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혹한의 겨울.
끝없이 내리는 눈을 헤치며 서리스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징글맞게 모여있군.’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마수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놈들의 기척을 느낀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서리스의 등 뒤로 거대한 제왕의 검 형상이 서리기 시작했다.
태산과도 같은 검이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서리스는 그 즉시 그걸 앞으로 내질렀다.
제왕신룡도(帝王神龍刀)
앞으로 내뻗어진 제왕의 검이 하늘을 갈랐다.
눈보라를 갈라버리며 휘둘러진 검이 눈안개 너머 마수들조차 같이 갈라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서리스는 갈라진 마수의 틈 사이를 재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혹한의 겨울 심장부는.’
적어도 하루 이상은 가야만 한다.
혹한의 겨울도 그 크기가 작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속도를 더 올리기 시작했다.
최흉의 폭주로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 건 마키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가문들도 필사적으로 최흉의 폭주를 막고 있는 만큼.
서리스는 클리어 시간을 최대한 빨리 단축할 필요가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을 뚫어 나가며 서리스는 이를 아득 부딪쳤다.
‘모자라.’
터무니없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부족함을 느낀 서리스는 검을 쥐었다.
흑마녀는 최흉의 세계 침식을 이겨낼 수 없으므로 이 안에서는 공간 이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서리스에게는 달리는 거 말고는 다른 이동 수단이 없었다.
그러던 순간 서리스는 갑자기 발을 멈춰 섰다.
서리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신룡월단은 흐름 자체를 절단하는 힘이다.
그리고 용제는 시간마저도 절단하는 능력을 보였다.
‘시간마저 절단한 힘을 공간에도 적용한다면…….’
서리스의 검 위로 신룡월단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 내리는 겨울 한복판.
서리스는 조용히 서서 앞을 가만히 직시했다.
흐름이란 어디에든 존재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그 흐름을 절단함으로써 상대가 어떤 방어구를 둘렀다 하더라도 뚫어낼 수 있었다.
서리스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동시에 그의 눈에 이 공간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서리스는 신룡월단이 깃든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할 수 있다.’
저편의 공간과 이쪽의 공간을 동시에 가른다.
서리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흑마녀가 어째서 최흉에서 공간 이동을 쓰지 못했는지 알겠다.
공간 자체가 이렇게나 뒤엉켜 있으니, 공간 이동을 하려고 해도 좌표의 시작과 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
서리스는 집중력을 최대로 올림과 함께 그 즉시 공간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찌이이이이이익!
공간이 갈라지는 기괴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기를 잠시, 서리스가 고개를 든 순간 찢어진 공간 너머로 이쪽보다 더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눈이 보였다.
그곳은 오직 얼음으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그 땅을 바라보던 서리스는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그 순간, 서리스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혹한의 땅의 최중심부.
다름 아닌 설하의 땅이었다.
온통 얼음뿐인 그곳에 선 서리스는 스스로 공간 이동을 해냈음을 깨닫곤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자신이 최흉 안에서 공간을 넘어서는 경지까지 올 줄이야.
이걸로 더 빠르게 최흉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왔군.”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은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의 등 뒤에는 수천 마리의 마수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설하의 땅에서 얼음 내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마수를 얼릴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영황 마키나 드페리널.
그가 이곳에 있었다.
“설하의 땅까지 오신 겁니까.”
“이놈들이 밖에 나가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한 드페리널은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그것보다 10성에 올랐군.”
드페리널의 눈동자가 살짝 찌푸려졌다.
왜냐하면, 서리스의 성장은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번에 서리스를 보았을 때가 8성이었을 때니.
지금 서리스는 상식적인 선에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마황이 미리 전해둔 게 있어서일까.
드페리널은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모자랍니다.”
그 대신 서리스는 자기 생각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 드페리널은 잠시간 침묵하더니 곧 코웃음 쳤다.
“별까지 기어코 다 삼킬 속셈이냐.”
천상사성이라는 별.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 별조차도 서리스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그렇기에 드페리널은 그리 물었다.
검룡인 그가 기어코 별을 삼키고 하늘로 날아오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원래 욕심이 좀 많아서요.”
“그래, 욕심이 정말 많은 거겠지.”
세계 자체를 욕심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옛말에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 검제에게 들었던 말을 그가 하였다.
“그리고 그게 최근에는 다른 말로도 불리고 있더군.”
드페리널은 그리 말하곤 한차례 웃음 지었다.
“천하제일성(天下第一星).”
단 하나뿐인 제일의 별을 가리키는 말을 언급한 드페리널이 몸을 돌렸다.
