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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출현
“그랑튀르 이야기는 들었지?”
“연쇄강간마라며? 끔찍한 놈이지. 어떻게 같은 남자에게 그런 짓을...”
준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막스는 쯧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랑튀르 뿐만이 아니야. 이런 곳에서 오래 있어봐. 조금만 예쁘장하게 생기면 남자라도 자지가 서게 되어있다고.”
“풉!”
하필 물을 마시고 있던 준은 결국 다시한번 막스의 얼굴에 물을 뿜어야 했다. 막스는 쯥, 하고 혀를 한번 차더니 이번에는 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았다. 세수는 안 해도 되겠습니다, 하고 무스타파와 마흐무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런 이야기에 내성이 없는 모양이구만. 아직 새파란 애송이야. 애송이.”
“그런 이야기에 익숙해지는게 이상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보다 그 예쁘장하다는 말. 정말이야?”
“오. 아닌 척 하더니 기분은 좋은 모양이네? 괜찮은 남자 소개시켜줘?”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말고. 그냥 정말로 조심해야 하나 싶어서.”
솔직히 반쯤은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진심으로 정조를 걱정해야할 상황이 오게 된다면 그리고 그게 생김새 때문이라면 얼굴에 검댕이라도 묻히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만 됐고,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멋대로 그만두지 마.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고.”
“거참 싫어하는 듯 하더니. 뭐, 네 실력 정도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혹시라도 바깥에서 친절하게 말 걸어오는 인간들 조심하라는 얘기지. 남이 주는 거 아무거나 먹지말고. 애송이는 왠지 잘 속게 생겼거든. 여자로 치면 그 뭐랄까... 잘 대주는 타입?”
“...”
준은 조용히 니들리스를 꺼내들었다. 막스가 땀을 흘리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워워. 농담이야. 성질 좀 죽이라고. 아니, 그보다 그거 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신경 쓸 거 없고. 그 입을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준은 자신이 잠시 마음을 놓았다는 사실에 반성했다. 짜증나는 녀석이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그곳을 파고 들어온다.
그래도 진심으로 화를 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게 또 막스의 거슬리는 점이다. 애매하다는 것. 애매해서 화를 못 내게 만든다. 준은 한숨을 쉬며 니들리스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모습을 막스가 신기하게 쳐다보는 듯 했지만, 어차피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소한 것들을 일일이 감추기 시작하면 숨겨야 할 것이 한도끝도 없었다.
“어쨌든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최근 나하라 근처에서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 같아.”
“던전?”
준도 얼핏 그런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외도가 튀어나오는 웜홀이 때로는 사라지지 않고 상시적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각종 특이외도와 함께 결정체가 가득하다는 그런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전부 친구의 친구나 아는 오빠의 친한 헌터, 혹은 인터넷에서 봤다는 이야기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랑튀르 형제단 놈들도 그것 때문에 이쪽에 왔다는 거야. 그런 흉악한 놈들이 이렇게 별볼일 없는 곳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올 리가 없다면서.”
“그런 미신같은 이야기를 여기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는거야?”
“미신이라니. 엄연히 존재하는 곳이야. 나도 한번 가봤었다고.”
“정말?”
“그때는 아직 실력이 부족할 때라 다른 팀에 끼어서 갔었지. 헌데 들어가자마자 앞선 레이드 팀이 전멸당하고 겨우 도망쳤었어.”
“그렇게 위험한 곳인가?”
“모르지. 던전에도 등급이 있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비교적 약한 곳이라는 이야기는 있는데, 실제로도 그런지는 가서 눈으로 확인해야 할 수 있지 않겠어?”
저렇게 까지 이야기하는데 마냥 거짓말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워낙 적기도 했고, 비교적 최근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니까.”
“최근?”
“그래. 최근이라고 해봐야 10년 전 쯤 부터지만. 하여튼 그때 쯤 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올해 들어선 갑자기 그 수가 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나도 바깥에 안나간지 오래돼서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 알카트뢰즈에서는 이제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막스의 말에 준은 불길함을 느꼈다. 본래 웜홀이라는 것은 일회성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헌데 던전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유지되는 웜홀이다. 제거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끊임없이 외도를 뱉어 내는 것이다.
‘이거 굉장히 위험한거 아냐?’
단순히 던전 한 두 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외도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세계에는 일반외도만이 존재했다. 그것조차도 잡을 수 없어 인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헌터들의 등장으로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었고, 잠시 한숨을 돌리나 했을 때 갑자기 특이외도가 나타났다. 특이외도가 나타났을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가. 하지만 현재는 어떻게든 특이외도들 마저 몰아내 가며 인류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던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세 번째 변화였다. 인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외도도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많이 나갔다.’
준은 고개를 흔들어 일단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을 털어냈다. 아직 드러난 사실은 별로 없었다.. 던전 한두 개 나타났다고 벌써부터 인류의 위기를 운운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분만은 나아지지 않았다. 준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밖에 저렇게 모인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거지. 사람들을 모아서 던전을 찾든지 그랑튀르 형제단을 찾든지 결정하자는 거지. 대부분의 의견은 던전쪽으로 기우는 것 같지만.”
