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용신(龍神).
수없이 많은 세계를 집어삼켜 멸망시킨 괴물이자 이제는 서리스가 사는 세계마저 노리고 있는 자.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으며 자신의 심상 세계 속에서나 한 번 본 적이 다인 용신을 떠올리며 서리스는 먹구름 위에 서 있었다.
그런 서리스의 옆에는 그림자에 몸이 묶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사상지평의 대주교 록산느였다.
“이 내가 이런 수모를…….”
“아까부터 쫑알쫑알 시끄럽기는.”
서리스가 록산느를 노려보며 말하자 그는 킬킬거리며 낮게 웃었다.
몸 전체가 그림자에 휘감겨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로도 그는 서리스를 무시하듯 바라보았다.
“내 수모는 용신님께서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일 테니. 특별히 눈감아 주마.”
“과연 네 말이 성립될지 두고 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서리스는 먹구름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 먹구름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놈이 여기에 다른 수작질은 할 수 없었다.
록산느에게 이어진 사상지평과 세계 침식의 힘을 모두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먹구름을 운용하는 것뿐.
그렇기에 서리스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시끄럽고, 얼마나 더 가야 하냐.”
서리스는 용신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다.
당연하지만 서리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이에 관하여는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오죽하면 스타로드마저도 서리스에게 록산느를 안내역으로 써먹는 게 맞는다고 말했겠는가.
그렇기에 서리스는 가만히 앉아서, 먹구름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남았다.”
록산느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용신에게 데려가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인제 와서 거짓말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를 한참.
서리스는 어느새 팔짱을 낀 자세로 먹구름 위에 편히 자리해 있었다.
“다 왔다.”
록산느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그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 그를 보고 서리스가 따라 고개를 든 순간, 구름 저 너머에서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투명하게 처져 있는 무언가가 서리스의 감각에 잡혔다.
‘성?’
서리스가 속으로 그 정체를 중얼거렸을 때, 먹구름이 하늘 위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마치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약간 찌그러진 먹구름을 보고, 서리스의 고개가 뒤로 향해졌다.
“다 왔다 했잖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투명하기 그지없는 성을 보며 서리스는 그림자로 록산느를 옮겼다.
“왜 인제 와서 두렵…….”
그러곤 앞쪽에 그저 하늘밖에 없는 곳을 향해 록산느를 뻥 하니 차버렸다.
나에게 차인 그가 그대로 투명한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마치, 다른 세계로 넘어간 듯이 사라진 그를 보고 서리스는 고갤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거, 세계 침식이다.
그것도 최흉과 버금갈 수준에 세계 침식 말이다.
‘이런 곳에 지금껏 숨어 있었던 거냐.’
서리스는 손을 들어 앞으로 뻗어 보았다.
그러자 서리스의 손이 그대로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그 기이한 광경을 보던 서리스는 이내 결심한 듯, 앞으로 발을 내뻗었다.
그 순간, 주위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거기에는 꽃들이 만개한 들판이 있었다.
방금까지 하늘 위에 있었는데, 갑자기 펼쳐진 들판에 기이한 느낌을 받은 서리스의 시야에 저 멀리 성 한 채가 들어왔다.
고즈넉하게 지어진 성은 상당히 오래된 듯, 그 외관이 꽤나 낡아 보였다.
분위기 있다면 분위기 있고, 음산하다면 음산한 분위기가 드는 성.
그런 성을 물끄러미 보던 서리스는 자신의 앞에 자빠져 있는 록산느를 보았다.
들판에 머리를 파묻은 그를 보고, 서리스는 그림자로 다시 들어 올렸다.
“그윽.”
록산느는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입에서 흙을 퉷하고 뱉어낸 그는 머리 위에 꽃 하나가 꽂혀있어 딱 미친놈 그 자체였다.
“바로 이동한다. 안내해.”
“네, 네놈은 내가 반드시 죽일 거다!”
“퍽이나 그러겠다.”
서리스는 그렇게 말하곤 그를 재촉해 다시 안내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록산느는 중간에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발을 움직였다.
‘새침데기 같은 놈 같으니.’
물론 그만큼 용신을 믿고 있기에 저러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 록산느와 함께 성에 도착한 서리스는 그 내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그랬지만 가까이 다가오고 나니, 더욱 낡게 느껴지는 성이었다.
그와 동시에 서리스는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뭔가 감지되는 즉시 바로 움직일 속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예민한 감과 함께 전신에 별과 아르나, 검은별 세 가지 기운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복도 입구 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리스는 기습할 생각으로 그 즉시 악스판시온을 뽑으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그 순간 걸어 나온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싸울 생각으로 온 게 아닙니다.”
