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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알스버그
우주선은 비교적 최근에 추락한 것으로 보였다. 바쉬르는 비록 물은 없지만 대기도 짙고 온도차도 어느정도 있는 행성이다. 풍화나 침식이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주선의 외부는 폭발이나 충격에 의한 훼손을 제외한 다른 손상이 없었다.
준은 복잡한 회로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파편을 집어 들었다. 그것 역시 일부가 불에 탄 것을 제외하면 멀쩡했다.
[그건 뭐야?]
셀럼이 물었다.
[컴퓨터 모듈이네요. 본 적이 없는 모델이에요.]
준은 모듈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자세히 살폈다. 모듈에 박혀 있는 칩셋에는 알 수 없는 언어가 잔뜩 쓰여 있었다.
[상형문자 같은데, 인도 벵골문자와 비슷하네요.]
[이상하지 않아?]
셀럼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상하다는 건 제가 아까부터...]
[아니, 시체가 없어.]
[네? 아, 그러고보니...]
긴장상태였던 때문인지 그런 간단한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무인 우주선일까?]
[내부구조로 보아선 무인우주선은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용하게끔 되어있는 형태거든요. 게다가 이런 크기의 무인우주선은 본적도 없어요.]
[폭발의 충격에 휩쓸려 나갔다고 보기도 힘들지. 애초에 사람이 안탔거나, 아니면 아주 소수의 사람이 이 우주선을 움직이고 있었다고 봐야겠군.]
셀럼의 말에 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게 추락의 원인일 수도 있겠네요.]
[안쪽으로 들어가봐야 겠어. 외도의 움직임은 어때?]
준은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붉은 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것은 없어요. 이곳 어딘가에 엑조틱 에너지원이 있다는 것만 확인되네요.]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어?]
[아마 저 안인 것 같은데...]
준은 반토막이 난 선수부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더 자체가 오래된 것이라, 더 이상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모여서...]
셀럼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언덕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준도 그곳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보이. 일단 사람들 모두 모아.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뭔가 있나요?]
[설명할 시간 없어!]
셀럼의 표정은 어느때보다 진지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헌터들과 브랜든을 불러 모았다. 무언가 돈 될 만한 것들을 찾느라 혈안인 모습들이었지만, 그들도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몇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도대체 왜...]
투툭. 툭.
브랜든이 입을 열었을 때, 자갈크기의 돌이 큰 소음을 내며 어디선가 굴러왔다. 자신들이 왔던 길의 반대편 쪽 언덕. 그곳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셀럼이 큰 소리로 외쳤다.
[뛰어!]
두두두두!
언덕위에서 엄청난 수의 외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스캔도 제대로 안하고 뭐한거야!]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안걸렸다구요!]
툴리오의 외침에 준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한두 마리라면 어떻게든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를 쫓아오는 놈들의 수는 그냥 봐도 세 자리 수에 육박했다.
저런 숫자라면 아무리 셀럼이 있어도 무리다.
[헉. 헉.]
열차폐체와 함께 외벽이 뜯겨나간 우주선이었지만, 그나마 형태가 남아있는 구역이 있었다.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부서지지 않은 멀쩡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쯤 부서진 철문은 수동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빨리 도착한 툴리오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문이 움직이지 않아!]
[저리 비켜!]
막 도착한 셀럼이 반쯤 무너진 철문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끼이익!
[늦어!]
통짜 쇠로 되어있는 문을 힘으로 열어제낀 셀럼은 뒤쳐져 있는 준과 브랜든을 향해 소리쳤고,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달린 끝에 겨우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이--쾅!
모든 일행이 문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셀럼이 다시금 철문을 닫았다. 가히 기중기에 맞먹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헉. 헉.]
준이 숨을 몰아쉬며 철문에 등을 기대었다.
쿵! 쿵! 기기긱!
등뒤에서는 외도로 추정되는 녀석들이 문을 두드리고, 긁어대고 있었다. 준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문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철문은 육중한 만큼 쉽게 부서지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저런 걸 힘으로 열고 닫은 셀럼이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팟.
