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태악룡.
과거로 돌아오기 전, 끝없는 초롱의 절벽 위에서 마주했던 그 용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비록 별 능력 없는 몰락한 소가문의 가주였다지만.
서리스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괴물은 설령 소드란의 별이 저주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없던 재앙이었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에게 서리스는 맞섰다.
자신의 몸을 던져 태악룡의 공격을 무마시켰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 태악룡과 마주한 지금 서리스는 심장이 격하게 뛰는 걸 느꼈다.
기억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죽였던 상대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내 죽음을 다시 마주할 기회가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아주 짧게 서리스의 머릿속에 과거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올드렌의 인생은 태악룡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서리스라는 인생을 다시 받았다.
왜냐하면, 용제가 자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서리스 자신이 태악룡을 상대하기 위해서 저주받은 소드란의 별을 가장 강렬히 불태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새 삶을 주었던 태악룡을 바라보며 서리스는 검을 내렸다.
“그거 아냐.”
혼잣말을 툭 던진 서리스의 몸 주위로 그림자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곳에 스며든 어둠은 서리스를 점차 한 마리의 용으로 만들고 있었다.
검룡.
용인화를 발동한 서리스는 이미 그 별호에 가장 알맞은 모습인 새카만 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태악룡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서리스의 몸속에 있던 아르마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한 마리의 새까만 용의 외피에 백색의 빛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흰빛이 자리 잡아 가면서 새로운 기운이 서리스의 몸 위에 서렸다.
아르마.
세계를 복원시킬 정도의 힘을 그가 처음으로 꺼낸 것이었다.
용인화를 발동한 서리스의 눈이 빛났다.
머리의 반은 흰색, 반은 검정색으로 나누어진 그가 스산한 웃음을 띄웠다.
“너한테 내가 크게 당한 게 있어서 말이야.”
그 말을 끝낸 순간, 서리스의 인영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태악룡이 뒤늦게 그가 움직였음을 깨달았을 때.
서리스는 이미 놈의 머리 위에 도달해 있었다.
“그걸 좀 갚아야겠다.”
끝없는 초롱의 성벽보다도 거대한 태악룡을 보며 서리스가 검을 들었다.
태악룡이 서리스가 자기 머리 위에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듯.
서리스의 양팔이 금강잔월의 힘으로 부풀어 올랐다.
강인한 육체는 곧 최고의 방어이자 무기일지니.
금강잔월(金强虥狘)
박살(撲殺)
그것은 화려한 검술이나 기교가 전혀 없는 단순 무식한 일격이었다.
투쾅!
“그라락!”
대체 얼마나 막돼먹은 힘이 담겼는지.
그 태악룡이 한순간이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렸다.
서리스의 박살은 옥천의 땅 전체가 떨릴 정도로 터무니없는 위력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태악룡의 머리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서리스는 이 정도로 멈춰줄 생각이 없었다.
들어 올린 검 위에 다시금 금강잔월의 힘이 담기기 시작했다.
“야, 내가 너한테 갚아 줄 게 좀 많아.”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서리스는 박살을 마구잡이로 태악룡의 머리에 꽂아 넣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가해지는 강력한 공격에 태악룡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태악룡이라고 해서 그냥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놈은 바닥에 닿기 직전 자기 머리를 꼬리로 감싸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조여 오는 꼬리와 몸통을 보며 서리스는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투쾅, 투쾅, 투쾅!
박살을 담은 연이은 일격이 꼬리와 몸통을 쳐내고, 잠시 벌어진 틈을 타 서리스는 몸을 빼냈다.
“그라라라락!”
그러자 분노한 태악룡이 몸을 뒤틀며 순식간에 서리스를 따라왔다.
마치 바닥을 기는 지네 마냥 땅 위에서도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쫓아오는 태악룡을 보고 서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잘 쫓아 오네.”
서리스는 마치 칭찬하듯 중얼거리며 악스판시온을 뒤로 당겼다.
이에 맞춰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제왕의 검이었다.
지난 몇 달간 최흉 속에서 살아가며 거대한 마수들과 끝없는 전투를 벌인 서리스다.
그 전투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제왕월영도를 단련했고.
그 결과, 이제는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 상을 줘야지.”
서리스의 악스판시온이 태악룡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자 등 뒤에 자리했던 제왕월영도 또한 서리스의 검을 따라 움직이며 태악룡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거대한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나무가 무너지며 생겨난 흙먼지 사이를 노려보는 서리스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며 시야가 좀 트였다.
제왕월영도가 내려꽂혔던 장소에는 양손으로 간신히 이를 막아낸 태악룡이 있었다.
그 강도가 어떻게 되먹었는지, 고작해야 손톱으로 제왕월영도를 견디고 있는 놈을 보고 서리스가 한차례 웃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자신을 죽인 놈답지.
그 순간 서리스의 목 뒤에서 별빛이 후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걸 잡은 걸 후회하게 해주마.’
그 빛이 전신에 깃들은 그 순간 서리스의 악스판시온 위로 무형의 기운이 서렸다.
그리고 잠시 후.
서리스의 악스판시온뿐만 아니라 제왕월영도 위에도 그 기운이 고스란히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신룡월단.
용신을 죽이기 위해 모든 흐름을 절단하는 그 힘이 제왕월영도 위에도 자리잡았다.
검제가 만들어낸 최강의 검술.
