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243화 (243/275)

243화

지원군이 몰려오며 사방에서 전투가 시작된 무렵.

흑설야는 무황 강혼을 눈앞에 둔 채 뚫린 가슴팍에서 핏물을 쏟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 꿇은 그의 머릿속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고 계속 노력 중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일은 이렇게 구멍투성이인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혼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쉽게 뚫릴 결계가 아니었을 텐데?’

워너힐 아카데미를 습격한 세계 침식자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성위의 결계위에 다른 결계를 덧씌우는 것이었다.

이건 오래전부터 준비된 결계였던 만큼.

천상사성이라도 뚫는데, 일주일 이상을 소비할 거라 자신하던 결계였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그들이 워너힐 아카데미를 장악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웬걸.

침입한 지 하루도 안되서 결계가 뚫렸음은 물론.

그나마 잡아놨던 인질들도 지키고 있던 조력자들이 누군가에게 죄다 살해당하며 풀려나고 말았다.

‘은신사.’

그리고 흑설야는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까지 알아차렸다.

세상의 모든 눈을 피하는 은신의 달인이자 같은 세계 침식자인 그가 한 짓이었다.

침공 반대파의 움직임이 최근 묘하다 싶더니.

이것들이 기어코 이쪽 세상 사람들과 손을 잡아 버린 것이었다.

배신감보다는 어이없는 기분이 먼저였다.

자기 세계도 아닌 곳을 구태여 지키겠다고 나서는 꼴도 웃기고.

동시에 이쪽 세계 사람들이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았다는 것도 황당했다.

세계 침식자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을 텐데 말이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모든 게 딱 들어맞게 설계되었다고 생각했던 톱니바퀴에 생긴 작은 균열이 결국, 건물 전체를 무너트린 것이다.

“큭.”

흑설야가 다시금 입에 차오른 핏물을 뱉었다.

그 순간, 새까만 눈을 짓밟고 다가온 강혼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천하오장성을 죽여 천상사성과 대등하다고 평가받던 흑설야였지만.

강혼을 상대로는 별 수가 없었다.

물론 흑설야의 실력만큼은 거짓이 아닌 듯, 강혼도 퉷하고 부러진 이 하나를 뱉었다.

“쓰읍, 당분간 밥 먹기 까다롭겠구만.”

오랜만에 이 정도의 강자와 생사결을 나눈 강혼은 얼어붙어 삐걱거리는 어깨를 풀곤 주먹을 들었다.

“끝내지. 마지막 예우로 주마등을 볼 시간 정도는 주마.”

“……한 가지만 묻지.”

강혼이 말해보라고 고갯짓하자 흑설야가 마저 말을 이었다.

“결계를 뚫은 건 대체 누구지?”

천상사성조차도 뚫는데 일주일이 걸릴 거라 예상한 결계를 누군가 뚫었다는 것이.

줄곧 황당했던 흑설야가 마지막 물음을 던지자 강혼은 핫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있어. 내가 잘 아는 놈.”

“누군가 있다는 건 사실이군.”

그 말을 듣고 흑설야가 눈을 감았을 때, 강혼의 주먹이 내려꽂혔다.

그를 확실하게 마무리한 강혼은 주먹을 털어내곤 몸을 돌렸다.

흑설야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떠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그가 지닌 신룡월단 앞에서는 결계 자체가 무의미했다.

모든 흐름을 절단하는 그 힘으로 결계의 흐름을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러니 스승님도 용제를 부러워하지.”

신룡월단을 만들어 낸 용제의 재능이 어떤 건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점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감은 물론.

그 비기를 한층 더 개량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서리스의 재능이 얼마나 눈부신지도 말이다.

“용신을 죽일 열쇠인가.”

그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해 가겠다고 하니, 옆에서 작은 도움 정도는 줘도 괜찮겠지.

강혼은 그리 생각하며 가볍게 하늘로 뛰어올라 주변 상황을 살폈다.

우선 성위를 공격하기로 한 사상지평 쪽은 문제없을 듯싶었다.

무려 천하오장성 중 두 명이 그쪽으로 향했다.

독후 불터렉스 윈터와 마왕 아라만은 줄곧 사상지평의 인원을 심문해 왔던 만큼.

그들의 기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어련히 알아서 해결해 줄 터.

‘나머지는.’

검왕과 은신사가 아이들과 교관들 구출을 시작했고, 저 멀리 검치 펜타니엄 락스카와 천구 아리즈 아리온도 거기에 가세하고 있었다.

저쪽도 문제는 없다.

“허어?”

그와 동시에 강혼은 서리스를 발견했다.

그는 마왕의 저택 쪽 인력을 구출했음은 물론 그들을 데리고 조력자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활약하고 있었다.

세계 침식자와도 한 번 조우한 것 같던데, 저렇게 팔팔한 걸 보면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재미있는 놈이라니까.”

기세가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었다.

애초에 결계를 뚫은 시점에서 세계 침식자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잔챙이 사냥은 취미가 없지만, 후기지수들이 저렇게나 노력하고 있다.

한참 선배로서 놀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강혼은 그리 생각하며 남은 세계 침식자를 잡고자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세계 침식자의 워너힐 아카데미 습격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번 일이 파란의 시작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 *

워너힐 아카데미를 무사히 지켜낸 후.

서리스는 자신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마왕의 저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만 한동안 잘 지내던 집이 이 꼴이 되었으니.

살 집을 새로 알아봐야 할 판이었다.

‘이제 워너힐 아카데미를 돌아오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긴 하겠지만.’

그래도 정들었던 장소가 이렇게 된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건가.’

