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제왕신룡도(帝王神龍刀)
용신을 죽이기 위한 검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 아래, 인간의 형태였던 용신의 모습이 뒤바뀌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거세게 울부짖었다.
그 모습은 가히 용신이라는 말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자기가 모은 세계를 빼앗겼다는 분노를 가득 담아 포효하는 그를 보고, 서리스는 고고하게 검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누군가의 세계를 빼앗을 생각을 했다면.”
그와 함께 서리스의 두 눈동자가 금빛으로 선명히 빛났다.
“네 세계를 빼앗길 각오도 했어야지.”
하늘 위를 수놓았던 제왕신룡도가 용신을 향해 그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폭풍과 광명이 휘몰아쳤다.
서리스가 제왕신룡도를 휘두를 때마다 용신 또한 똑같이 맞섰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상황이 역전되어도 너무 크게 역전되고 말았다.
원래라면 무한한 세계의 힘을 바탕으로 싸웠을 용신이었지만, 그의 힘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신의 금색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용신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일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
세계를 집어삼키고, 집어삼키고, 또 집어삼켰던.
그때의 삶.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던 용신은 어느 순간 기억이 끊겼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세계를 삼키기 위해 수많은 삶을 살아왔던 용신에게는 더 이상 예전 기억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야 깨달았다.
지금 이것은 주마등이고.
너무 많은 세계를 집어삼킨 자신에게는 이제 주마등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조차 지키지 못한 이였으니까.
‘내 세계를 지키지 못했기에.’
남의 세계를 탐했고, 그 결과 남아 있던 기억마저도 소실되었음을 깨달은 용신은 눈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검 한 자루를 쥔 채 선명하게 자신의 별을 빛내고 있는 서리스를 말이다.
오로지 자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온 그를 보고.
용신은 머리 앞에 다가온 검을 본 채 눈을 감았다.
서걱!
짧은 절삭음과 함께 용신의 머리가 하늘 높이 날았다.
날아오른 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순간 용신의 거대한 몸체도 힘을 잃고 쓰러졌다.
추락한 그의 몸은 그것만으로도 산과 같아 산맥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거대함과 웅장함 아래, 서리스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투욱―
바닥에 닿은 발과 함께 서리스가 비틀거리듯 주저앉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이 제멋대로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력이 다 빠진 듯한 기분과 함께 서리스의 눈이 하늘로 천천히 올라갔다.
밤하늘.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마치 자신의 승리를 축복하듯 밝게 빛나는 그 별들을 보며 서리스는 하늘 높이 손을 올렸다.
“제가 해냈습니까?”
하늘 위로 질문을 고하듯 서리스가 물었다.
세계 침식의 원인이었으며 몇 세기에 걸쳐 세계를 위협하던 존재인 용신을 자신이 진정으로 쓰러트렸냐고 서리스는 하늘에 대고 물었다.
그 순간 하늘 전역이 환한 별빛으로 빛났다.
이를 확인한 서리스는 주먹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알 수 없는 여러 감정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는 게 느껴졌다.
15살, 펜타니엄 서리스의 몸에 빙의 되어 지금에 도달하기까지.
그에게 있었던 수많은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기억 중 단 하나도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펜타니엄의 몰락한 삼남.
몰락한 소드란의 가주.
평생을 바닥에서 전전하던 그의 인생이 어느덧 하늘 위 어느 별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짧게.
소리 없는 웃음소리가 서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웃음은 밤하늘 위에 조용히 메아리쳤다.
* * *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세계는 특별할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용신의 세계가 박살이나고, 그 파편이 전 세계로 퍼진 탓에 새로운 세계 침식들이 등장했고.
그런 세계 침식에 맞서기 위해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 월하십인은 하루가 짧다 하며 움직여야 했다.
최흉은 사라졌어도 새로운 세계 침식들이 세계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서 세계가 한 번 멸망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딱 한 날.
어느 지역에서 유성우가 떨어져 폭풍이 생겨났다는 말이 떠돌 뿐.
용신에 관해 아는 이들은 사실상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세계는 평소와 같이 굴러갔다.
멸망이라는 끔찍한 말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착쁜놈! 빨리!”
그리고 그런 세계의 흐름 속.