용제가 만들어낸 최강의 비술.
두 무제가 도달한 최강의 영역이 합쳐진 그 순간 새로운 길이 열렸다.
제왕신룡도(帝王神龍刀)
용이 제왕의 검을 쥐었다.
콰지지지지직!
태악룡 쪽에서 무언가 사정없이 갈려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왕월영도를 누르고 있던 태악룡의 손이 잘려 나감과 함께 그 검이 흐름을 탄 그 순간.
서걱!
잘려 나간 태악룡의 팔이 하늘을 날았다.
“그라라라라락!”
극심한 고통에 울부짖는 태악룡의 포효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추스른 태악룡은 새까만 광선을 쏘아 보냈다.
그 어둠은 마치 빗줄기와 같았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듯.
어둠은 하나의 죽음이 되어 서리스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서리스의 제왕신룡도가 현묘한 검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검의 흐름을 타고 이어진 춤사위가 제왕신룡도에 전해지고, 그 길을 따라 모든 어둠을 갈라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검사위 속에서 서리스는 달리고 있었다.
아르마 덕분인지 제왕신룡도를 휘두르는 와중에도 여유가 있던 서리스는 순식간에 태악룡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그가 들이닥치자 태악룡은 아직 멀쩡한 한쪽 팔을 급히 휘둘렀다.
서리스의 용인화와 유사한 어둠을 두른 손톱과 악스판시온이 맞부딪쳤다.
콰앙!
그러나 그 크기의 차이가 무색하게 튕겨 나간 것은 태악룡의 팔이었다.
어느새 놈의 코앞까지 도달한 서리스는 검을 휘둘렀고, 거기에는 신룡월단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신룡월단(神龍狘斷)
일식(一式)
용섬(龍殲)
용을 죽이기 위한 검이 태악룡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태악룡의 머리가 또 한 번 크게 꺾였다.
“그라라라라라락!”
연이은 충격에 정신이 없는지 이마에서 핏물을 쏟으며 튕겨 나간 태악룡이 분노하듯 울부짖었다.
그 순간 놈의 입 앞에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끝없는 초롱 숲속 전체에 퍼져 있는 초롱의 불빛을 흡수하기라도 하듯.
일순간 모든 빛이 태악룡의 입 앞에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서리스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한순간에 성벽을 지워 버릴 것만 같았던 태악룡의 그 일격.
그때 봤던 새하얀 태양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를 회상한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놓음과 함께 자세를 잡았다.
마치 자신을 붙잡고 있던 과거를 뿌리치듯 서리스의 몸 위로 금강잔월의 기운이 가득 드리웠다.
끝없는 초롱의 나무조차 가릴 수 없는 용제의 별이 이 부름에 답하듯 밝게 빛났다.
이제껏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그 별빛은 태악룡이 만들어낸 새하얀 태양보다도 더 강렬히 타올랐다.
그 속에서 서리스의 오른손은 하늘을 향해 왼손은 지상을 향해 뻗어졌다.
이윽고, 서리스가 오행을 만들어낸 그 순간 태악룡의 태양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태양이 닿지 못하는 끝없는 초롱에서 피어난 또 다른 태양이 주변 모든 걸 집어삼켰다.
그 속에서 서리스의 두 눈이 투명하게 빛났다.
오른쪽 손은 하늘을 밀어내고.
왼쪽 손은 지상을 누르면.
만물의 모든 것은 부정될 지어니.
금강잔월(金强虥狘)
오행상극(五行相剋)
사락―
금강잔월이 드리운 그 장소에 내려앉았던 태양이 마치 소멸하듯 사라졌다.
금강잔월의 최종 비기를 사용한 서리스의 눈이 태악룡에게 닿았다.
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당시에도 오행상극을 통해 태악룡의 태양을 지웠을 때, 놈은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아쉽게도 그때는 살아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오행상극을 사용하고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서리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신룡월단은 오행상극으로부터 시작된 비기였어.’
어째서 용제가 자신을 선택했는지 서리스는 이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신룡월단을 익히려면 오행상극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이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했었기에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었던 서리스는 다시금 악스판시온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서리스의 등 뒤로 또다시 용을 죽일 제왕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의 과거를 완전히 떨쳐낸 듯, 서리스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도 청명하게 빛났다.
그에 반해 태악룡은 두려움을 느꼈다.
옥천의 땅에서 큰 주인으로 살아가던 태악룡은 저 조그마한 인간 한 명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단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태악룡은 발악하듯 입 앞에 다시금 태양을 만들어냈지만, 때는 늦었다.
“미안한데…… 과거랑 노는 것도 이제 끝마칠 시간이야.”
그 말 한마디와 함께 서리스는 어느샌가 또 태악룡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이제는 아르마에 완전히 적응한 서리스에게 태악룡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의 위치를 눈치챈 태악룡이 몸을 뒤틀기도 전.
서리스가 마지막 박살을 놈의 머리에 내려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그 기술 명칭 그대로 태악룡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바닥에 쓰러지며 명을 달리한 태악룡 시체 위에서 서리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사이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던 용제의 별이 그의 시선에 응답하듯 한차례 빛을 뿌렸다.
그것을 보고 한차례 웃은 서리스는 태악룡의 세계 침식을 흡수해 나가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땅을 지키고자 스스로를 희생했던 울드렌을 추모하며.
서리스는 그렇게 다음을 향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