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무장공주를 쓰러트린 서리스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세계 침식자들이 합심하여 렐리즈를 공격하고 있었다.
협공을 당하고 있음에도 렐리즈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천하오장성 중에서도 최강이라 손꼽히는 검왕의 저력이었다.
‘도와줄 필요는 없나.’
서리스는 렐리즈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무장공주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손을 올리자 그녀가 품고 있던 세계 침식이 밀려 들어왔다.
‘마굴 정도는 아니어도.’
검은별 내부가 가득 채워졌다.
마굴에 이어 무장공주까지.
검은별이 이제는 거의 포화상태임이 느껴졌다.
검은별을 몸에 온전히 담으려면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전에.’
서리스는 여전히 성벽을 오르려 하는 검은 인간과 조력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들도 정리해야만 했다.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세계 침식자들이 죽거나 도망치며 펜타니엄 쪽 전쟁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갔다.
얼추 주변을 다 정리한 서리스가 고개를 들자 근처에 있던 도로시와 서발광이 보였다.
둘 다 검은 인간과 조력자를 상대로 선전하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수백 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것을 본 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무척이나 익숙한 화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카펠.”
그의 이름을 부른 서리스는 검은 인간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순간 검은 인간들이 갑자기 후두둑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에 서리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는 령주의 목을 틀어쥔 렐리즈가 보였다.
‘끝났군.’
도망치는 조력자들을 청랑단이 쫓기 시작하는 사이 서리스는 성벽 위로 올라왔다.
거기에는 거대한 활을 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활 솜씨가 많이 녹슨 거 같은데?”
“하하, 서리스, 오랜만이야.”
서리스가 농담을 던지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칸빌레 아카펠.
서리스와 청랑단 동기로 함께했던 그가 그곳에 있었다.
그래도 꽤 시간이 흘러서일까.
아카펠은 예전과 달리 짧게 자른 머리와 함께 나름 늠름하게 변해 있었다.
“이렇게 일 터졌을 때만 얼굴을 비추면 서운해.”
아카펠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서리스도 끄덕였다.
“일이 원체 바빠야지.”
“늦었지만, 월하십인에 오른 거 축하한다.”
진심으로 자신을 축하해 주는 아카펠을 보고 서리스도 따라 웃었다.
오래전, 자신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워너힐 아카데미를 포기했던 그다.
그러나 서리스가 보기에 아카펠은 자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또 성장한 것 같았다.
“다른 두 녀석은 밑에서 싸우고 있는 모양이던데.”
서발광과 도로시를 언급하며 아카펠이 그리운 웃음을 그리는 순간, 때마침 그 둘이 성벽을 올라왔다.
“어, 활쟁이!”
“아카펠!”
두 사람 다 아카펠을 발견하곤 이쪽으로 뛰어왔다.
“잘 지냈어?”
“활쟁이, 얼굴 활짝 폈네.”
“너희 둘도 잘 지냈어? 난 잘 지냈다.”
오랜만에 모인 사인방이었다.
세계 침식자들과의 전투가 이제 막 끝나서, 다들 분명 지쳤을 테지만.
네 사람의 얼굴은 그야말로 생기발랄했다.
청랑단 시절에 고생했던 것이 그들에게는 깊은 우정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리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세계 침식자들을 전부 정리한 렐리즈가 있었다.
“릴리아 님의 호출이다. 따라와라.”
그렇게 말한 그는 성벽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갔다 올게.”
서리스도 일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세 사람에게 일러둔 뒤,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서리스의 곁으로 하체펠 드웨이진과 칸빌레 이지스가 나타났다.
이제는 칸빌레의 가주가 된 그녀는 서리스를 보곤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이야, 얼마 전까지는 그냥 꼬맹이였는데 순식간에 성장해 버렸네요.”
“그때도 마냥 어리지만은 않았습니다만?”
“흠…… 그건 그렇네요.”
서리스의 농담을 받아치며 이지스가 걸음을 옮기자 드웨이진이 그의 옆에 섰다.
