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흘러나오는 숨결 사이로 별이 묻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10성, 한 사람의 생을 다 갈아 넣어도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영역.
그 영역에 들어선 서리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지금까지 제파림이 집어삼켰던 최흉의 세계 침식이 몸 여기저기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용제를 뛰어넘고자 천재를 모방한 그는 기어코 그 죗값을 치렀다.
그의 영혼은 지금도 분명 어딘가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리스가 세계를 바꿀 때까지 그는 자신의 힘 일부분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쌓은 업보의 죗값이라고 생각해라.’
어딘가에 있을 제파림에게 그리 고한 서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덕에 다시금 자신이 10성에 도달했음을 체감한 서리스는 흑마녀를 돌아보았다.
“흑마녀, 남은 최흉이 몇 개인지 확인할 수 있겠어?”
서리스의 질문을 듣고 흑마녀는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는 순간 그녀의 앞에 검은색 공간들이 여럿 열렸다.
흑마녀는 그 내부를 잠깐 훑곤 고개를 끄덕였다.
“셋.”
제파림 녀석…… 그새 많이도 흡수했다.
하긴, 그렇게나 먹었으니 자신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거겠지.
“게다가 애초에 제파림은 최흉의 주인이 되었을 뿐이지?”
“응, 최흉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어.”
제파림은 최흉의 주인 자리를 강탈했을 뿐.
자신처럼 끝없는 초롱의 모든 걸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직 그 힘의 뿌리는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제파림은 그저 열쇠의 역할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을지 모르겠지만.’
서리스는 용신과 대적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는 최흉의 근원까지 확실하게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쿠궁!
그때, 만악의 질병 저 너머에서 거센 진동이 울려 퍼졌다.
“서리스.”
마치 지진처럼 땅이 흔들리자 흑마녀가 그를 불러왔다.
“이건……?”
“주인을 잃은 최흉이 폭주하려 해.”
서리스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제파림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민폐를 끼치고 간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 이 사태가 만악의 질병만의 문제가 아니란 거였다.
세계 각지 최흉에서 똑같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세계 침식자가 일으켰던 최흉의 폭주와는 차원이 다른 사태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려 하는 것이었다.
“흑마녀, 펜던트에 확실히 붙어 있어.”
시간이 없다.
그걸 깨달은 서리스가 외친 그 순간, 흑마녀는 펜던트로 돌아갔다.
이를 보자마자 서리스는 지면을 디딘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우드드득!
그 순간 서리스의 양다리에서 근육이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
이에 지면이 움푹 파였고, 이내 서리스는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투콰앙!
마치, 포탄이 쏘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서리스는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10성에 오른 서리스의 뜀박질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동 기술이라 할법했다.
최흉은 공간이 비뚤어진 곳인 만큼 흑마녀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지금 전심전력을 다해 만악의 질병 내부로 가야 했다.
“흑마녀! 여길 정리하고 바로 다음으로 이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폭주한 최흉을 다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냐!”
“하나당 최소 하루 이상.”
흑마녀에게서 최악의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아무리 자신이 날고 기어도 모든 최흉을 한 번에 막는 건 무리였다.
제파림은 이곳의 주인으로서 그 폭주를 제어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서리스는 그와 결이 달라 거기까지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힘이 모자라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서리스는 달리던 속도를 더 올리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서리스는 자신이 많은 걸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에 세계를 구한다는 일 자체가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힘들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안다.
왜냐하면, 전생의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
소드란은 끝없는 초롱을 혼자서 막을 수 없다.
그건 대가문인 펜타니엄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대가문도 똑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조차 같았다.
“흑마녀, 스타로드 님께 연락 닿게 해줄 수 있겠어?”
천상사성.
세계를 지키는 네 별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서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펜던트 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알았어.”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펜던트가 얼마간 어둠을 흩뿌리다 이내 별빛으로 뒤바뀌었다.
[ 용제의 후계자. ]
그 순간 펜던트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마황 올스타드 스타로드의 목소리임을 눈치챈 서리스가 바로 입을 열었다.
“스타로드 님, 지금부터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최흉이 폭주하게 될 겁니다.”
[ 이상 현상은 이미 확인되었다. ]
역시 자신만이 세계를 지키는 게 아니라는 듯,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원인은 네 쪽인가? ]
“예, 용제의 동생이었던 제파림을 제거한 후부터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는 열쇠로서 최흉을 흡수해 그곳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 주인을 잃은 최흉의 폭주로군. ]
스타로드는 이야기 몇 개를 듣고 사태를 대충 다 파악했다.
[ 네게 해결 방법이 있는 거겠지? ]
그리고 이 또한 알고 있었다는 듯 스타로드는 물어왔다.
그 물음을 듣고, 서리스는 어느 때보다 확신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저라면 최흉을 전부 흡수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확신 섞인 그 어조를 듣고, 스타로드는 한차례 침묵했다.
[ 끝없는 초롱과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이 사라졌다고 들었다. ]
현재 세간은 떠들썩하다 못해 난리였다.
끝없는 초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펜타니엄은 본격적으로 끝없는 초롱이 있던 곳의 정화 및 개척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흉이 사라지고 나서 얻는 부수적 가치가 주목되며 펜타니엄의 명성이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 또한 사라졌다.