“가면 갈수록 별에 가까워지는 우리에게는 딱 알맞은 말이겠지.”
드페리널의 몸 주위에서 별의 기운이 솟구쳤다.
왜냐하면, 설하의 땅 저편에서 또다시 마수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베푼 은혜를 마키나는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마수가 네게 다가갈 수 없게 만큼은 해주마.”
서리스는 그것을 보고, 한차례 웃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은혜라며 뮤리널과 혼인시킬 속셈이라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 딸을 그리 쉬이 줄 거 같으냐?”
“쉬이 주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겁니다.”
그리고 서리스는 얼마 전에 잠시 봤던 두 명이 어떤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지 또한 알았다.
하지만 구태여 드페리널에게 알리지 않은 그는 중심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잘 알겠지.
‘남은 건.’
고개를 든 서리스가 설하의 땅 중심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세계 침식을 보았다.
최흉 혹한의 땅을 거둘 시간이 왔다.
* * *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최흉의 폭주가 시작되며 세계가 한바탕 뒤집혔던 시점으로부터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
각 가문의 필사적인 고군분투로 최흉들은 한둘씩 잠재워졌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날뛰던 최흉들이 세계 각지에서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하며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해 갔다.
그 덕분인지 최흉이 사라진 대가문에 속한 일반 시민들은 마치 축제라도 일어난 양 기뻐했다.
평생을 시달려왔던 최흉이 사라지고, 그곳에 있던 땅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대가문을 칭송했고,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 그리고 월하십인들을 칭송했다.
그들이야말로 최흉을 없앤 영웅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 사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최흉의 폭주를 막았을 뿐, 실질적으로 최흉을 지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반 시민들에게까지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번 사태를 해결한 이가 누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룡 펜타니엄 서리스.
그는 월하십인에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야 모두가 잘 알았다.
왜냐하면, 최흉의 중심부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그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대가문에게 있어 평생의 숙원이었던 최흉은 그렇게 하나둘 정리되었다.
그리고 최흉의 폭주로부터 한 달 반이 흐른 시점.
최흉 깎아지르는 절벽에서 서리스는 끝없이 이어진 절벽의 아래 마지막 층에서 눈을 떴다.
서리스의 주위로 수없이 많은 최흉의 세계 침식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하루를 쉬지 않고, 최흉을 정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서일까.
서리스의 옷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상반되게 그의 눈은 금색으로 확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양 눈에 별을 담아 두기라도 한 양.
환하게 빛나는 눈을 한차례 감았다 뜬 서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끝났다.’
폭주한 최흉 중 마지막에 속했던 깎아지르는 절벽.
그곳의 모든 세계 침식을 흡수한 서리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몸 전체에 감도는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안도감이 들자마자 이대로 당장 눈 감고 싶단 생각이 들었으나 서리스는 애써 참았다.
여기 계속 남아 있다간 깎아지르는 절벽이 무너지며 파묻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흑마녀.”
서리스가 흑마녀를 호출한 순간 그의 인영이 잠시 흐트러졌다.
그럼과 함께 흐려진 시야가 돌아오자 서리스는 어느샌가 깎아지르는 절벽 맨 위층에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망막을 투과해오자 서리스는 잠시 눈을 비비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주한 최흉은 이제 더 없다.
드디어 모든 걸 잠재웠음을 깨달은 서리스는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살아는 있네…….”
솔직하게 감탄사를 담아 서리스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한 달 반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서리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서리스의 몸 주위로 흐르고 있는 세계 침식의 기운이 잘 설명해주었다.
삼킨 최흉만 두 자릿수에 가까울 지경이다.
이는 서리스가 당연히 이전보다도 훨씬 더 성장했음을 의미했다.
‘10성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림자가 다 담아내지도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저릿하게 울릴 정도로 강렬한 검은별의 어둠과 별빛이 뒤섞이는 것을 느낀 서리스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딱 하나 제파림도 어쩌지 못한 마지막 최흉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쪽으로 갈 생각이야?”
흑마녀의 질문에 맞춰 불어온 바람에 서리스의 낡은 제복 로브가 휘날렸다.
그것을 동여맨 서리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낮이라 별이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 어딘가에 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별을 떠올린 서리스가 검을 들었다.
“그야, 당연한 소리잖아.”
딱 하나 남은 최흉.
별가루 평원.
과거 소드란을 저주하고, 몰락하게 만들었던 세계 유일의 월사자(月使者)가 사는 장소.
그게 바로 별가루 평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