동시에 서리스는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이 진짜 시작되었음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지식이 의미 없어졌을 정도로 시간 선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부터는 오직 자신의 실력 말고는 믿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전부 다 지키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못 하겠지만.’

최소한 자기가 알던 사람만큼은 더 이상 죽어 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서리스는 몸을 돌렸다.

힐로즈 단장이 죽고, 자연스레 월하십인인 자신이 임시 단장이 된 만큼.

아크단의 행보도 고민해야 해서 머리가 복잡했다.

“서리스 형!”

그렇게 서리스가 걸음을 옮기던 순간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제로가 서 있었다.

혹시 샬롯이 깨어나서 찾아온 건가 싶어 그에게 다가갔고, 제로는 당황한 얼굴로 서리스에게 말했다.

“펜타니엄이 큰일이야!”

“펜타니엄이?”

서리스가 의문을 보이자 제로는 다급하게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전해 들은 서리스의 두 눈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최흉이 폭주했다니.”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가주께서 끝없는 초롱에 맞서는 사이, 세계 침식자가 침공을 시작했다고 해.”

제로가 알린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서리스는 혀를 찼다.

설마하니 세계 침식자 쪽에서 최흉을 건드리는 방법도 알고 있었던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락로드가 자리를 비워야 했던 만큼 펜타니엄 전력에도 공백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부가주님은?”

“바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어.”

이쪽 일도 문제지만 본가의 위기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알았어. 나도 따라갈게. 넌 샬롯을 지키고 있어.”

샬롯은 그날 살룡에게 크게 당한 이후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제로에게 그녀를 맡겨둔 서리스는 곧장 임시 막사로 향했다.

딱 타이밍이 맞았는지, 때마침 돌아갈 준비를 마친 모습으로 검왕 펜타니엄 렐리즈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부가주님.”

“서리스로군.”

“바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래, 펜타니엄을 지키는 게 내 사명이니까.”

사명, 그 무거운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한 렐리즈를 보고 서리스도 따라 말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나 혼자면 충분하다만.”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 아닙니까?”

잠시 생각하던 렐리즈는 이내 그러도록 하라고 말했다.

워너힐 아카데미는 이제 많이 안정된 상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강혼이 있다.

더 이상 세계 침식자가 수작을 부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마왕에게로 간다.”

그리 말한 렐리즈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서리스는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서리스!”

“직계님!”

그 순간 서발광과 도로시가 같이 뛰어왔다.

사정을 들은 듯, 달려오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이미 서리스를 따라갈 생각인 듯하였다.

그들도 펜타니엄에서 동고동락한 사이다.

고향 땅을 지키겠다는데, 당연한 반응이었다.

“둘 다 펜타니엄을 지키러 가자.”

서발광과 도로시가 두 눈을 크게 뜨곤, 곧 기뻐하며 따라붙었다.

서리스가 자신들을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리스.”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이 서리스를 불러왔다.

그건 다름 아닌 첫째 형인 락스카였다.

워너힐 아카데미를 지키고자 계속 싸웠던 만큼 그에게서도 부상의 흔적이 여럿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서리스를 만나러 왔다.

“나는 테르넬의 단장으로서 워너힐 아카데미를 좀 더 지켜보겠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펜타니엄을 부탁하마.”

“부가주님도 있잖습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락스카에게 직접 부탁을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서일까.

믿음직한 미소로 답해준 서리스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그에게 물어볼 뭔가가 생각나, 걸음을 멈췄다.

“락스카 형님.”

“뭐지?”

락스카가 그를 돌아보자 서리스는 임시 감옥 쪽을 힐끗 보았다.

“칼릭스를 좀 부탁합니다.”

처형을 피하고자 자신과 거래를 하게 된 그이긴 하나 칼릭스는 아직 불안한 상태다.

그런 만큼 누군가가 옆에서 좀 지켜봤으면 하였기에 이를 부탁하자 락스카는 알겠다고 대답해 보였다.

‘칼릭스 녀석 허튼짓은 더 이상 안 하면 좋겠지만.’

만약 제파림이 직접 그에게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모를 노릇이다.

락스카가 주시하고 있으면 최소한의 대처 정도는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서리스는 렐리즈와 함께 마왕에게로 향했다.

“내가 무슨 배송처야? 다들 나만 찾아와.”

성위를 노렸던 사상지평을 전부 잡아들인 그는 툴툴거리며 서리스를 보았다.

“그림자 꼬마, 펜타니엄 쪽 일을 끝마치면,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아무래도 사상지평과 관련된 일인 듯하였다.

상황만 급하지 않다면 당장 무슨 내용인지 듣고 싶긴 했으나.

서리스는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그걸 들은 마왕은 빙그레 미소 짓곤 도로시를 돌아보았다.

“딸내미,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아빠, 나 도로시야!”

“그러네.”

이제는 제법 부녀지간 같아진 두 사람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마왕이 공간 이동문을 열어주었다.

그걸 본 서리스네와 렐리즈가 공간 이동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탁 트인 시야 사이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스는 이곳이 펜타니엄의 외곽 성벽임을 깨닫고는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성벽을 새까맣게 물들일 정도로 몰려오고 있는 인간이 아닌 듯한 괴물들과 세계 침식자 및 조력자를.

“감히.”

그걸 본 렐리즈의 그림자가 미친 듯이 요동치더니 이내 그의 손아귀에서 그림자 검이 만들어졌다.

그걸 본 서리스도 악스판시온을 꺼내 쥐며 두 눈을 날카롭게 띄웠다.

펜타니엄과 세계 침식자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