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태악룡을 죽이고, 옥천의 땅에 들어선 서리스는 한 널찍한 공터에 자리 잡았다.
여전히 끝없는 초롱의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서리스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서리스는 마굴에서 세계 침식을 흡수하여 9성에 올랐다.
그렇기에 그때와 같이 이번에는 최흉을 흡수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서리스라도 이 순간은 긴장되었다.
‘마굴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굴 때는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의 세계 침식이 최흉 전체에서 가득 느껴졌다.
마치 숨만 들이쉬어도 세계 침식이 몸 내부로 들어오는 듯한 그 감각.
이러한 감각 속에서 서리스는 가부좌 자세에서 숨을 한차례 내쉬었다.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한 서리스가 태화조식을 시작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최흉의 세계 침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끈―
그 잠깐 사이에도 서리스는 목뒤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몸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그 감각은 최흉이라는 거대한 세계 침식을 또렷하게 느끼게 하였다.
서리스는 그 힘을 그대로 받아 내어 그림자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마다 검은별의 힘이 강해지며 먹물 같은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
“윽.”
짧게 서리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힘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서리스의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그건 한 세계의 기억이었다.
대륙 전체를 수놓은 나무들과 수많은 동식물들.
푸르른 초원은 언제나 편안함을 주었고, 거기서 살아가는 동식물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갔다.
그래, 그저 평화밖에는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용신이 그곳에 강림한 순간 그 평화는 한순간에 없어졌다.
하늘의 빛이 사라졌다.
하지만 딱하나 한 그루의 나무가 초롱을 꽃피웠다.
그러한 초롱 아래로 동식물들이 멸망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 시작된 초롱으로 버텨야만 하는 세계.
그곳이 바로 끝없는 초롱의 시작이었다.
그것을 본 서리스는 눈을 떴다.
여전히 최흉을 흡수해 나가고 있는 서리스의 눈이 옥천의 땅 너머로 향했다.
끝없는 초롱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었던 한 그루의 나무.
그 나무가 어디 있는지 서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이곳에서 어떤 의미인지도 말이다.
* * *
서리스가 옥천의 땅에 들어선 지도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옥천의 땅 각지를 돌아다니며 최흉을 흡수해 나가던 서리스는 몸 내부로 가득 차오른 검은별의 힘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점임을 서리스는 알고 있었다.
큰 주인들을 죽여 세계 침식을 흡수해도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리스는 그다음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끝없는 초롱의 진짜 주인.’
작은 주인과 큰 주인 같이 그저 끝없는 초롱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진짜배기 주인을 상대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말이다.
서리스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옥천의 땅을 돌아다니며 흡수할 세계 침식은 다 끝난 상황이다.
끝없는 초롱의 마지막을 위해 서리스는 나아갔다.
어차피 이미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지만 말이다.
서리스는 한 공터로 진입했고, 그런 그를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맞이했다.
“…….”
그 나무를 보며 서리스는 한차례 침묵했다.
세계 침식을 흡수해 나가던 와중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 앞에 보이는 나무의 크기는 커도 너무 컸다.
마치 세계 전체를 감싸기라도 하려는 듯, 이 나무는 일대의 하늘을 전부 뒤덮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면.’
하늘에 닿아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며 서리스는 나무에 맺힌 초롱들을 보았다.
가끔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초롱은 나무에서 굴러가 땅에 심겼다.
그리고 곧 그 나무가 피어나며 끝없는 초롱 속 나무 한 그루가 되었다.
끝없는 초롱이 어떻게 계속해서 그 넓이를 늘려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저게 끝없는 초롱의 주인.’
천상사성도 도달하지 못했던 자리까지 들어왔음에 서리스가 한차례 전율했다.
그 어느 누구도 파헤치지 못한 곳에 도착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거두어야 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소가문 가주 시절부터 징글맞을 정도로 보아온 세계 침식이다.
그걸 자신이 거두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끝을 맺어야 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리스는 천천히 아래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끝없는 초롱의 나무, 세계수는 마치 거대한 구덩이 안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심연의 나락 속으로 스스로 걸음을 옮기는 기분과 함께 서리스가 한참을 나아간 순간.
서리스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서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위험과 마주할 때마다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하, 그래.”
쉽게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서리스는 순식간에 용인화를 끝냈다.
쿠구구구구궁!
그 순간 대지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축을 뒤흔들어 버리는 듯한 진동에 서리스조차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세계수에서 태악룡 따위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맥박이 뛰듯 세계수에서 시작된 울림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서리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 순간 콰득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박살 나며 옥색의 뿌리가 치솟았다.
거기선 딱 봐도 적의가 가득 느껴졌다.
그 순간, 뿌리 하나가 서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챙강!
즉시 악스판시온을 뽑아 받아친 서리스는 뒤로 크게 밀려났다.
