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 ----------------------------------------------
세일럼의 마녀
“보세요. 이게 평범한 스패너처럼 보여도 사실은 무기에요. 해머나 메이스 같은. 안될 이유가 없잖아요.”
“미안하지만, 규격 외의 무기는 신고가 안된다네. 자격증을 발급하긴 힘들 것 같아.”
“말도 안 돼...”
준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벌써 많은 돈을 썼다. 숙소도 예약했고, 버스비도 엄청나게 비쌌다. 수중에 가진 돈 전부를 털었다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은 돈은 겨우 돌아갈 차비정도였다.
“어떻게 안될까요?”
“그것이... 참... 사정이 딱해보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법을 어길수도 없고...”
준의 말에 사내가 헛기침을 하더니 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준은 그제서야 사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준은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돈을 꺼냈다.
“더러운 자식.”
퉷.
준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시청을 빠져나왔다. 결국 안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준이 은근슬쩍 돈을 찔러주자 못이기는 척 하며 자격증을 발급해 준 것이다. 애초에 규정에 없다고 등록이 안된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이제 돌아갈 차비도 없네...”
준은 텅 비어버린 지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몇 만원이라도 남기고 줄 걸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가진 돈을 전부 준 게 문제였다.
당장의 식비부터 문제였다. 하루 이틀은 버틸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무리였다.
“셀럼 말대로 토끼라도 잡아야 되나.”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레이드 팀에 끼어들어야 했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굶는다. 새크리파이스에서 개처럼 일할때도 굶은 적은 없는 준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굶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근접딜러는 이미 충분하네.”
창을 들고 있는 중년의 헌터가 좋은 말로 거절했다. 찾아가는 길드마다 이런 식으로 거절당한 것이 벌써 열 번째였다.
준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최하급 헌터들과 싸워본적이 있고, 두 명을 쓰러뜨린 전력이 있다. 마나가 없을때도 그 정도로 싸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했다.
어쩌면 여기저기서 자신을 스카웃 해가려고 줄을 서지 않을까 상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헌터라는 직업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다름아닌 근접딜러다. 준의 입장에서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지만, 그런 어쩔 수 없는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델타를 얻고 나서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식었다. 이 정도 능력은 헌터들 사이에서 그리 드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빚을 더 져서라도 탱커를 할까...”
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신용도가 마이너스인 준에게 돈을 빌려줄 곳도 없거니와, 장비만 있다고 탱커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근접 딜러중에서도 전투에 능숙하고 어그로를 잘 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만이 탱커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탱커 자체가 드물었고, 그중에서도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자는 더 드물었다. 이제 겨우 3주정도 훈련을 받은 준이 할 만한 포지션이 아니었다.
준은 멍하니 세일럼 광장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헌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다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강철갑주를 걸친 사내였다.
“브라보 길드! 근딜 1명!”
준은 그때 사람이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뛰어나가며 손을 들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저요! 저! 주무기는 롱소드에 실드파이팅을 할 줄 압니다!”
“포이즌 대거 사용잡니다! 딜 잘나와요!”
“특이외도를 잡아봤습니다! 스킬도 있어요!”
“딜 짱셉니다!”
“전 킹왕짱 셉니다!”
“전 슈퍼울트라...”
저요! 저요!
사방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탱커에게 달려들었다. 보아하니 대부분 십대에서 이십대 사이의 남자들이었다.
준은 그제서야 이곳이 일종의 인력시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다보면 간간이 탱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근딜을 구했고, 그때마다 뽑힌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광장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건 뭐, 공사판 막노동자리 구하는 것도 아니고... 근딜이 이렇게 까지 싸게 팔리는 거야?’
헌터는 부족하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아직 외도는 넘쳐났고, 그로 인한 피해도 천문학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당연히 그 만큼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헌터였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역학관계가 있었다.
문제는 레이드 팀을 이끌 수 있는 탱커에 비해 근접딜러가 너무 많다는 것. 헌터들이라고 처음부터 부자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가난한 헌터들은 대부분 근접딜러를 선택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잉여 인력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꼬르륵.
슬슬 배가 고파왔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간 빌어먹게 생겼다는 생각이 든 준은 잠시 자존심과 배고픔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나...나도 딜 센데...”
준은 그렇게 슬금슬금 사람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가까스로 자리를 얻은 것은 거의 저녁이 다될 무렵이었다. 야간에 레이드를 하는 것은 금기였지만 팀에 라이트 마법에 능숙한 이가 있으면 야간조를 운영할 수 있었다.
“호랑이 길드의 탱커, 장민성입니다.”
“마법사, 서은설이에요.”
“기공사, 홍창만입니다.”
“아... 네 전 준 알스버그라고 합니다.”
“동양계시네. 귀엽다. 한국사람이에요? 나이는 몇살이에요?”
“아...아닙니다. 나이는 스물 한 살입니다.”
“오빠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아... 그... 편한대로 부르세요.”
준이 어쩔줄을 몰라 말을 더듬자 서은설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를 별로 상대해본적이 없는 준으로선 심히 난감함을 느껴야했다.