무척이나 감미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이에 서리스는 그쪽을 바라봤고, 거기에는 백발 아래로 흰색의 마법진이 그려진 검은색 안대를 쓴 여성이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새까만 드레스에 황금의 수를 놓은 옷을 입은 그녀를 보고, 서리스가 경계 섞인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저쪽은 자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님!”
그러는 순간 록산느가 그림자에 묶였음에도 목을 꺾어 고개를 숙여왔다.
성녀(聖女).
사상지평의 성녀라도 되는 걸까.
대주교인 록산느마저 고개 숙이게 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성녀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앞에서 말한 건 사실입니다. 열쇠시여. 저는 그저 용신께 당신의 안내를 부탁받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성녀는 서리스에게 양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주교 록산느 대신 저를 인질로 삼아도 좋으니 그를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평화적으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록산느를 놔달라는 말을 듣고 서리스는 그를 돌아보았다.
“무, 무슨 불경한! 차라리 저를 잡는 게 맞지. 어찌 성녀님을 인질로 삼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자 록산느는 그림자에 붙잡힌 상태에서도 주름살을 떨며 커다랗게 외쳤다.
“록산느, 목숨은 소중히 해야 하는 법입니다.”
“무슨 말이십니까! 제 목숨 따위는 성녀님에게 빗댈 바가 되지 않습니다!”
몸까지 떠는 록산느를 보곤 서리스는 그렇다는데? 하는 눈초리로 성녀를 보았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서리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즉시 악스판시온을 들어 휘둘렀다.
서걱!
잘려나간 목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을 굴렀다.
마지막 유언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죽은 록산느를 두고 서리스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애초에 서리스는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윈 없었다.
록산느는 세계 배신자의 수장이고, 여기까지 그를 데려온 시점에서 그 필요성은 없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앞에 록산느보다 더 쓸만해 보이는 인질이 나타난 시점에서 록산느는 정말로 그 가치를 다한 셈이다.
“무려 대주교가 죽었는데 표정 변화 하나 없군.”
그리고 서리스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성녀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대주교 대신 자신이 잡히니 뭐니 했던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저희는 죽음을 맞이해도 전부 용신님의 품으로 돌아가니까요.”
“그래서 네 목숨도 쉬이 내놓을 수 있다 그거냐?”
“그렇습니다.”
성녀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코웃음 쳤다.
“그럼 나도 죽으면 용신의 품에 갈 수 있다는 거냐?”
서리스의 악스판시온이 투명하게 빛났다.
이 상황에서도 성녀는 여전히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있었다.
“네, 당연한 일이죠. 용신님을 위해 이토록 성심성의껏 헌신한 열쇠께서 어찌 그분의 품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정말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서리스의 입에 비웃음이 걸렸다.
“개소리하네.”
서리스는 자신이 직접 죽음을 직접 겪어보았다.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
서리스는 분명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마음속에 남아 있던 허망함이 온몸을 잠식할 뿐이었다.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아쉬움이 남을 뿐.
“당장 용신에게 안내해라. 너희가 죽으면 돌아간다는 그곳. 내가 개박살을 내줄 테니까.”
“그렇군요.”
성녀는 감흥 없이 그리 말하곤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럼 제가 안내역을 다시 맡으면 되겠네요.”
성녀가 편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서리스는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성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됐다. 어차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서리스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는 사이 복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바깥과는 다르게 먼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이곳을 보며 서리스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곳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어느샌가 복도 끝자락에 자리한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 앞에 다가간 성녀는 서리스에게 미소 지어 보이곤 문을 끼익하니 밀어 열었다.
그러곤 그를 향해 들어가라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서리스는 그런 성녀에게 코웃음 치곤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예전에 서리스가 심상 세계에서 보았던 검은색 머리카락에 금색의 눈동자.
언뜻 보면 서리스와 닮은 거 같기도 한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용신.
다른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그저 용신이라 불리는 존재.
그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서리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열쇠여. ]
용신이 입을 열자 주위 벽들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마치, 이 성 전체가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주위를 바라보며 서리스는 자기 턱을 한차례 두드렸다.
“꼭두각시나 세워두고, 뭘 하려는 거지?”
그렇게 말한 서리스는 눈앞에 있던 용신을 흥미 없이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성녀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성녀가 고개를 기울인 순간 서리스의 등 뒤로 검의 현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시답잖은 짓거리를 할 거라면 그만해라. 성녀, 아니.”
서리스의 눈빛이 용신과 똑같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용신.”
용신을 향해 서리스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