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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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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너는...?”
군인들을 이끄는 이는 다름 아닌 볼칸 대위였다. 그의 뒤에 있는 이들도 한 번씩 본 기억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꽤나 공교롭군.”
하필이면 볼칸을 마주쳤다. 그와는 그다지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준도 그를 직접적으로 도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보기 껄끄러운 사이였다.
“여기서 대체 뭘 한거지?”
바깥에는 아직도 수없이 많은 연구원들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칼 레이건이 죽기 전까지는 부패하지 않았을 테니, 이제 막 죽은 시신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외부인을 맞닥뜨렸으니 누가봐도 준을 살인 용의자로 볼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위축되거나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욱 의심만 가중시킬 뿐이다.
“사냥을 나섰다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왔더니 이 모양이더군.”
“너는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뜻인가?”
“내가 무슨 관련이 있겠어?”
“이곳까지 오는 길에 수백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것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가?”
“아. 그건 내가 한 짓이 맞아.”
처처척!
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군인들이 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 저쪽에서 먼저 공격했다고.”
“그렇다고 그것이 수백에 이르는 민간인을 죽인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민간인이 아니라면?”
“무슨 소리지?”
준의 말에 볼칸의 턱근육이 움찔 거렸다. 준을 마주보고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한지 그의 표정은 내내 좋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이 연구소에 들어 올 때부터 이미 그 사람들은 죽어 있었다. 헌데 죽은 놈들이 일어나서 공격하기 시작하더군. 설마 시체를 죽였다고 처벌하는 법 같은 건 없겠지?”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볼칸은 최대한 참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수상한 녀석을 연행해서 취조하고 싶었지만 준은 상당한 실력의 헌터였다. 무턱대고 잡아들이려고 했다가는 이쪽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알카트뢰즈의 헌터들은 가능한 한 관리소 쪽에 협력을 하려고 한다. 괜히 반항했다가 수형기간이 늘어나면 자신만 손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선의 이야기였다. 만약 준이 연구소내의 민간인을 대량학살한 범인이 맞다면, 이 자리에서 자신을 포함한 군인 모두를 죽이고 탈출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만약 준이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라면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연행해야할 책임이 있었다.
“CCTV라도 확인해보라고. 연구소 안에 있을거 아냐.”
“이미 확인해봤다. 모두 파괴되어 있더군. 데이터조차도 모두 말소되어 있었다.”
‘그 양반 정말 철저했구만.’
아마 칼 레이건이 저지른 일일 것이다. CCTV를 제거한 이유는 연구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로 유출 시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그 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CCTV를 찾아서 전부 파괴하고 데이터까지 말소했다는 건가?”
“모르지. 네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볼칸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모든 증거를 지우면서까지 일을 저지른 녀석이 굳이 자신이 연구원들을 죽였다고 자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말이 안 될 것도 없지. 미안하지만 임의동행에 동의해 주었으면 좋겠군.”
“내가 순순히 그 명령에 따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미 연대 급의 숫자가 연구소 전체를 포위중이다. 민간인 사망자만 수백에 군인들의 사망자 수도 상당하지. 사태의 중요성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시미를 이용해 시야교란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볼칸의 말대로라면 시야교란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는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싫다고 한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데리고 갈 수밖에.”
군인들과는 정말로 악연만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수라드 행성에서의 일이 머리를 스쳤다. 이대로 순순히 끌려간다면 정말로 자신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서 풀려날 수 있을까?
“하나만 묻지.”
“뭔가?”
“내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쓸 가능성은 없는가?”
준의 물음에 볼칸은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해진 답변을 하는 대신 에둘러 표현하는 쪽을 택했다.
“진상조사와 판결은 내가 담당하는 일이 아니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을 참 그럴듯하게도 하는 군.”
준의 말에 볼칸의 얼굴이 다소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좋아. 그 임의동행이라는 것 하기로 하지.”
“정말인가?”
“왜? 설마 여기서 너희들을 다 죽이고 도망이라도 칠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군.”
볼칸의 말에 준이 쓴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 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준은 마음을 돌렸다.
어쩌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준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힘이 있다고 그 힘을 무작정 휘두르면 그것은 칼 레이건과 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했어.’
어차피 알카트뢰즈 관리공단에서 언제까지 자신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것 뿐. 어차피 한 번은 담판을 지어야 했고 그것이 지금이라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아니었다.
준은 볼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수갑이라도 채워야 하는 거 아닌가?”
“군인에게 많은 걸 바라는 군. 어차피 채워봤자 의미도 없지 않은가.”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럼 안내를 부탁하지.”
볼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팀을 다시 수색작업에 투입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부대원들과 함께 준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천천히 움직였다.
“잠깐.”
준이 손을 들어 볼칸을 제지하자 군인들이 긴장하며 준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동료가 있어서 그런 것 뿐이니까.”
“동료?”
“시미, 검둥아 이리 나와.”
스윽.
그러자 복도 구석에서 숨어있던 검둥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온몸이 검은 개와 그 위에 타고 있는 작은 소녀의 모습에 잔뜩 굳어있던 군인들의 표정이 미미하게나마 풀렸다.
“저게... 동료인가?”
“인류와 개는 역사시대 이전부터 함께 한 동료 아니겠어?”
“저 작은 여자아이는?”
“어쩌다보니 주웠어.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아직 애니까.”
“농담으로 듣지.”
볼칸은 약간 굳은 얼굴로 검둥이와 시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애완동물의 존재로 인해 긴장감이 떨어지려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다.