지금은 윌즈베르크에서 잠시 함구해 준 상황이라고는 하나, 얼마 안 가 정식으로 공표될 것이다.
당연히 용신과 열쇠에 관해서 아는 만큼 스타로드는 그것이 서리스의 짓이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 언제까지 숨길 속셈이냐. ]
끝없는 초롱에 이어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 또한 윌즈베르크가 한 일로 해달라고 한 것을 그가 눈치채서인지.
스타로드가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을 듣고 서리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최흉을 지금까지 막아 온 것은 대가문이지 제가 아닙니다.”
끝없는 초롱 당시 서리스는 자신이 소드란의 가주로서 배운 정보를 토대로 움직여 무사히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악의 질병의 경우에는 달랐다.
최흉에 관해서 아무리 정보를 모은다 한들 그 정보량은 직접 최흉을 막고 있던 대가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서리스가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을 무사히 흡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랑이 준 보따리에 있었다.
거기에는 아이랑이 윌즈베르크가 그동안 모아온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의 정보가 전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과 맞섰기에 담겨 있던 중요한 정보들.
그것을 토대로 서리스는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최흉의 끝을 낼 수 있었던 게 저 혼자서 해낸 일이 아니란 겁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지키고자 성벽을 쌓고, 그 위를 지키며 최흉에 맞선 이들.
그들을 위한 업적이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서리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딱히 선인도 영웅도 아닙니다. 단지, 모든 공을 혼자서 독차지할 양심 없는 이도 아닐 뿐이죠.”
세계는 혼자 지탱할 수 없다.
자신 혼자만이 살아가는 세계였다면 진작에 무너졌을 거란 걸 서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인물이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음을 서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최흉의 끝을 낼 수 있었던 건 대가문과 소가문을 포함해, 이를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확고하게 말했다.
“이 업적은 그들의 것입니다.”
마지막 말을 듣고 한차례 침묵하던 스타로드는 이내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그리해라. ]
자신의 고집을 들어준 스타로드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한차례 웃었다.
[ 네가 올 때까지 버텨주마. 그게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몫이었으니까. ]
최흉을 막는 것은 자신들의 임무라고 스타로드가 그리 말하자 서리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부탁이랄 것도 없다. 당연한 것이니까. ]
그걸로 충분했다.
서리스는 고개 들어 만악의 질병 내부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질병의 독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그곳.
악해였다.
과거 불터렉스에 왔던 시절을 잠시 회상한 서리스의 몸 위로 용인화가 덧씌워졌다.
오랜 시간 불터렉스를 괴롭혔던 질병이 끝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 * *
세계 각지에서 시작된 갑작스러운 최흉의 폭주.
그 때문에 대가문들은 초비상이 걸렸다.
하루가 멀다고 최흉에서 몰려드는 마수들과 싸우거나 최흉의 침식이 성벽을 갉아 먹으며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사시사철 늘 새하얀 눈이 내리는 마키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극한의 추위 속, 눈과 얼음의 마수들이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놈들은 최흉 혹한의 겨울 속 마수들이었다.
“으아아아악!”
그 순간, 병사 한 명이 마수에게 깔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
자기 죽음을 직감하고 비명을 지르는 그의 주변으로 무언가 반짝였다.
“기엑?”
퍼걱!
날아든 얼음의 검 한 자루가 눈으로 된 원숭이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 순간, 바닥을 박차며 뛰어든 한 남성이 얼음으로 세공된 검을 휘둘러 나머지 마수도 쓰러트렸다.
“아, 마, 마키나 엑스널 님!”
“물러나라. 진형부터 다시 정비해.”
“예!”
병사가 급히 일어나는 동안 엑스널은 성벽을 계속 넘어오는 마수들을 처리했다.
벌써 마수들과의 이런 전투만 일주일째다.
엑스널의 입에서 힘겨운 호흡이 흘러나왔다.
피를 깎는 노력으로 체력을 단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을 전투만 하니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마키나의 가주 영황 마키나 드페리널은 지금 혹한의 겨울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안쪽에는 성벽을 넘는 게 아니라 부숴 버릴 수도 있는 마수들이 여럿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쪽도 벌써 일주일째 소식이 없는 마당.
마키나의 직계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나 엑스널은 전에 없던 불안감을 느꼈다.
‘다른 쪽 소식에서 묘한 것들이 여러 개 들리긴 했었는데.’
최흉을 막았다거나 하는 소식 한두 개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혹한의 겨울 폭주를 막는 데 급급해 제대로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쿠웅!
그러는 순간 저편에서 또다시 마수들이 성벽을 타고 내려온 소리가 들렸다.
엑스널이 무거운 피로감을 털어내며 급히 발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하늘 위에서 유성 같은 뭔가가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본 엑스널은 반사적으로 의문을 표하다가 서서히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곧 그의 입가에 헛웃음이 그려졌다.
“나원 참!”
그 웃음과 함께 엑스널의 두 눈에 다시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본 그 유성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또 터무니없이 바뀌어서 나타날 줄이야.”
엑스널이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 아는 후배가 달리고 있는데, 자신이 멈춰서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로서 후배를 위해 버텨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