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절단된 나무가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서리스는 이를 제대로 확인도 못 하고, 몸을 틀며 뿌리를 막아내려 하고 있었다.
서리스는 휘두르려던 악스판시온을 멈춰 세웠다.
그에게로 날아들던 뿌리들이 전부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베자마자 멈춘 건가.’
바닥에 굴러떨어진 세계수를 보던 서리스는 뿌리들을 짓밟으며 내려왔다.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뿌리가 날아들었는지 나무 안은 빽빽하기 그지없었다.
‘많네.’
서리스는 가득 찬 뿌리들을 지나쳐 나와 바닥에 도착했다.
그러자 서리스의 발아래로 그가 잘랐던 세계수가 보였다.
‘이게 끝없는 초롱의 진짜 주인인가.’
서리스는 자세를 낮춰 세계수를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세계수에서 갑자기 초롱 빛이 나기 시작했다.
흠칫한 서리스가 급히 악스판시온을 뽑아 내려치려는 순간, 초롱 빛이 위로 올라왔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초롱 빛을 보고, 서리스가 검을 멈추었다.
검은별을 타고 뭔가 생소한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서리스의 목에서 펜던트가 빛나기 시작했다.
서리스가 이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인 순간, 검은색 개구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흑마녀.”
서리스가 흑마녀를 부르자 개구리가 그의 어깨 위에서 짧게 울었다.
“세계 침식의 마지막일 거야.”
세계 침식이라는 말을 듣고, 서리스는 초롱을 돌아보았다.
“해악이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냐?”
“흡수하면 될 거야. 베어 봤자 의미 없으니까.”
베어 봤자 의미 없다는 건 아마 신룡월단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서리스는 그 말을 듣곤 손을 들어 그 위에 올렸다.
그러자 서리스의 손아귀를 타고 그대로 초롱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서리스의 머릿속으로 한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그저 나무 한 그루로 버티고 있는 세계는 나무의 수명을 따라 시시각각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무는 용신에게 초롱을 묻혔다.
자신을 멸망시킨 존재지만 용신이 나아간 곳에서라도 이 멸망한 세계가 조금이라도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것을 본 서리스는 어느새 자신에게 완벽히 흡수되어 사라진 초롱의 흔적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끝없는 초롱의 힘이 점차 약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크기가 워낙 방대한 만큼 한 번에 다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끝없는 초롱을 이루던 세계수의 초롱이 저버린 만큼 더 이상 이 최흉은 유지될 수 없었다.
멸망한 세계의 씨앗이 자신의 안에 녹아드는 것을 느낀 서리스의 두 눈이 조용히 타올랐다.
끝없는 초롱의 끝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용신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우리 세계도 이와 같은 꼴이 될 것이었다.
그런 꼴이 되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뿌리들을 대충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끝없는 초롱을 다 흡수해야만 했다.
서리스의 검은별이 최흉을 흡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목 뒤로 몰려드는 세계 침식의 힘은 지금까지 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다.
마치 끝없는 초롱의 진짜 힘이라는 양 서리스의 목 뒤에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진짜 최흉이라 이거냐.’
옥천의 땅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 침식에 서리스가 이를 아득 깨물며 버텼다.
목 뒤가 저릿할 정도로 서리스를 중심으로 최흉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파직!
그 순간, 검은색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마치 폭풍이 치듯 터져 나오는 스파크 속에서 서리스는 악착같이 버텨냈다.
“윽.”
등 뒤가 스파크 속에서 한차례 타올랐다.
감히 최흉을 받아들이려 하냐는 듯 연이어 터져 나오는 검은색 스파크가 아찔하게 느껴졌다.
서리스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태화조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제 한계라고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리스는 그림자에서 악스판시온을 쥐었다.
예전에 요치아에게 배웠던 것처럼 서리스는 한 검로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세계 침식을 인도하듯 시작된 서리스의 검로를 타고 세계 침식이 그림자로 뻗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서리스는 자신의 정신도 점차 아득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이 상황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끝없는 초롱의 주인인 세계수를 쓰러트렸다고는 해도.
옥천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인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만약 그들이 지금 덮쳐 온다면 서리스는 꼼짝 못 하고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서리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로를 그려 나갔다.
지금 끝없는 초롱을 흡수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다섯 시간, 여덟 시간.
열 시간, 스무 시간.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서리스는 반복적으로 검로를 그렸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새인가 하루를 꼬박 보낸 서리스의 시야에 언제 생겼는지 모를 호수가 보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새까만 호수.
서리스는 그 호수가 끝없는 초롱의 세계 침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또한 자신이 받아들여야 함도 무척이나 잘 알았다.
서리스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세계 침식으로 이루어진 이 호수 속에 자신을 맡겼다.
그러자 서리스를 중심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소용돌이는 호수 전체로 퍼지며 원을 그려 나갔다.
호수 위를 세 개의 별이 비추었다.
그 별빛들은 소용돌이를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일그러져 호수 내부로 흘러들었다.
그 별빛 아래에서 서리스가 호흡을 당긴 그 순간.
호수는 별빛으로 가득 차며 환하게 빛났다.
쏴아아아아아―
빗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흘 동안 검무를 이어간 서리스의 두 눈꺼풀이 천천히 떠졌을 때.
