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전쟁이 한창 중인 펜타니엄 외곽 성벽.
성벽 위를 내달리며 올라오는 검은 인간들을 쳐낸 철벽 하체펠 드웨이진이 혀를 찼다.
어느 세계 침식자의 힘인지는 몰라도.
검은 인간이 끝없이 몰려오는 통에 온종일 싸워도 끝이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썩을, 락로드 님께서 있으셨으면.”
가주인 검황 펜타니엄 락로드는 최흉 끝없는 초롱의 폭주를 막고자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만, 그의 부재가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 펜타니엄! 내가 왔다!”
그러는 순간 조력자 한 놈이 기어코 성벽을 올라왔다.
청랑단을 밀어내며 날뛰는 그를 보고 눈을 부릅뜬 드웨이진은 손에 별을 끌어모았고.
하체펠의 강기수식이 깃든 그의 주먹이 전력으로 조력자에게 꽂혔다.
쩌엉!
커다란 소음과 함께 성벽 저 너머로 날아가 버리는 그를 보고 드웨이진은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감히 세계 침식 조력자 따위가 펜타니엄의 성벽에 올라왔다는 것이 그를 분노케 했다.
“드웨이진 님.”
그러는 순간 누군가 그를 부른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는 최근 유달리 머리카락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하다크가 있었다.
“하다크, 자네인가.”
청랑단주 하다크를 본 드웨이진은 옆에 있던 검은 인간 한 명을 또다시 걷어찼다.
“이대로라면 성벽이 점령 당할 겁니다. 적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하다크의 이야기를 듣고 드웨이진은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그 말대로 청랑단과 청림단 정도로는 검은 인간의 수가 감당이 안 되었다.
“차라리 본진을 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드웨이진은 성벽 너머 멀리 시야를 넓혔다.
거기에는 하다크가 본진이라 칭한 세계 침식자들이 있었다.
검은 인간 사이를 마치 산책 나온 양 유유히 걷는 그들의 모습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능하겠나?”
월하십인에다가 8성에 이른 그이긴 하지만.
세계 침식자들을 상대로 홀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가 묻자 하다크 또한 침음 하듯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성벽이 밀리면 일반인들이 휘말립니다.”
이어진 말을 듣고 드웨이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저도 청랑호법과 함께 하겠습니다.”
하다크도 검을 뽑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하늘 위에서 검은 섬광이 지상으로 이어졌다.
마치 유성이 떨어진 듯한 섬광과 함께 방금까지 세계 침식자가 있던 장소가 폭발하듯 터졌다.
그것을 보자마자 드웨이진은 누가 등장했는지 알아차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부가주께서 돌아오셨나.”
저게 워너힐 아카데미에 지원하러 갔던 렐리즈의 그림자임을 그가 알아본 것이었다.
“하다크,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는 모양이군.”
죽음조차 결심했던 하체펠은 그리 말하던 와중 하다크가 대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의아해진 하체펠이 그를 돌아보자 하다크는 멍한 눈으로 조금 전 렐리즈가 떨어진 장소를 보고 있었다.
“이봐, 하다크 자네, 왜 그러나?”
“드웨이진 님, 못 보셨습니까?”
못 봤냐니, 무엇을?
드웨이진이 눈을 끔뻑거린 순간 하다크가 실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렐리즈 님 뒤편에 한 명이 더 있지 않았습니까.”
“한 명이 더 있었다고?”
세계 침식자 쪽을 집중하느라 그림자 유성을 뒤늦게 봤던 드웨이진이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순간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기 속에서 드러난 한 인영을 드웨이진도 보았다.
“하, 하하!”
그 순간 드웨이진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렐리즈의 옆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는 자신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리스!”
최연소 월하십인에 올라 검룡이라는 별호를 지닌 자기 손자가.
천하오장성이자 검왕이라 불리는 펜타니엄 렐리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 * *
검은 인간 사이에 추락한 서리스는 자기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인간의 머리를 짓밟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로 렐리즈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계 침식자들이 들어왔다.
마치 별 하나하나를 떼어 놓은 듯.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 쏟아져 나와 그들이 얼마나 강자인지 금방 체감할 수 있었다.
“허어, 어느 미친놈들이 이렇게 적진에 대놓고 뛰어드나 했더니만, 천하오장성에 월하십인이로군.”
수염을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기른 노인이 너털웃음과 함께 말해왔다.
흰색 눈썹에 눈이 가려 보이지 않는 그는 신노야라는 세계 침식자였다.
“검왕은 없을 거라며? 워너힐 아카데미 쪽 녀석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모자에 검은색 스카프를 매고 손에는 본 적 없는 무기를 든 스나이퍼라 불리는 세계 침식자가 입에 문 궐련을 튕겼다.