“그래서, 그쪽 팀도 참여할 생각이야?”
“어쩌면. 혹시 네가 생각이 있다면 함께 어때? 보상은 섭섭지 않게 나눠줄게.”
막스의 제안에 준은 잠시 흔들렸다. 그랑튀르 형제단에 대한 무의식 적인 공포가 있긴 했지만 던전이라는 것의 존재가 궁금하기도 했다.
흔한 것이 아니다 보니 한번 알려지면 이렇게 몇 개의 레이드 팀들이 합작해서 들어간다고 했다. 애초에 난이도도 높아서 한 두 개 팀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발목을 잡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준은 이대로 만 해도 꽤나 짭짤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상점에 파는 니들리스 해머의 가격도 상당했고, 대흉근과 함께 붉은색 특이외도 사냥만 꾸준히 해도 엄청난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안정적인 방식을 버려두고 굳이 뭐가 나올지 모르는 던전에 갈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던전에 대해서 알고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나타난다면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것이 틀림없었고, 그럴거라면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미리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막스의 말대로라면 도망칠 수도 있다고 하니까, 여차하면 스쿠터라도 타거나 정 안되면 대흉근을 타고 도망가면 될 거다.
“아. 참. 그리고 너무 고마워 할 필요 없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던 막스가 돌연 그렇게 말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준이 그를 쳐다보자 막스는 그저 말없이 웃으며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그날 바로 출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헌터들은 던전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준비들을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쾅쾅쾅!
“준! 준!”
모자란 아침잠을 더 잘까 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준을 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상점주인 밥이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준을 보자마자 외쳤다.
“큰일났어! 큰일!”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이렇게 호들갑이야? 어디 전쟁이라도 났어?”
“대박이 터졌어! 그거! 벌써 다팔렸다고!”
그거라면 니들리스 해머 외에는 없었다. 준은 조금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얼마짜리인데 벌써 다 팔리겠는가.
“뭐라고? 물건 넘겨준 게 어제인데 오늘 다 팔렸다는 게 말이 돼?”
“그러니까. 나도 전혀 기대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와서는 네 해머를 내놓으라고 닦달을 하더라고. 다른 마을에 보낼 것까지 전부 쓸어가버렸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그가 침을 튀기는 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밥이 원래 저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하던 준은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니들리스 제작을 의뢰하러 온 거야?”
“맞아. 지금 당장 열 개만 만들어줘. 지금 예약 손님도 스무 명 가까이 된단 말이야.”
“아니. 당장 열 개라니...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그렇게 비싼 걸 왜 그렇게 사려고 하는거지?”
“얘기 못 들었어? 던전이 생겼다고 다들 장비를 새로 구하는 중이라고. 그러다가 누가 니들리스 해머에 대해서 소문을 낸 모양이야. 지금 다들 장기라도 팔아서 살 기세라고.”
“아...”
준은 그제서야 막스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마워하지 말라더니. 이건 병 주고 약 주고인가...?’
준은 어쩐지 제대로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좋은 방향이었지만, 그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래서야 속으로 욕을 한 자신만 나쁜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만들어 줄 수 있어?”
“재료가 있어야 되는데. 철 200킬로그램 있어?”
“있어! 아니, 없어도 만들어 올게! 문고리를 뜯어서라도 가지고 올 테니까 기다려!”
“아니. 모자라면 그냥 적게 만들면 되잖아.”
“모르는 소리! 물건은 유행할 때 팔아야 되는거야!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안팔린다고! 누가 이런 비싼 물건을 사겠어!”
“가격인상의 주범이 그런 말을...”
하지만 준의 말은 허공을 때렸다. 밥은 이미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하. 이게 다 뭐야.”
준은 숙소에 가득 찬 고철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있는대로 긁어온다더니 정말로 문고리까지 떼어온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서 준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번쩍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익숙한 모양새였다.
“이거 변기...”
그는 윽 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 양반이 진짜. 적당히 해야지.”
하지만 이 말을 들어야 할 밥은 이미 상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본인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재료는 기본적으로 철이면 되기 때문에 강철이든, 스테인리스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 도안만 확실하면 결과는 동일하게 나오니까. 물론 기술자 전직 후 얻은 도안 저장 기능을 이용 해 니들리스 해머의 도안을 업로드 해 둔 상황이었다.
중간중간 녹이 심하게 슨 물건들도 있어서 혹시나 C급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술자를 직업으로 가진 때문인지 전부 B급을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열 개 맞추기는 했네.”
준은 니들리스 해머를 가져다주고는 결정체 100개를 받았다.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야 밀려오는 감동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가 되니 이렇게 쉽게 벌어도 되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델타를 얻은 이후 달라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준은 소시민이었다. 그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재벌한번 돼보는 거지.”
진짜 재벌이 들으면 코웃음 칠 소리를 지껄이며 준은 룰루랄라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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