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아라만과 함께 이동한 곳은 중심지에 위치한 숲이었다.
임시로 지어진 막사 앞.
“다녀올게.”
“잘하고 온나.”
서리스는 아크단원에게 인사를 해두고, 아라만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아는 얼굴들이 여럿 있었다.
“윈터 님, 살롱 님.”
바로 독후 불터렉스 윈터와 암왕 윌즈베르크 살롱이었다.
두 사람은 서리스를 보자마자 웃음을 지으려다 서로를 힐끗 보았다.
미래의 사윗감을 두고 경쟁하게 될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짧게 교차했다.
“서리스, 잘 와주었네. 아이랑과는 무척이나 잘 지내는 모양이군.”
“최근 소식 잘 듣고 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발렌타인이랑은 요즘 어떻나?”
살롱과 윈터가 앞다투어 서리스를 반겼다.
둘의 노골적인 친분 과시에 서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 분과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서리스가 둘을 진정시키며 묻자 살롱은 뒤에 있는 화면을 가리켜 보였다.
“직접 보겠나?”
“예.”
서리스는 그렇게 답하며 그가 박쥐로 펼쳐 놓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마황을 제외한 세 명의 천상사성이 각자 다른 마굴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또 다른 마굴 앞에는 천하오장성들과 함께 월하십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세계 침식자들은 이미 마굴로 들어간 겁니까?”
“그렇지. 잡을 수 있는 놈들은 다 잡았지만, 몇몇이 마굴로 들어가 버렸으니. 차라리 밖으로 쏟아져 나올 마수 처리가 우선이 되었네.”
그걸 위한 배치인가.
“너는 나랑 서쪽 제일 끝에 있는 흑승(黑繩) 마굴로 가게 될 거야!”
아라만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과 함께라면 별문제 없을 것이었다.
“그럼 아크단도 흑승 마굴 쪽에 배치하면 되겠군요.”
“그래, 서리 마탑도 같이 배치될 테니 인원 문제는 없을 거야.”
서리스는 안심하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내부의 세계 침식자겠군요.”
만약 세계 침식자들이 저대로 또 도주하게 된다면 그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그런 서리스의 말을 듣고 살롱이 스산하게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도망치지 못하게 준비해둔 게 있으니 말이다. 전쟁이 더 길어지게 둘 생각 없다.”
뭔가 준비해두신 게 있는 건가.
살롱이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만큼 서리스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럼 바로 흑승 마굴로 이동하겠습니다.”
“발렌타인에게는 안부 전해주렴.”
“아이랑에게 안부 인사 전해줬으면 좋겠군.”
마지막까지 경쟁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서리스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아라만과 함께 밖으로 나온 서리스는 아크단 앞에 섰다.
“지금부터 흑승 마굴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렇게 말한 서리스는 엑스널을 돌아보았다.
“엑스널 선배, 아크단 인솔은 선배에게 부탁드릴게요. 저와 마왕님은 세계 침식자를 맡아야 해요.”
“알았어. 서리스 후배, 나한테 맡겨 둬,”
엑스널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라만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듯 문을 열고 있었다.
열린 문을 보고 서리스는 잠시 아크단을 돌아본 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이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거대한 산 하나였다.
새까맣게 뭔가로 뒤덮여 있는 산은 한눈에 보기에도 세계 침식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흑승 마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꺼내 들었다.
왜냐하면, 산에서 꿈틀거리는 검은별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거 곧 나올 거 같은데요.”
“그러게 아주 난리네.”
목에 검은별을 이식한 아라만이었기에 그도 썩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파직하는 검은색 스파크와 함께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톱과 같은 양팔을 지닌 괴물은 목에 쇠사슬을 찬 채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수가 산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리스와 아라만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둘은 저 멀리, 유일하게 쇠사슬을 목에 매고 있지 않은 괴물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흑승의 주인들.
놈들의 정체를 서리스와 아라만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뛰쳐나온 마수들을 다 합쳐도 저 위에 있는 놈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의 뒤에는 아크단과 함께 서리 마탑의 일원들이 서 있었다.
“엑스널 선배! 부탁합니다.”
“서리 마탑, 평소대로 잘해봐.”
서리스와 아라만은 일행들에게 한마디씩 하며 바닥을 박찼다.
그 순간 둘 앞에 문이 생겨났다.
두 사람은 그 문을 통해 순식간에 흑승의 주인들을 덮쳤다.
서리스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이빨이 엉망진창으로 난 괴물이었다.
놈은 밑에 있던 녀석들과 같이 톱 같은 팔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팔이 네 개라는 거였다.
흑승 마굴의 주인, 사자(使者) 중 하나.
거성사인(鋸星社人)이라는 녀석이었다.
네 개의 팔이 서리스를 보자마자 동시에 움직였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네 개의 톱날을 보며 서리스의 악스판시온이 움직였다.
챙챙챙챙!
서리스의 유기적인 검로가 네 개의 톱날을 한 번에 모조리 받아쳤다.
거성사인의 네 개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노란색 안광을 터트린 거성사인은 서리스의 검이 닿기 전에 네 개의 톱을 조이듯 다시금 휘둘렀다.
강렬하게 회전하는 톱날이 그에게 닿기 직전.