“히힝, 흑설야가 그쪽에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이 나긴 했나봐영.”
유달리 작은 키에 흰색 소복을 입은 여자아이인 령주도 따라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전원 그 행색이 가지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엄청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어라, 나 썅, 너 알아!”
그러는 순간 등 뒤에 무기를 잔뜩 짊어진 여성이 서리스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눈에는 안대를 끼고 한쪽 팔은 마치 실로 봉합된 것처럼 흉터 자국이 가득한 그녀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검제, 그 미친놈 검술을 쓰던 녀석이잖아! 잘 만났네!”
그녀는 다름 아닌 무장공주였다.
서리스와 한 번 싸워 본 적 있던 그녀는 서리스의 악스판시온을 보더니 한쪽 눈을 크게 떴다.
“그거, 그거 뭐야! 예쁜이가 더 예뻐졌잖아!”
“조잘조잘 시끄럽군.”
무장공주가 소란을 피우자 렐리즈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그림자 검을 들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쏟아져 나온 패도적인 기세가 이 장소를 전부 휘감았다.
“어서, 감히 펜타니엄을 공격한 대가나 치르도록 해라.”
그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세계 침식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푸핫하고 령주가 소복만큼 하얀 손으로 눈을 슥 훑었다.
“다 빨리 죽이죠.”
그녀가 소름 끼치게 웃는 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검왕과 세계 침식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오직 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괴물들의 전쟁에 애꿎은 검은 인간과 조력자들이 쓸려나갔지만.
그들은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예쁜아아!”
그건 다름 아닌 무장공주였다.
그녀는 악스판시온을 봤을 때부터 눈이 돌아가 있었다.
원래도 악스판시온을 가지고 싶어 그 형체가 눈에 아른거렸던 그녀였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무장공주는 악스판시온을 떠올릴 때마다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었다.
이번 전쟁에서 구태여 펜타니엄 쪽으로 왔던 것도 혹시나 꿈에 나온 악스판시온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가지고 싶던 악스판시온이 다시 보니 훨씬 더 예뻐져 돌아왔다.
그것을 본 순간 무장공주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가졌다.
“무장공주, 제가 도울 테니…….”
“꺼져어!”
령주가 그녀를 돕고자 검은 인간을 보낸 순간 무장공주가 뽑은 대검에서 몰아친 폭풍이 검은 인간을 전부 날려 버렸다.
령주가 그런 그녀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자, 무장공주는 침을 뚝뚝 흘린 채 대검 대신 쌍 도끼를 들어 올렸다.
“내 거야. 저건 내 거라고. 알겠어? 대가리에 도끼가 찍히기 싫으면 절대로 탐내지 마.”
눈이 돌아간 그녀를 령주는 질린 눈으로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전 검왕 상대나 도울게요.”
“그래, 꺼져. 얼른 꺼져!”
“하여튼 미친년.”
령주가 가버리자 무장공주는 느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빨리 그 예쁜이에게서 손 떼. 때 타잖아.”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리스는 곧 천천히 헛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을 보고 무장공주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빙글 돌려 쥐었다.
“뭐라 지껄이는지 좀 들어보려 했는데, 갈수록 가관이네.”
그 순간 악스판시온에서 한차례 우웅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스판시온은 너 징그러워서 싫단다.”
“그 예쁜이 말도 할 줄 알아?”
“말이 안 통하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서리스의 목을 타고 검은별이 흘러내렸다.
검은별은 한순간에 서리스의 전신을 뒤덮음과 함께 그의 몸을 변형시켰다.
뿔이 돋아나고, 꼬리가 생겨나며 용인화를 마친 서리스는 그 기세만으로 주위 검은 인간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것을 본 무장공주의 오른쪽 눈이 꿈틀거렸다.
악스판시온에 눈이 멀어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검은별의 힘이 쏟아져 나오고 있단 걸 이제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너 저번에도 좀 이상하다 싶더니. 뭐야? 열쇠야?”
“세계 침식자들의 반응은 늘 똑같네.”
“아하, 너 우리를 사냥하려고 이번 전쟁에 참여했구나.”
다 눈치챘다는 양 히죽 웃은 무장공주의 두 눈이 살벌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씨발, 기분 잡쳤네. 넌 예쁜이 아니더라도 내 손에 죽었어.”
세계 침식자들 거의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용신의 열쇠에게 분노하고 있음을 눈치챈 서리스는 따라 미소 지었다.
“해보던가.”
그 순간 무장공주의 쌍 도끼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마치 화염 마차처럼 그녀가 득달같이 달려들자 서리스의 검도 동시에 움직였다.