서리스의 눈동자에 밝은 금빛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한차례 눈을 깜빡인 서리스가 고개를 들어 세계수 밖을 바라보았다.
세계 침식은 이상 기후를 일으킨다.
끝없는 초롱의 경우 오직 초롱으로만 세계가 유지되고 있으므로 비가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들리는 빗소리가 뭘 말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최흉이.’
끝을 맞이했다.
그것을 깨달은 서리스는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눌렀다.
끝없는 초롱이 자기 목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마치 네 세계는 이와 같은 꼴이 되지 말라고 경고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뚜벅뚜벅―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예민한 귀에 한 발소리가 감지되었다.
사흘 동안 검무만을 반복한 만큼 본래라면 피로감을 느껴야 했을 테지만.
서리스의 육체는 지금도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마치 인간에서 벗어난 느낌이라 그리 썩 달갑지 않았지만.
용신이라는…… 세계를 몇이고 멸망시킨 존재를 상대하는 데, 인간이기를 고집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발걸음 소리를 따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왜냐하면, 그 발걸음 소리가 자신도 아는 이의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서리스.”
거기에는 서리스에게도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검황 펜타니엄 락로드.
그 또한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았던 듯, 옷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조금의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아, 그가 왜 천상사성인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서리스의 인사를 듣고, 락로드는 고개를 들어 텅 비어버린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여기까지 도달했나.”
그러곤 락로드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세계 침식의 주인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는 있었다.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 뿐.”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세계수를 떠올렸다.
세계수에 깃든 초롱은 세계수를 벤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끝없는 초롱에는 세계수가 뿌린 초롱에서 피어난 나무들이 이미 수없이 많았으니까.
하나의 나무를 베어도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난다.
그것이 바로 끝없는 초롱이었다.
그러나 서리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세계 침식을 흡수하는 힘을 지닌 서리스는 최흉의 근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끝없는 초롱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내게 세계 침식을 흡수하는 검은별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뚫고 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중간에 힘이 다해 죽었으리라.
검은별도 아르마도 없이 오직 자신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락로드야말로 진짜배기 괴물인 셈이었다.
“그런데 네가 해결했군.”
락로드는 그렇게 말하며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해결 못 한 일을 서리스가 해결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를 서리스가 멈칫하였다.
혹여나 락로드가 자신을 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상사성 중 마황과 무황은 자신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펜타니엄의 가주이자 서리스의 아버지인 락로드는 그 사정을 다 알고 있지 않다.
그저 자기 아들이 은연중에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을 뿐.
그렇기에 서리스가 살짝 긴장하자 락로드는 한참을 침묵하다 말했다.
“잘했다.”
그의 입에서 뜻밖의 칭찬이 들려오자 서리스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락로드에게 칭찬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서리스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끝없는 초롱은 펜타니엄의 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락로드는 세계수를 손으로 짚은 채 말했다.
“펜타니엄의 시작은 무척이나 초라했었다. 초대 가주께서는 끝없는 초롱에게 가족과 터전을 잃은 이들을 모아 가문을 세우셨지.”
펜타니엄의 초대 가주 이야기는 서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펜타니엄의 사람이었으니까.
“따라와라.”
그렇게 말한 락로드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리스가 그 뒤를 따라나서자 락로드는 한참을 걸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 빗줄기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이내 비가 그쳤다.
저 멀리 태양 빛이 조금씩 나무 사이로 들어오기 시작한 순간, 사방을 가득 메웠던 나무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리스의 시야 사이로 탁 트인 장소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해안가에 있는 절벽이었다.
저 멀리 푸르른 바다가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마치 수정과도 같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그 이름 또한 수정 바다라 불리었다.
“초대 가주께서는 수정 바다를 다시 보고 싶어 하였다.”
펜타니엄은 이토록 아름다운 수정 바다를 벗 삼아 세워진 가문이었다.
“그 핏줄인 우리가 수정 바다를 다시 보았으니, 그 숙원은 이루어졌을 거다.”
그렇기에 잘했다고.
락로드가 서리스를 칭찬하자 서리스는 울컥한 기분을 느꼈다.
평생을 소가문의 가주로서 무시당하고 살았던 지난날의 삶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가주였던 락로드에게 인정받기는커녕 펜타니엄 자체에서도 사실상 없는 가문 취급당했던 게 바로 소드란이었다.
「소드란 가문은 정말 별거 없지 않냐?」
「완전히 펜타니엄한테 기생하는 가문이라니까.」
그 당시에 다른 이들이 지껄이던 말이 서리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몰락한 가문의 가주로 살았던 자신이 결국 펜타니엄의 숙원을 이루었다.
“……예.”
그 사실이 서리스의 가슴 속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서리스, 가주가 될 테냐.”
수정 바다에서 비추어진 태양을 등진 채 락로드가 물었다.
그러나 서리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한차례 웃음을 흘렸다.
끝없는 초롱을 끝내고 수정 바다를 되찾은 서리스는 누구보다도 펜타니엄 가주 자리에 어울렸다.
그러나 서리스는 이날 이때까지 계속해서 말해왔다.
가주란 자리에는 신물 났다고 말이다.
“저는 더 큰물에서 놀겠습니다.”
서리스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락로드는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리하여라.”
처음부터 예상하였다는 듯한 그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서리스는 락로드가 자신을 완전히 인정했음을 조용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