호랑이 길드는 FSLU(the Federated States of Liberty Unions), 즉 자유총연방소속의 국가에서 온 헌터들로, 안정적인 사냥터를 찾다가 세일럼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탱커가 있는 그들은 손쉽게 부족한 근딜을 구할 수 있는 이곳에 한동안 머물며 사냥을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처음이십니까?”
“아, 네.”
장민성의 질문에 준은 자연스럽게 허리가 숙여졌다. 초보자 중에서도 특히 첫 레이드를 뛰는 초보자는 어디서든 반기지 않는다. 장민성도 그런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않았고, 준의 허리는 더더욱 굽혀졌다.
헌터가 되면 더 이상 비굴하고 불쌍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단번에 처지가 이렇게 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단 근접딜러시니까 따로 지켜드리지는 못합니다. 혹시라도 어그로가 튀지 않게 딜 조절 잘 해주시구요. 제가 딜 중지라고 외치면 반드시 뒤로 빠지셔야 됩니다.”
장민성은 준에게 기본적인 사실을 숙지시켰다. 이미 셀럼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실전과 연습은 달랐다. 게다가 혹시라도 이들에게 잘 보이면 앞으로 레이드 팀에 끼워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 하자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후. 정신차리자. 이건 실전이야.’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델타를 얻은 이후 지금까지 너무 들떠 있었다. 니들리스(쓸데없이 큰 스패너)를 한 번 휘두르면 외도들이 파도처럼 쓸려나갈거라는 상상도 했다. 그런 정신 상태로 레이드에 나갔다간 틀림없이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말 하긴 뭐하지만, 사체의 부산물 운반도 해주셔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를 제외하면 다들 힘이 약해서 충분히 들고 갈 수가 없거든요.”
“걱정마세요. 보기엔 이래도 힘은 좀 강합니다.”
“뭐, 그렇게 보이네요. 그럼 출발하죠. 목적지는 이곳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가나안 숲입니다. 차량은 없으니 적어도 한 시간은 걸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빨리 트럭 한 대 사자니까. 그럼 더 멀리 나갈 수 있잖아. 부산물도 더 실을 수 있고.”
서은설이 툴툴대자 장민성이 그녀의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낭비야. 어차피 그렇게 많이 사냥하지도 못해. 그럴 돈 있으면 일단 장비부터 챙기는 게 맞다고 했지?”
쳇, 하고 입술을 비죽이던 그녀는 금세 기분이 바뀌었는지 준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걸리적거리는 여자다...’
적어도 몇 시간은 같이 있어야 하는 사이다. 준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참. 그리고 일단 출발하면 말은 편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장민성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 중에는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하지만 상대가 어른이든 아이든 나이가 몇 살이 차이가 나든 레이드 중에는 일단 말을 놓는게 기본이었다.
밤이라 레이드를 떠나는 팀은 많지 않았다. 서은설의 말대로 트럭을 몰고 나가는 팀도 있었고, 자신들처럼 걸어서 나가는 팀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팀내에 마법사가 하나씩 있다는 점이었다.
“근처에 외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능하면 붙어서 이동해. 준은 맨 뒤를 맡고, 앞은 내가 맡는다.”
장민성이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라이트 마법을 켜두었다고 해도 반경 20미터 정도밖에는 비출 수 없다. 그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기에 최대한 안쪽의 원거리 딜러를 보호할 수 있는 진형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럴때 엑조틱 레이더가 있으면 편한데.’
하지만 그런 장비는 꽤나 비싸다. 바쉬르에서 준이 사용하던 그 낡은 기계만 해도 수천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니, 이들 같은 최하급 헌터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싼 장비였다.
애초에 그런 물건은 특이외도를 사냥하는 중급이상의 헌터들이 사용하는 장비였다. 준은 새삼 대기업의 위엄을 느꼈다.
‘내가 그런 걸 쓰면서 투덜거렸다니...’
앞으로는 좀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준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서은설의 시선을 느끼곤 입을 열었다.
“뭐 묻었어요? 아니 묻었어?”
준은 황급히 말투를 바꿨다. 서은설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등 뒤에 그거 뭐야?”
“히익?”
준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짙은 어둠 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머쓱해진 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 치킨보이. 셀럼이 비웃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등 뒤에 그거 뭐냐니까?”
“자, 장난치지마. 너 귀신이라도 보는거야?”
“아니. 바보야. 등.뒤.에.매.달.린.그.거. 아무리 봐도 몽키스패너로 보이잖아.”
“아아. 이거. 이건 몽키스패너가 아니라 그냥 스패너야. 몽키스패너는 여기 이 구멍크기를 조작할 수 있는... 하아.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는거지?”
준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건데? 뭐 고칠거라도 있어?”
“아니. 내 전용무기인데...”
“뭐? 하나도 안 웃기거든?”
서은설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인데.”
“가끔 특이한 무기를 쓰는 사람도 있으니까 일일이 신경쓰지마. 그리고 입다물어. 니 목소리 때문에 있던 괴물들도 다 도망치겠다.”
보다못한 장민성이 나섰다. 서은설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장민성의 말은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 같았다.
‘대체 이런 녀석을 어떻게 컨트롤 하는거지?’
준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장민성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다행히 그 뒤로 서은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철없어 보여도 그녀 역시 헌터라 레이드의 위험성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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