붉은 머리를 땋은 소녀가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을 감은 맹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다려 봐. 가고 있어.”
“정말, 너무 늦잖아! 내가 업어줘?”
“괜찮아.”
그들은 다름 아닌 도로시와 서발광이었다.
꽃단장하고, 옷도 말끔하게 입은 그들은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모인 곳은 어느 도시의 한 파티장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빌린 파티장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다 느려 터졌네.”
그러는 순간 두 사람은 익숙한 얼굴을 보곤 피식 웃었다.
거기에는 작년에 졸업한 제로가 있었다.
“제로, 빨리 왔구나.”
“당연한 거 아니야? 누굴 만나러 온 건데.”
제로가 코웃음 치듯 말하자 서발광은 웃음을 지었다.
“그야, 뮤리널이겠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반박하려던 제로는 몸을 돌리다가 멈칫하였다.
거기에는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샬롯이 있었다.
그녀는 제로를 한심하게 보고는 고갯짓했다.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제로는 이곳으로 오던 흰 드레스를 입은 뮤리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제로와 눈이 마주치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가 이내 살짝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뭘 보는 거야?”
“짜증 나게 생긴 녀석이 있어서 봤다.”
“뭐?”
욱한 표정으로 뮤리널이 제로를 노려보자 제로는 그 눈을 슬쩍 피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서발광이 도로시에게 슬쩍 속삭였다.
“저 두 사람, 분명 약혼했었지?”
“졸업하기 전에 했다고 들었어!”
약혼하고도 저 꼴인가.
투덕거리는 둘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서발광은 이내 도로시에게 팔이 잡혀 당겨졌다.
“둘 다 내버려 두고 어서 들어가자!”
“그래야지.”
덜컹!
열린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안에는 진수성찬이라 할법한 음식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웨이터들이 보였다.
열심히 음료와 음식들을 나르는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둘 다 일찍 왔군요.”
발렌타인이 둘을 반기듯 인사를 하였다.
오늘따라 한껏 꾸민 그녀를 보고 도로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랑 달라.”
“아, 그게 최근에 사마독주로 좋은 향을 내는 기술을 익혀서요. 그 탓일 겁니다.”
발렌타인이 그리 말하자 서발광만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향수까지 준비했는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다들 뭐 이리 일찍 왔노.”
그러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또 하나 들려왔다.
푸석한 머리카락에 정장을 입었음에도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그는 모두를 보며 하품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말 하는 스타리즈 네놈도 평소보다 훨씬 빨리 온 것 같다만.”
그와 함께 이바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스타리즈는 한차례 쓴웃음을 흘리곤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주인공은 다른 녀석이니, 마지막 자리는 양보해야 하지 않겠나.”
스타리즈의 말을 듣고, 이바드라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선배보다도 빨리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다니.”
그러자 어느새 나타난 엑스널이 못마땅한 웃음과 함께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후배님들 내 동생은?”
그러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서발광이 밖을 가리켰다.
“문 앞에 있어요.”
“하아, 무슨 생각으로 펜타니엄 직계랑 약혼을 하나 했더니.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나 보네.”
한숨을 내쉰 엑스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주인공 후배님의 소식은 들은 사람이 있어?”
엑스널의 질문에는 모두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다 그다지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선배는요?”
“훈련해야 한다고 안 온다던데.”
“빅토르 선배답네요.”
그래도 이만하면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서발광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있는 이들 중 유명 인사가 아닌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수많은 아픔을 낳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영웅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들이야말로 그 영웅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들이었다.
여기 모인 전원이 사실상 월하십인을 목전에 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곧 오실 거예요.”
그러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하나 더 울려 퍼졌다.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보랏빛과 검은빛이 반반 뒤섞인 드레스를 입은 아이랑이 서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는 화장과 드레스까지 마쳐 평소보다도 더 화사한 꽃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한차례 웃음 지어 보였다.
“느낌이 그렇거든요.”
그게 무슨 느낌인지는 다들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이랑이 이런 감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말이다.
뚜벅―
그러는 순간 예민한 그들의 귀에 발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상당히 묵직한 그 발소리를 듣고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한 순간, 밖에서 한차례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파티를 관리하고 있던 점원들이었다.