채엥! 챙!
화염과 그림자가 맞붙은 순간, 사라진 건 다름 아닌 화염이었다.
악스판시온의 먹성은 그녀의 쌍 도끼에서 시작된 불길도 삼켜 버린 것이었다.
서리스는 그 즉시 쌍 도끼를 쳐냄과 함께 무장공주의 품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끼를 놓음과 함께 가슴팍에서 단검을 뽑아 악스판시온을 받아쳤다.
그 순간 푸른색의 단검에서 손아귀 같은 것이 뽑혀 나와 악스판시온을 감싸려 했다.
“내 거라고!”
“뻔한 수작질은.”
하지만 서리스는 그 즉시 악스판시온에 별을 부어 넣음과 함께.
그림자를 폭발시켜 단검의 능력을 박살 내 버렸다.
그렇게 끝없는 공방이 시작되었다.
무장공주가 미친 듯이 새로운 무기를 사용하며 서리스를 몰아붙이고.
서리스 또한 무장공주를 상대로 검술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역시 무장공주는 까다롭다.’
그리고 서리스는 그런 무장공주와 맞서며 확실히 느꼈다.
몸에 지닌 수십 개의 무기에 부여된 특수 능력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운 것들밖에 없었다.
게다가 보통 한가지 무기만을 다루는 이들과 다르게 무장공주는 모든 무기 사용에 능통했다.
지금도 그녀의 발에서 돋아난 검날이 하늘을 가르고.
손가락에서 풀려나온 사슬이 서리스의 목을 조를 뻔했다.
하지만 그런 서리스와 맞서는 무장공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봤을 때는 자신의 공격을 막기에도 급급했던 놈이 이제는 모든 무기를 받아침은 물론, 틈을 노려 공격도 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열쇠라고 하니 또 납득이 되었다.
열쇠란 것들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하나같이 기이하게 빠른 성장 폭을 보였으니까.
그리고 무장공주는 그런 열쇠를 가장 증오하는 세계 침식자들 중 하나였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무기가 아직 세계 전역에 산더미같이 남아 있는데.
열쇠들 때문에 그런 무기를 채 다 갖기도 전에 세계가 멸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터무니 없는 이유로 열쇠를 원망하는 그녀는 더 이상 일반 무기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럼.’
바닥에 창을 내려찍어 번개를 터트린 그녀가 시간을 벌고 뒤로 빠졌다.
그러면서 그녀는 대뜸 자신의 뱃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해괴한 짓을 벌인 그녀는 자신의 뱃속을 더듬다가 이내 짧은 검자루 하나를 뽑아 들었다.
날은 없고 오직 새하얀 자루만이 있는 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무장공주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다섯 무장 중 하나.
천옥성주(天玉城主)
검자루를 늘어트린 무장공주가 눈을 희번덕거리게 떴다.
“예쁜이 빨리 되찾아야지.”
번개가 사라진 자리에 서리스의 모습이 보인 그 순간 무장공주가 폭발적으로 뛰어올랐다.
마치 번개와 같이 쏘아진 그녀의 검자루가 서리스를 향해 휘둘러졌다.
검날이 없는 검자루를 보고 서리스의 두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천옥성주를 마주한 녀석들은 대부분 저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곤 한다.
그런 부분이 있기에 천옥성주를 더더욱 좋아하는 무장공주는 그 즉시 손을 내려그었다.
“멍청아! 뒤져!”
천옥성주는 물리적인 검날이 없다.
대신 보이지 않는 검날이 존재하는데, 이는 오직 검은별 만을 베어 버린다.
그 특이한 특성 탓에 무장공주는 세계 침식자 중 가장 열쇠를 많이 사냥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열쇠는 무기를 찾을 시간을 빼앗는 가장 나쁜 놈들이었으니까.
“뒤지긴 뭘 뒤져.”
“어?”
그런 순간 무장공주는 분명 천옥성주를 내려그었음에도.
멀쩡히 검은별을 유지 중인 서리스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동시에 서리스의 손에 들린 악스판시온에 처음 보는 무형의 기운이 휘감겨 있음을 그녀가 깨달았을 때.
서리스의 얼굴 위로 비웃음이 서렸다.
“천옥성주, 내가 그걸 모를 거 같았냐?”
그 말을 들은 그 순간, 그녀의 한쪽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서리스의 검이 무장공주를 향해 전력으로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옥성주에는 검날이 없다.
그렇기에 저 검을 받아칠 방법이 없던 무장공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퍼걱!
이윽고 그녀의 가슴팍이 서리스의 검에 꿰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