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큰 주인들이 살아가는 세계인 대천의 땅.
서리스는 나무가 빽빽이 차오른 절벽 위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멀리서 큰 주인들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치 숲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쥐었다.
대천의 땅에 들어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제는 챙겨온 식량도 거의 남지 않아 마수를 조리해 먹은 서리스는 입가를 닦았다.
꽤나 오랜 시간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일까, 몸 안에 짙은 피로감이 남아 있었다.
‘한 달 동안 치른 전투만 몇 번인지…….’
매일 같이 반복된 혈투에서 서리스는 만약 자신이 검은별을 흡수하지 못했더라면, 진작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왜 천상사성들도 여길 뚫지 못했는지 알겠어.’
끝없는 초롱은 커도 너무 컸다.
작은 주인부터 시작해서 큰 주인까지.
수많은 주인이 그 거대한 세계 침식 속을 살아가고 있으니, 혼자서 여길 뚫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니 최흉이 해결되지 않지.’
식량부터 시작해 체력 싸움 자체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아르마의 기운을 느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르마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아르마를 흡수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큰 주인을 상대로는 쓰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서리스는 이러한 아르마를 쓸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큰 주인을 상대로 싸우기 힘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나아갈 수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가면 갈수록 힘이 부쳐왔다.
안으로 갈수록 큰 주인들도 더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리스도 빠른 속도로 세계 침식을 흡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주인을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순간, 숲을 헤치고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오는 게 느껴졌다.
서리스의 검은별을 눈치채고 온 것이었다.
얼굴 위에 흰색의 꽃잎을 달고, 머리에는 긴 뿔이 있는 녀석은 여섯 개의 다리로 숲을 질주했다.
크기만 해도 얼추 수백 미터는 돼 보이는 녀석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큰 주인 중 하나인 절옥화(截玉華)였다.
문제는 지금 달려오는 놈이 하나가 아니란 거였다.
녀석의 몸 주위를 뛰어다니는 새까만 고양이 같은 게 하나 보였는데.
바로, 아홉 개의 용 꼬리를 가진 고양이 마수 구룡묘(九龍猫)였다.
서리스는 한숨을 내쉬곤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산을 베어 가를 정도로 거대한 검이었다.
지난 한 달간 끝없이 반복한 제왕월영도다.
머리 위로 생겨난 제왕월영도와 함께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그대로 내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떨어진 제왕월영도와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서리스는 검을 든 자세로 팔을 한차례 떨었다.
절옥화가 두 개의 뿔로 서리스의 제왕월영도를 받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직! 파지지직!
서리스의 제왕월영도와 절옥화의 힘겨루기 사이로 새까만 번갯불이 튀었다.
그것을 본 서리스의 팔이 한층 더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왕월영도에 가해진 힘이 더 강해졌다.
우득! 우드득!
힘의 압박 앞에 절옥화가 다리를 부들거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둘의 균형을 깨듯 치고 나온 구룡묘 때문이었다.
아홉 개의 용 꼬리를 지닌 구룡묘가 음속을 돌파하는 속도로 덤벼오자 서리스는 제왕월영도를 지웠다.
그러곤 구룡묘의 손톱을 받아치며 뒤로 물러섰다.
몸집은 고양이 수준이면서 힘이 어찌나 강한 건지 악스판시온이 잘게 떨렸다.
서리스는 그런 구룡묘를 바라보며 악스판시온을 뒤로 당겼다.
검날 위로 그림자가 다 덧씌워진 그 순간, 서리스는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의 검격이 구룡묘에게 날아들었다.
놈은 꼬리 하나를 이용해 그대로 그림자의 검격을 부서트렸다.
“냐앙!”
그 틈에 구룡묘에게 접근한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내려그었다.
그러자 구룡묘는 이를 노렸다는 듯이 용 꼬리로 악스판시온을 받아치려 하고.
다른 나머지 꼬리로 서리스를 뚫어 버리려 하였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 순간 서리스의 검 위로 무형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대기가 일렁거릴 정도로 차오른 기운과 함께 구룡묘의 용꼬리 하나가 잘려 나갔다.
그러자 놈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이내 음속이 넘는 속도로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용꼬리 하나가 잘리긴 했지만, 목숨은 지킨 구룡묘가 뒤로 물러난 채, 경계심 섞인 표정을 지었다.
“쯧, 눈치 빠르기는.”
신룡월단의 기운을 느끼고 몸을 뒤로 뺀 것이었다.
그걸 보고 서리스는 놈을 놓치지 않고자 그대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쿠웅!
그러나 이런 대치도 잠시 절옥화가 앞쪽 절벽을 들이박자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제왕월영도에 당했던 녀석이 그사이에 상처를 회복하고 끼어든 것이었다.
이랬다간 두 놈을 한 번에 상대하게 될듯싶었다.
서리스는 무너지고 있는 절벽의 잔해를 밟고 위로 올라갔다.
그때, 절옥화 얼굴에 있던 꽃잎이 열리더니 거기로 밝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내 그 빛들은 서리스를 향해 쏘아졌고,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용인화를 발동했다.