당황한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에도 발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잠시 후, 문 앞에 누군가가 우뚝 멈추어 섰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긴장한 순간, 끼익하니 문이 열렸다.
밝은 햇빛을 후광 삼아 안으로 걸어 들어온 한 남자는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보곤, 한차례 웃음을 지었다.
“다들 기다렸어?”
그가 질문을 한순간 모두가 괜히 울컥한 기분을 느꼈다.
“서리스 님!”
“직계님!”
“서리스!”
제각기 다른 호칭으로 그를 부른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서리스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모두를 받아 주었다.
인파에 파묻힌 서리스는 이곳이 바로 자기가 돌아올 곳임을 재차 확인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평생을 걸쳐 싸운 용신과의 전투가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이걸 지키려고 그토록 싸웠구나라고.
서리스는 그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왁자지껄한 파티 분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서리스는 테라스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곤 아직까지도 목에 차고 있던 펜던트를 손아귀에 쥐자 거기에서 검은색 개구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다름 아닌 흑마녀의 개구리였다.
“이제부터 어쩔 거야?”
흑마녀의 질문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보았다.
“늘 살던 대로. 그렇게 살겠지.”
평생의 숙원이었던 용신은 분명 쓰러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리스의 삶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서리스는 그날 몸에 잠재되어 있던 세계 침식의 힘과 아르마를 거의 잃었다.
그것은 세계의 힘을 빌린 한순간에 쥐어짜 꺼낸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자신 스스로 지닌 별 하나뿐.
그 하나마저도 엄청난 것이지만 서리스는 그다음을 보고 싶었다.
“너야말로 어쩔 거냐.”
서리스는 그날 흑마녀와 거래했던 대로 아르마를 일부 나눠 건네주었었다.
아르마는 새로운 세계를 꽃피울 씨앗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서리스가 묻자 흑마녀의 개구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같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 말은 흑마녀의 목표로서 충분했다.
서리스는 펜던트를 풀어 흑마녀의 개구리에게 건네주었다.
나름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고마웠어.”
흑마녀의 감사 인사를 듣고 서리스는 짧게 웃었다.
그녀 또한 이제 자기 삶을 찾아가리라.
테라스에서 홀 안쪽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거기에는 많은 지인이 지금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지킨 세계.
그 세계에서 앞으로 살아가리라고.
서리스는 그렇게 웃음 지었다.
그러는 순간,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자신이 잘 아는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윌즈베르크 아이랑.
“바람이라도 쐬러 오셨나요?”
그녀를 보고, 서리스는 지금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쉽게도 바람 쐬는 것보다는 서리스 님을 뵈러 온 거라서요.”
꽤나 대담한 말을 듣고 서리스는 테라스 난간에 등을 기대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요.”
“네, 아주 중요한 내용이에요.”
아이랑은 그렇게 말하곤 한차례 심호흡하였다.
그러곤 이내 가슴팍에 주먹 쥔 손을 올린 채 결연한 표정으로 서리스를 보았다.
서리스는 그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저번에 일이 다 끝나면 이야기해 주신다는 거, 소녀도 이제 들을 수 있을까요?”
서리스의 눈이 한차례 깜빡이었다.
자기가 들을 거로 생각한 것과는 다른 질문을 들었다는 듯.
서리스는 잠시동안 머리를 한차례 긁적이곤 이내 천천히 웃었다.
“네, 그러죠.”
“그리고 서리스 님한테 오늘 청혼하려고 해요.”
“네, 그것도…….”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다가 이게 변칙적으로 들어온 질문이라는 걸 눈치채고, 멈칫하였다.
설마하니 뒤에다가 그런 말을 덧붙일 줄이야.
아이랑이 계획이 들킨 게 부끄러운 듯 앙큼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서리스는 무심코 따라 웃었다.
“이 대답은 좀 더 나중에 듣겠지만요.”
아이랑은 그렇게 말하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녀 말고도 또 한 명 그녀와 같은 말을 하고픈 여성이 뒤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라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한 기척에 서리스는 잠시동안 그쪽을 보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렇다면.”
일단 해주기로 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기왕 하는 거, 다른 이들도 다 모아서 털어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는 너무 많은 게 바뀌어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미래까지도 겸사겸사 곁들이면서.
내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