셀럼이 헬멧에 달린 라이트를 켜자, 일행이 하나둘씩 그를 따라 라이트를 켰다. 실내는 어두웠지만 열 명이 빛을 뿜어내자 이내 환하게 밝혀졌다.
일행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외도가 나타나더라도 상대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수가 저렇게 많으면 헌터고 뭐고 답이 없었다.
[몇 마리나 될까.]
헌터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셀럼이 통로 안쪽을 향해 움직였다.
[어디가요?]
준이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셀럼은 잠시 준을 바라보더니 또 고개를 돌려 다른 헌터들을 보았다.
[일단 다른 출구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 놈들이 들어올 만한 구멍이 있는지도 봐야하고.]
[가, 같이가요.]
[넌 여기 있어. 지금 상황에선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게 안전해.]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였다. 셀럼은 몸을 돌려 통로로 사라졌다. 선수부분만 남아 있는 우주선이었지만 원체 큰 우주선이다. 그가 언제 돌아올 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놈은 왜 안오는 거야?]
툴리오가 입을 열었다. 셀럼이 사라진지도 벌써 삼십분이 넘게 흘렀다. 막연히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초조함이 극에 달했는지 점점 예민해지고 있었다.
[설마 놈들에게 당한 건 아니겠지?]
다른 헌터가 입을 열었다.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누군가 입을 열었고, 말을 꺼낸 헌터는 입을 다물었다.
다들 불안해 하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철문 바깥에서 간헐적으로 긁어대는 소리와 쿵쿵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안쪽의 사람들을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쾅!
[빌어먹을!]
툴리오가 벽을 후려치며 욕설을 뱉었다. 쿵, 쿵, 쿵. 빌어먹을. 좁은 통로를 따라 소리가 메아리 쳐 울렸고, 바깥에서 외도들이 날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나갈 수 있을까?]
헌터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나가야지.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지. 젠장! 저 원숭이 새끼만 일을 똑바로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툴리오는 성질을 부리며 준을 향해 다가왔다.
[뭐라도 해봐. 이 자식아. 이런 상황에서 써먹으라고 네놈이 있는거잖아!]
[통신이 안되면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저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게 아니잖아요.]
준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는지라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툴리오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허. 이 자식이 뭘 잘했다고 말대꾸하는거야? 지금 너 때문에 다 죽게 생긴거 아냐!]
[그게 어째서 저 때문이에요? 전 애초에 여기까지 오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니가 잘했다는 거냐 지금?]
툴리오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무언가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는데 잘되었다 싶은지, 그는 앉아있는 준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쳤다.
퍽!
[컥! 우웩!]
헌터의 발길질은 매서웠다. 눈앞이 번쩍하며 끔찍한 고통이 복부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준은 바닥을 뒹굴며 위액을 토해냈다.
헬멧안이 토사물과 위액, 핏물로 가득찼다.
툴리오의 발길질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 새끼가 어디서 엄살이야!]
퍽! 퍽!
기분이 풀릴때까지 때리려는 셈인지 툴리오의 발길질은 거침이 없었다. 비명을 지르던 준도 어느 순간부터는 잠잠해졌다. 보다못한 다른 헌터 하나가 그를 뜯어말렸다.
[그만해. 그러다 죽겠어.]
[빌어먹을. 그러던지 말던지. 퉤!]
바닥에 침을 뱉은 툴리오는 움직임이 없는 준을 발로 슥 밀어보더니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기는 찜찜했는지 더 이상 건드리지는 않았다.
[쿨룩. 컥.]
준은 입가에서 침을 뱉어내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헬멧안을 가득 채웠던 토사물과 핏물은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바깥으로 빼내었지만 어딘가 잘못 맞았는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젠장. 빌어먹을 개자식. 죽여버린다. 죽여버릴거야.’
준은 어렵게 숨을 쉬며 끊임없이 되뇌였다. 하지만 당장은 움직일 힘도 없었다. 가슴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크흑...!]