검게 물든 그의 어깨 위로 그림자 망토가 휘날렸다.
타앙!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팔식(八式)
흑월분신(黑月奮汛)
그림자 발판을 밝고 도약한 서리스가 포탄처럼 절옥화를 향해 쏘아졌다.
뒤늦게 구룡묘가 서리스를 쫓아 왔지만, 그를 막기에는 늦었다.
절옥화가 쏘아낸 빛줄기 자체를 가르며 날아든 서리스의 검이 앞으로 내질러졌다.
콰앙!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절옥화의 얼굴이 목 안쪽까지 우그러졌다.
“기으그그그그극.”
목 안으로 머리가 밀어 넣어진 절옥화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그 상황에서도 서리스는 방심하지 않고 침착하게 몸을 돌려 검을 하늘로 겨누었다.
왜냐하면, 구룡묘가 서리스를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냐아아아앙!”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는 구룡묘를 향해 서리스는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챙, 챙챙, 챙챙챙!
구룡묘의 손톱과 서리스의 검이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스는 틈을 노려 구룡묘의 배에 발을 꽂아 넣곤 악스판시온을 휘둘렀다.
쩌엉!
용의 꼬리로 몸을 아예 감싸버린 구룡묘가 절벽을 박살 내며 뒹굴었다.
뭐로 만들어진 건지 저 꼬리는 신룡월단의 기운이 아니고서야 베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서리스는 용인화 위에 신룡월단의 기운을 씌우기 시작했다.
‘어디 이거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
저쪽이 신룡월단의 기운을 경계한다면 아예 풀 전개로 박아 버리면 그만이다.
구룡묘가 부서진 절벽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서리스는 다시금 도약했다.
대기를 돌파하며 도약한 서리스는 신룡월단의 기운을 전신에 두른 채,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잠깐이지만 서리스를 사자의 형상을 한 기운이 감쌌다.
신룡월단(神龍狘斷)
삼식(三式)
용호분신(龍號奮汛)
콰아아아아아앙!
서리스에 의해 절벽이 완전히 박살 나며 무너졌다.
나무들이 쏟아져 내리며 여기저기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동안.
용의 꼬리가 박살 난 구룡묘가 서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신룡월단의 기운 앞에 구룡묘의 꼬리라고 할지라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냐아아아앙!”
꼬리가 잘려 나가 비명을 지른 구룡묘의 팔이 마지막 발악을 담아 서리스를 향해 휘둘러졌다.
하지만 그런 구룡묘를 향해 서리스는 자비 없이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거두었다.
잘려 나간 구룡묘의 목이 땅을 구르고, 서리스는 그것을 발로 멈춰 세운 뒤 한차례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세계 침식을 흡수하며 무너진 절벽에서 걸어 나왔다.
목이 부서져 죽은 절옥화의 세계 침식을 흡수하려던 서리스는 이내 손을 멈췄다.
“아차, 식량 확보.”
서리스는 절옥화의 살점을 베어 챙기곤 세계 침식을 흡수했다.
‘이 짓도 이제는 익숙해져 가는데.’
문제는 아직도 진절머리날 정도로 많은 수의 큰 주인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점을 한 덩이 집어 든 채, 서리스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몇 달.
대천의 땅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상당한 시간이 흐른 서리스는 한 장소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공간을 갈라낸 것처럼 양쪽의 기운이 완전히 다른 곳을 찾은 것이다.
그 경계선 앞에 선 서리스가 앞을 바라보았다.
천상사성인 펜타니엄 락로드조차 들어서지 않는다는 옥천의 땅.
그러한 땅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서리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쪽은 나도 무지의 영역이다.’
서리스는 그대로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이내 주변 경치가 서서히 뒤바뀌었다.
빽빽하게 세워진 나무들은 이제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밤을 그대로 흡수하기라도 한 듯 검은색 나무에는 별들이 여럿 박혀 있었다.
그 기이한 광경을 보고 있던 서리스의 눈이 앞으로 향했다.
마치 숲 전체가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감각 하나가 더 열린 것 같은 그 기분에 서리스는 주변을 스윽 보았다.
쿠구구구구구궁!
그 순간 숲 안쪽에서 무언가 거센 울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라라라라라락!
뒤이이 울려 퍼지는 그 울음소리는 서리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하, 하하.”
순간, 힘 빠진 웃음소리가 서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이 거대한 덩어리 같은 기운이 누구 것인지 서리스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솟은 나무들을 부수며 새까만 용 한 마리가 지나갔다.
그 용을 보고 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숲을 헤집는 그 거대한 용을 보고 서리스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과거 용신과 착각했을 정도로 강렬한 그 괴물을 서리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악룡(太惡龍).
자신을 죽였던 저 괴물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라라라라라라라락!
또 한 번 귀를 뚫고 녀석의 포효가 들렸다.
그리고 놈의 포효가 향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그래.”
서리스의 두 눈빛이 흉흉하게 물들었다.
자신을 죽였던 재앙과 마주한 서리스는 깨달았다.
이 순간이 바로 자신의 옛 죽음을 완전히 떨쳐낼 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