그래도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아 볼칸은 부하 한명에게 그들을 인솔할 것을 명령하고 천천히 복도를 나아갔다.
“후우. 엄청나군.”
연구소 밖을 나서자 준의 눈을 가득 메우는 것은 연구소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었다.
연대규모라고 하더니 확실히 엄청난 숫자였다. 알카트뢰즈 전체에 군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유사시 가용가능한 거의 모든 군인들을 불러모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한 삼천 명은 되겠는데? 대체 뭘 이렇게 모여 있는거야?”
“중대단위가 순식간에 전멸했으니, 이정도 모인 것이야 이상한 일도 아니지.”
수색조로 들어갔던 볼칸이 연구소 밖으로 나타나자 바깥에서 동정을 살피던 군인들의 모습이 부산스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이곳에서 기다리지.”
“원숭이가 된 기분이지만... 뭐, 어쩔 수 없겠지.”
준은 연구소 앞에서 볼칸과 함께 대기했다. 연구소 바깥에는 딱히 준을 구류하거나 할 장소도 없었고, 자칫 잘못해 준이 날뛰기라도 한다면 위험했기 때문에 차라리 이렇게 노출 된 장소에서 대기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그때 멀리서 꽤 나이가 있어보이는 군인 하나가 부관과 함께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뒤로 소총을 멘 수십의 군인이 따라붙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자 날개를 펼친 독수리 모양의 견장이 눈에 띄었다.
‘대령인가.’
군편제는 각 나라마다 다르다. 특히 무역연합 같은 경우는 각각의 PMC마다 독립적인 시스템을 가지다 보니 견장의 형태만으로 계급을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날개를 펼친 독수리 견장은 꽤나 보편적으로 쓰이는 편이었다. 준이 소속되어 있던 새크리파이스의 PMC인 나이트워치에서도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승.”
“전승.”
볼칸이 경례를 하자, 시어도어 대령이 맞경례를 했다. 그는 잠시 준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자가 그 자인가?”
“네. 연구소 지하에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연행했습니다.”
“흠. 그래?”
시어도어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름은?”
“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지?”
“연기가 보이기에 혹시나 하고 왔지. 그런데 꼭 여기 서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애들도 있는데.”
“애들?”
시어도어는 그제서야 준의 옆에 붙어 있는 검둥이와 시미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니다니. 헌터라는 녀석이 긴장감이 없군.”
“그거야 내 사정이고. 어떻게 할 거야?”
“그건 신경 쓸 것 없다.”
시어도어 대령은 그렇게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검정색 레이벤 선글라스가 햇빛을 받아 강하게 반짝였다.
“제군. 그곳에서 뭘 봤지?”
“죽은 사람들. 죽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글쎄. 이런 질문은 당신같이 높은 사람이 하기에 적절치 않은 것 같은데. 그냥 편하게 앉아서 취조하면 안될까?”
준은 다시 한 번 자리이동을 요청했다. 그를 둘러싼 군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약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대답해라. 그 여부에 따라서 제군의 거취를 결정할 것이다.”
“쯧. 군인들이란.”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칼 레이건을 만났다.”
“살아있었나?”
“지금은 죽었지.”
“제군이 죽였나?”
“아아.”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무뚝뚝해 보이는 대령이 무슨 생각을 하든, 준은 자신이 한 일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준의 말에 시어도어 대령이 의외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살인을 인정하는 건가?”
“외도를 죽이는 것도 살인으로 친다면.”
“그렇군.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지. 이곳에 들어온 이가 제군외에 다른 자가 있나?”
“글쎄. 어떨까.”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어도어 대령의 태도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대령이 입을 열었다.
“볼칸 대위, 가서 수색을 재개 하도록.”
“네? 하지만 그럼 이자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대위는 명령을 이행하도록.”
“전승.”
볼칸은 경례를 하고는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연구소로 향했다. 준은 시어도어 대령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볼칸을 물리다니.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시군.”
“눈치가 빠른 놈이군. 그럼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아아.”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칼 레이건의 이름을 말했을 때 보인 반응으로 준은 시어도어 대령이 이 일에 어느정도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칼의 이름을 듣고 그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사를 먼저 확인 한 것이다. 이 연구소의 목적을 알고 있는 시어도어 대령이 그곳의 유일한 목격자를 그냥 둘리 있을까?
“사격 준비.”
처처척!
시어도어 대령의 입이 떨어지자 그의 뒤에 모여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준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왕이면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가 생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시어도어 대령이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든 손을 내렸다.
“파이어.”
타타타타타탕!
타타탕!
엄청난 굉음과 함께 준을 향해 수천발의 탄환이 쏘아졌다. 각각 수천 줄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구리탄두가 준이라는 표적을 향해 음속을 넘어 날아들었다.
타타타탕!
탕!
사격은 군인들 전부가 탄창을 비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사격의 목표였던 준 알스버그가 두 눈을 멀쩡히 뜬 채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좀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 작품 후기 ============================
일단 한 편 먼저 올립니다. 나머지는 오전 8시에 올라갈거에요. 가능하면 세편 맞추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드뎌 100편입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썼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몇백편씩 쓴 분들도 넘쳐나는 조아랍니다만 저에겐 참 힘들게 온 길입니다.
저 혼자라면 이렇게 까지 쓰지는 못했겠죠. 독자분들의 피드백과 응원댓글 덕에 여기까지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여기까지 저와 함께 와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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