갑자기 브랜든이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기가 찼는지 헌터들이 인상을 팍 찌루폈다.
[아주 개같은 것들이 쌍으로 지랄를 하는구만. 아가리 안 닥쳐! 어디서 이런 놈들만 기어내려와가지고 사람 환장하게 만드네 진짜.]
툴리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브랜든이 움찔하며 몸을 웅크리자 해코지 할 생각은 없는지 더 이상 다가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준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브랜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 하고 있었지만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소리는 막을 수 없었는지 계속해서 끙끙대고 있었다.
[씨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통신채널이 열려있는 상황에서 그 소릴를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저 새끼 진짜 죽고 싶은 모양이네.]
[참아. 쟤 상태 좀 안좋아 보이잖아. 더 건드렸다간 진짜 죽을거야.]
[어차피 저놈은 여기서 죽어. 아예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그 사이 튀는 건 어때?]
툴리오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나쁘지 않긴 한데, 일단 저 문을 여는 것도 어렵고... 열었다가 갑자기 튀어들어오면 저 녀석들 미끼로 쓰기 전에 먼저 당하고 말걸.]
[다른 출구를 찾아보면 되지. 흑인놈이 안오는 걸로 봐선 여기 상당히 넓은 모양인데 부서진 외벽이나 새로운 출구도 찾아보면 있을거야. 괴물들이 별로 없는 곳을 찾으면 그때 상황봐서 저녀석을 미끼로 던지고 반대쪽으로 도망가면 되지 않겠어?]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황당함, 분노, 하지만 그보다 앞서 무력감이 준을 사로잡았다. 저들은 자신의 목숨을 마치 자신들의 것인양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준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자존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설령 여기서 죽게 되더라도 저들에게 추한꼴을 보이기는 싫었다.
[일어나. 여기서 죽기 싫으면.]
툴리오가 억지로 준을 일으켜 세웠다.
빠직!
[커헉!]
엄청난 고통이 가슴을 때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른 모양이다.
[뭐야? 이자식 난 때리지도 않았는데?]
툴리오가 당황하며 준을 살펴보았다. 준의 안색은 새하얗다 못해 백지장처럼 보일 정도였다.
누가봐도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 벌써 죽으면 안되는데...]
툴리오는 짜증난 다는 듯 준을 들쳐 업고는 외쳤다. 그 거친 움직임에 준은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빨리 출발하자. 이자식이 움직일 수 있을 때 도망갈 방법을 찾아야 돼!]
[저 놈은 어떻게 하지?]
툴리오는 구석진 곳에서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브랜든을 보고는 뺨을 실룩였다.
[냅둬. 운이 좋으면 살수도 있겠지.]
툴리오는 준을 업은 채 동료 헌터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콰앙!
돌연 천장에서 굉음이 터지더니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젠장! 외도다!]
-크르르르.
녀석은 번들거리는 검은 외골격을 가진 곤충형 외도였다.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이쪽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접근한 모양이었다.
놈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은은하게 붉은 색을 뿌리는 결정체가 있었다.
[특이외도다! 모두 전투 준비!]
[젠장! 우린 탱커가 없잖아!]
툴리오가 외쳤고, 누군가 이어서 말했다. 이미 한번 잡은 적이 있었기에 크게 두렵진 않았지만, 문제는 이곳에 셀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통신 연결 해봐!]
[안 돼! 거리가 상당히 먼것같아!]
[젠장! 나에게 맡겨! 저 녀석에게 제대로 조명 비추고!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끝장이야!]
툴리오는 준을 던져버리고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뒷골목에서 소매치기와 강도를 하며 자랐다. 빠른 몸놀림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공격. 모두 그가 살아남기 위해 몸에 익힌 것이고 그것에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카라랑!
곤충형 외도, 크롭스는 강철같은 외피의 등껍질을 부르르 떨었다. 그 소리는 마치 분쇄기의 날들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툴리오는 침을 삼켰다.
자신은 단 한방도, 맞지 않을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사실은 툴리오가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