“서리스.”
“예, 외할아버님.”
“잘 성장한 모양이구나.”
드웨이진은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자신을 정말로 손자로서 여기고 있는 드웨이진의 마음을 느낀 서리스는 한차례 웃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향한 곳은 펜타니엄의 내성 안쪽이었다.
“왔군요.”
그리고 그들을 마중 나온 이는 펜타니엄의 안주인 펜타니엄 릴리스였다.
여전히 빼어난 미모의 그녀는 네 사람을 보곤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와 함께 도착한 회의실에는 마법 물품인지 화면이 여러 개 틀어져 있었다.
그 화면이 비추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최흉 끝없는 초롱 내부였다.
정확히는 끝없는 초롱 내에서 마수를 쓸어 버리고 있는 락로드를 비추고 있었다.
검은색의 그림자 검 한 자루를 쥐고, 마수들을 쓸어 버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서리스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펜타니엄의 별 그 자체인가.’
오직 검 한 자루로 저러고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락로드가 지금 마수 사이를 헤집어 나가며 쫓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세계 침식자였다.
“세계 침식자들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최흉을 폭주시키고 있어요.”
릴리스의 설명이 이어지자 모두의 눈이 찌푸려졌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최흉이라면 질릴 만큼 상대해 본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최흉의 폭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계 침식자 놈들은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건가?”
설마하니 세계 침식자들이 직접 최흉을 폭주시키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리스의 두 눈이 팍 일그러졌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
반대파 세계 침식자 쪽도 흡수한 그들이 가문들과 전면전을 벌였었으니 말이다.
‘내가 모르는 변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는 몰라도, 세계 침식자가 최흉을 폭주시킨다는 건 큰일이었다.
“어머니, 혹시 다른 최흉 쪽도 이런 상황입니까?”
서리스가 묻자 릴리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른 가문이 담당하는 최흉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자칫했다간 정말로 세계 침식자들에게 함락당하는 가문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가주만 나선다면 최흉의 폭주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침식자들 쪽도 부가주께서 있으시니, 문제없죠.”
릴리즈도 그 사실을 아는지 그렇게 전해왔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펜타니엄은 부가주를 제외하고, 다른 가문에 지원 인력을 파견하겠습니다.”
세계를 지키는 오대가로서의 의무를 지킬 시간이 온 것이다.
“마왕 쪽에는 따로 협조를 부탁해놨습니다.”
아라만도 이 사실을 알고, 따로 이야기해 둔 모양이었다.
“서리스, 네가 월하십인이 된 것이 어머니는 진심으로 자랑스러워요.”
그러는 순간 릴리즈가 서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가 여기로 자신을 호출한 시점에서 서리스는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 예상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월하십인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행동할 시기입니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 또한 등을 당당히 폈다.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
그리고 월하십인이라는 자리는 허투루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자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서리스 또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리스의 대답을 듣고 릴리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다들 부탁드립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로 우리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세계 침식자들과의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고, 서리스는 어머니의 말을 곱씹으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펜타니엄 쪽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러니 전쟁을 막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서리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렐리즈가 있었다.
“예, 부가주님.”
“칼릭스를 살려둘 속셈이냐.”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 서리스의 두 눈이 살짝 뜨였다.
설마하니 그가 칼릭스를 직접 언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칼릭스의 처형을 명한 건 부가주인 렐리즈였다.
그가 자신에게 칼릭스의 처우를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서리스가 보이자, 렐리즈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펜타니엄의 높은 성벽이 있었다.
“나는 펜타니엄의 부가주라는 자리를 맡고 있기에 사사로운 정 하나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다.”
마치 감정을 다 내다 버린 듯 렐리즈가 그렇게 말하자 서리스는 침묵했다.
오랜 시간 오직 가주가 되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렐리즈는 지금도 검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휘두르는 검은 펜타니엄의 가주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펜타니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칼릭스는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세계 침식자와 내통하고, 펜타니엄에는 분명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자기 아들인 칼릭스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다 알고 있었기에.