서리스의 팔 위에는 이미 새까만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서리스가 용인화를 발동한 것이었다.
카가가가가가강!
새까만 비늘에 부딪힌 톱날에서는 날카로운 쇳소리만 울려 퍼졌다.
예전과 달리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용인화를 발동한 서리스의 눈동자가 빛났다.
“내 용인화도 못 뚫는 녀석이 뭐 어떻게 해보려고?”
서리스는 상대를 비웃으며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금강잔월(金强虥狘)
박살(撲殺)
서리스의 검이 으직하고 거성상인의 머리부터 아래까지 박살 내버렸다.
상대를 일격에 박살 내놓은 서리스는 놈을 두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 중 한 마리를 일격에 날려 버렸던 만큼 다른 주인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서리스에게서 새까만 별이 느껴지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 당황한 표정을 마주한 서리스는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뭘 봐.”
서리스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저 멀리서 마왕의 공격에 당한 주인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이와 동시에 서리스 또한 교차하듯 주인들과 맞부딪쳐 가기 시작했다.
천하오장성과 월하십인에 속하는 두 명의 맹공은 마굴의 주인들이라 할지언정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주인들을 박살 내가는 순간에도 서리스는 재빠르게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가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침공파 세계 침식자들이었다.
이 산 어딘가에 그들이 있다.
그 순간, 산 너머 어딘가에서 세계 침식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라만 님!”
“갔다 와!”
어느새 거대한 늑대 같은 모습이 된 아라만이 주인 하나를 깔아뭉개며 대답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서리스는 바닥을 박차며 산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마수들과 마주쳤지만, 서리스는 그들을 모조리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서리스의 눈에 도망치듯 이곳을 떠나려 하는 세계 침식자들이 보였다.
“윽, 왔다!”
쫓아온 그를 보고 세계 침식자 중 한 명이 황금색 검을 뽑았다.
황금색 갑주를 입은 그는 그대로 서리스를 향해 검을 휘둘러왔다.
채엥!
맞부딪친 검에서 쇳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황금 기사 쪽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와 맞부딪친 서리스의 힘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뭔 힘이?!”
황금 기사는 경악하듯 기합을 내지르며 바로 다음 검로를 이으려고 했다.
그러나 서리스의 검에는 이미 무형의 기운이 치솟아 있었다.
챙!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황금의 검은 서리스의 기운과 맞닿은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서리스는 검을 박살 냄과 함께 그대로 주먹을 들어 상대의 얼굴에 박아 넣었다.
“카학!”
얼굴이 우그러진 황금 기사가 다급히 양손을 든 순간, 산산조각이 난 황금 칼날이 서리스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런 조잡한 수로는 서리스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전쟁을 반복하며 서리스의 검은별은 계속 강해졌고.
그 결과, 비늘의 강도가 예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괴, 물이.”
서리스는 황금 기사에게 그대로 검을 박아 넣었다.
갈라진 가슴팍과 함께 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를 짓밟은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빙글 돌린 채 검은별을 흡수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서리스는 남은 세계 침식자들을 바라보았다.
“죽여!”
더 이상 세계 침식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된 서리스는 그 즉시 바닥을 박찼다.
먹물 같은 어둠이 이어졌다.
세계 침식자들과 서리스가 상대를 죽이고자 맞부딪쳤다.
검은 쇠창살과 붉은 번개가 날아들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공격도 서리스에게 유효타를 입히지 못했다.
서걱, 서걱!
잘려 나간 머리 두 개가 하늘 위를 날았다.
이곳까지 도망친 세계 침식자들은 침공파 중에서도 가장 약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대전쟁을 헤쳐 나온 서리스의 검을 받아 낼 수 있는 자는 이 중에 없었다.
서리스는 그런 그들을 보고 한차례 숨을 내쉰 뒤 손을 들어 그들의 세계 침식을 흡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굴을 가득 메워 폭주하고 있는 세계 침식의 힘이 서리스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폭주한 세계 침식의 힘이 갈 곳을 잃어 돌아갈 곳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회다.
과거, 마굴의 힘을 흡수한 경력이 있는 서리스다.
‘이거.’
이대로 둬봤자 아무 의미 없을 거로 생각한 서리스는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회다.’
그리고 그 순간 서리스를 중심으로 세계 침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잔뜩 몰려든 세계 침식이 서리스를 충만하게 채워가자, 어느새 그림자도 검은별의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서리스의 검은별이 가득 메워졌다.
흑승 마굴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 서리스의 몸이 한차례 떨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검은별을 받아들이기 위해 펜타니엄의 별이 후광처럼 떠올랐다.
동시에 용제의 별 또한 그런 그림자를 뒤덮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서리스의 별이 또 한 번 변화해나가기 시작했다.
떠오른 태양과 같이 빛나는 별 아래로 새까만 어둠이 뒤섞인 그 순간.
서리스의 두 눈이 떠졌다.
흑승 마굴의 세계 침식의 힘이 한 줌의 소실도 없이 서리스의 그림자 속에 흡수됐다.
그것을 여실히 느낀 서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신했다.
남아 있는 다른 마굴을 다 흡수하는 순간 자신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음을 말이다.
서리스의 별이 옅게 빛났다.
9성.
천하오장성의 영역이 코앞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