‘나무 뿌리 주제에 어떻게 이런 힘이 담겨 있는 거지?’
서리스의 두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빠득, 빠드득!
그 순간, 여기저기에서 뿌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땅을 부수고 솟아오른 옥색의 뿌리들이 끝없는 초롱의 숲처럼 시야 전체를 뒤덮는 기분이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르마가 발동되었다.
용인화의 절반이 백색으로 바뀌자마자 서리스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럼과 함께 검에 서린 무형의 기운이 뿌리 하나와 맞부딪쳤다.
서걱!
잘려 나간 거대한 뿌리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뿌리는 곧바로 재생되고 있었지만, 서리스는 그 틈을 파고들어 겨우 뿌리의 파도를 피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간 순간 서리스는 보고 말았다.
방금 자신이 지나쳐온 뿌리의 파도는 세계수의 가벼운 견제였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뿌리의 파도 너머, 사방에서 쏟아지는 뿌리를 보며 서리스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럼과 함께 신룡월단의 기운이 서린 악스판시온을 쥔 서리스는 그림자 원판을 만들어 밟으며 뿌리들을 베어 가르기 시작했다.
팍팍팍팍!
뿌리의 파도들이 마치 송곳처럼 서리스에게 쏟아져 내렸다.
터무니없는 힘이 담긴 것을 증명하듯 뿌리들은 바닥을 박살 내놓으며 박혀 들었다.
그리고 땅에 박히는 즉시 뿌리가 갈라지며 사방으로 가시를 쏘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뿌리만 해도 거슬려 죽겠는데.’
한 번 피한다 해도 2차로 가시가 날아드니 여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방어하는 데 급급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뿌리들이 시야를 가리니 거리 감각도 마비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한 번에 뚫어야 한다.’
이대로면 정신력이 먼저 깎여 버릴 것 같았다.
“후웁.”
당긴 숨과 함께 서리스의 몸 위로 무형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서리스는 정신을 집중하며 기회를 엿봤다.
신룡월단의 기운이 전신에 퍼진 그 순간, 서리스의 눈빛이 변했다.
신룡월단(神龍狘斷)
삼식(三式)
용호분신(龍號奮汛)
그 순간 서리스의 모습이 마치 사자와도 같이 바뀌었다.
포탄과 같이 쏘아진 서리스를 향해 뿌리들이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서리스를 저지하려 했지만, 신룡월단의 기운에 닿자마자 죄다 찢겨 나갔다.
그 와중에도 서리스는 일점에 집중하듯 계속해서 나아갔다.
뿌리들을 죄다 날려 버리며 서리스가 한참을 나아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뿌리들은 계속해서 그의 앞을 막았지만, 서리스는 전부 뚫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점이 있었다.
신룡월단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벅차오는 순간.
꾸득―
이를 깨문 서리스는 몸 내부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룡월단의 기운을 서리스가 자제하는 이유는 흐름을 끊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힘은 장시간 사용할 시, 서리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서리스의 몸 여기저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룡월단이 서서히 서리스를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서리스의 두 눈에 실핏줄이 섰다.
이를 앙다문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더, 좀 더.’
빠드득!
아르마와 검은별로 이루어진 용인화가 부서져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인화가 풀리며 서리스의 육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슬슬 한계인가.’
서리스가 깊은 숨을 토해낸 그 순간 신룡월단이 용인화 전체를 갉아 먹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
서리스의 시야에 세계수가 보였다.
드디어 그 뿌리들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모든 뿌리를 뚫고 나온 그의 눈이 세계수에 닿았다.
서리스는 그 즉시 몸을 틀며 악스판시온을 들어 나무를 내려쳤다.
콰드드드득!
부서진 나무를 뚫고, 들어간 서리스가 바닥을 뒹굴었다.
서리스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텅 빈 세계수 내부가 보였다.
‘이건.’
세계수 내부라고 해도 그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시야 끝까지 보이는 거라곤 전부 나무뿐이었다.
구구구구구궁!
그러는 순간 세계수 내부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직 안 끝났어.’
서리스는 다시금 바닥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 내부 어딘가에 진짜 세계수가 있을 것이다.
‘어디냐.’
서리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계수 내부 전체에 그림자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눈으로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바닥에서 또다시 뿌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여기서도 사용 가능한 기술일 줄은 몰랐던 서리스가 다시 이를 악물었을 때.
그의 감각에 무언가 걸렸다.
‘찾았다.’
그걸 찾자마자 서리스는 바닥을 박찼다.
그런 그를 뿌리들이 빠르게 따라왔지만, 그의 속도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때, 서리스의 눈에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세계수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아담한 나무였다.
하지만 거기에 달린 초롱의 빛은 훨씬 강렬했다.
저게 바로 본체라는 확신이 서자마자, 서리스는 신룡월단의 기운이 서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렇게 휘둘러진 검은 너무나도 손쉽게 나무를 갈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