렐리즈는 그를 처형대에 올려야만 했다.
“칼릭스가 가주가 된 순간 펜타니엄은 오대가라는 자리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렐리즈는 서리스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도 제 손으로 칼릭스의 일을 밝히고 처형했었다.
그가 저지른 짓들이 펜타니엄을 뒤흔들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칼릭스가 직계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할 거라고 그가 말했던 건 이런 것 때문이었겠지.
“너는 그런 칼릭스를 살리고자 하느냐?”
칼릭스의 불꽃은 렐리즈에 의해 한 번 꺼졌었다.
그러나 불꽃이란 건 심지가 남아 있다면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지금은 꺼진 그 불꽃이 다시 살아났을 때, 칼릭스가 또다시 펜타니엄에 해악이 되지 않게 할 수 있겠냐고 렐리즈가 물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리스가 곧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부가주, 아니, 렐리즈 님.”
서리스는 그를 구태여 이름으로 부르며 렐리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그저 올려다보기만 해야 했던 그였지만, 서리스는 지금 그를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저는 딱히 칼릭스를 살릴 마음도,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동정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가 한 짓은 분명 펜타니엄을 망치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그러했고.
원래대로 세계가 흘러갔더라면 이번에도 그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펜타니엄에 해악을 끼쳤냐고 물으면, 지금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계획한 일들은 전부 서리스에 의해 막혀 버렸다.
지금까지 칼릭스가 한 일이라곤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냈다는 것 하나뿐.
그것 말고는 서리스가 죄다 부숴 먹은 것이다.
“미래에 해악이 된다 해서, 다 죽여야만 한다면…….”
서리스의 두 눈이 청명하게 빛났다.
“저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을 겁니다.”
서리스가 살아오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
그리고 자신에 의해 변하여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이들.
그런 그들을 서리스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칼릭스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그와의 악연은 여전하고, 그를 살려두는 이유는 혹시나 네파림을 끌어낼 미끼로 쓸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웃었다.
“애초에 제가 있는 한 펜타니엄은 칼릭스에게 흔들리지도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을 렐리즈는 조용히 경청했다.
이걸 자신감이라 평가한다면 오만하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스스로를 믿는 그 모습을 보고 렐리즈의 눈이 잠시 옅게 뜨였다.
과거, 렐리즈에게도 서리스는 그저 몰락했던 삼남이었다.
락로드의 아들 중 한 명이지만 다른 직계의 재능에 짓눌려 일어서지 못하게 된 반푼이.
가주 후보를 건의하는 지위를 지닌 부가주로써 서리스는 진작부터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청랑단에 1등으로 들어간 것부터.
그는 샬롯을 꺾고, 청랑호법에 오른 뒤 워너힐 아카데미에 들어가 세계 침식자와 맞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는 무려 자신의 바로 아래인 월하십인이라는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거짓말하지 말라며 했을 믿지 못할 이야기를 그는 지금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렐리즈는 서리스의 모습에서 가주의 품격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이미 가주 후보로 올라와 있던 락스카와는 또 다른 가주의 품격이 말이다.
“……서리스.”
그렇기에 렐리즈는 부가주로서 해야 할 질문을 그에게 던지기로 하였다.
“너는 펜타니엄 가주가 되고 싶으냐?”
그의 질문을 듣고 서리스의 두 눈이 한차례 깜빡이었다.
그러곤 곧 한차례 짧은 웃음소리를 냄과 함께 등을 꼿꼿하게 폈다.
“펜타니엄만으로는 저를 담아 두지도 못할 겁니다.”
이어진 말을 들은 렐리즈는 처음으로 입가에 천천히 웃음을 띄웠다.
오대가 펜타니엄조차도 비좁다는 듯한 그 말.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이 언젠가 현실이 되었을 때는 어찌 될까.
렐리즈는 잠깐이지만 펜타니엄의 미래를 엿본 기분이었다.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가주 후보로서 가장 훌륭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