꿈이 아니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그 감각은 아직도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저기 말인데.”

식사를 마친 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한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가 이상한가요?”

“아, 아니. 밥은 괜찮았어. 솔직히 내가 만든 것 보다 훨씬. 어디서 이런 걸 배운거야?”

“마스터의 도움을 좀 받았어요. 매일 얻어먹다 보니 한 번 쯤은 해주고 싶었거든요.”

“아아. 그렇군. 솜씨가 좋은데. 원래 요리를 해봤던 거야?”

“아니에요. 솔직히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에요.”

“정말이야? 초보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인데.”

준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녀가 만든 요리는 그만큼 맛이 좋았다. 준이 기술을 이용해서 만든 요리보다도 훨씬 더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때가 아니었다.

“야. 너 잠깐만 밖에 있다가 와라.”

“왜요?”

“루나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알았어요.”

시미는 뭔가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검둥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거에요?”

루나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일 말인데...”

“어제 일이라면...”

순간 루나의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굳이 뭘 어쩌자는 건 아닌데 말이지. 아무래도 신경쓰이는게 있어서.”

“시미 때문인건가요?”

“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말이 없었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요. 준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말을 하는 루나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준은 뜨끔하며 입을 열었다.

“음... 잠깐만,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시미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농담이에요.”

“뭐?”

“농담이라구요. 시미와 준의 사이를 오해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저도 사실 어제 깨어 있었거든요.”

“아...”

준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루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자는 척 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런데 준이 금방 잠들더라고요. 그건 좀 그랬지만.”

“시스템 로그를 확인해 보니까, 요정의 가루 때문에 잠든 거라고 나오더라고. 적대행위로 간주되지 않아서 그대로 당한 모양이야.”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잠에서 안 깨었던 거군요.”

“응? 이야기라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더 신경쓰이는데? 혹시 어제 내가 잠들고 난 이후에 시미랑 무슨 말이라도 했던 건가?”

“그게...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뭐?”

준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 녀석의 행동을 짐작하기 어렵긴 했지만 자신을 재워놓고 루나에게 그런 소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말라고는 했는데... 솔직히 좀 걱정되네요.”

“뭐가 걱정된다는 거야?”

“혹시라도 준을 덮칠까봐요.”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거야?”

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시미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준이 그랬잖아요. 시미가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고.”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거라고. 애초에 저 녀석은 인간도 아니고.”

“휴.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요. 확실하게 말해두지만 시미는 안돼요. 아니, 저 말고는 다른 여자는 전부 안돼요.”

“그럴게.”

자연스럽게 본심을 내비친 루나에게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약간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마음이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할 정도로 준이 굶주렸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이야기 했을 때 이미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럼 조만간 다시 올게요.”

“그래. 언제든지 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가벼운 입맞춤과 함께 루나가 떠나자 준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그녀는 준에게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뿐이었지만 그 하나는 준의 삶을 바꿀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음... 하필이면 마지막날이라니...’

생각해보니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것을 알게 해 놓고는 훌쩍 날아가버리다니, 가까워지자마자 다시 멀어지게 된 셈이다.

-한 며칠만 더 있다 가도 되었을텐데.

준이 아쉬움에 메시지를 날리자 그녀에게서 곧 회답이 돌아왔다. 단 두 글자였다.

-바보.

“끙...”

준은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왔다. 방안에 들어가지 마자 몸을 키운 시미가 다리를 꼰 채로 침대에 드러눕더니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하는 거냐?”

“루나가 없으니까 이제 나랑...꺅!”

준은 녀석을 들어 창밖으로 내던졌다. 순식간에 작아진 그녀가 창문을 타고 올라와 볼을 퉁퉁 부풀린 채 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불공평해요! 내가 먼저 준이랑 만났는데!”

“바보냐. 선착순도 아니고... 그리고 먼저 만난 건 그쪽이 먼저거든.”

“먼저 만났다고 전부는 아니잖아요!”

“방금 네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말의 앞뒤가 안맞잖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뭐가 되었든 아직 어린이가 할 생각은 아니니까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으윽. 만드라고라는 공부를 할 필요가 없거든요?“

“일단 인간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구만.”

준은 녀석의 머리를 들어 물컵에 넣었다. 그녀는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느긋하게 물속에서 몸을 띄우며 놀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참 태세전환이 빠른 녀석이로군. 이정도면 거의 금붕어 수준 아닌가?”

준은 피식 웃으며 물속에서 잠들어 있는 시미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에요?”

시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긴 뭐야? 책이지.”

준은 기존의 델타폰에서 화면사이즈만 키운 ‘델타패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루나에게서 공수받은 각종 어린이용 책들을 잔뜩 넣어 시미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일전의 사건 이후로 시미에 대한 책임감을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한다. 일단은 외도인지라 전투에도 참여시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쨌든 겉으로만 보면 사람에 가까운 존재이니 만큼,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어느정도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거에요?”

“너도 나중에 먹고 살려면 취직해야지.”

“우웅... 시미는 취직 안해도 괜찮은데요? 기생충처럼 준에게 붙어서 살건데요?”

“취직이야기야 농담이긴 하지만, 기생충이라니... 자신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밥값은 충분히 하고 있어.”

실제로 시미는 전투에 큰 도움이 된다. 만약 그녀의 능력이 알려지게 된다면 돈이 얼마가 들던 간에 그녀를 스카웃하려는 레이드 팀들이 줄을 설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든 공부라는 건 단순히 취직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야. 넌 아직 어리니까 이런 책들을 읽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준의 말에 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아듣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저 준이 이야기 하니 그게 맞는 말이겠거니 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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