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같은 시각.
발렌타인과 아이랑 그리고 크라페는 방 하나에 모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쪽 움직였어.”
코가 가장 예민한 크라페가 그리 말하자 아이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 정말 명망 높은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이게 무슨 일인지.”
역사상 워너힐 아카데미가 이렇게까지 뚫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랑도 워너힐 아카데미가 시기적으로 안 좋았음은 안다.
성위만 봐도 치매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이 들었고.
거기다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며 마제 올스타드 스타린이 떠나고.
독후 불터렉스 윈터마저 악스달 단장을 그만두었다.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워너힐 아카데미 전력이 무척이나 약화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천상사성급이라는 흑설야가 들이닥쳤으니.
이쪽이 대항해도 한계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밖에서도 지원이 도착했을 테니까요.”
발렌타인이 분위기를 환기할 의도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아이랑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리스 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서 그녀가 불안감에 은연중에 서리스를 찾자 발렌타인도 그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가 있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 크라페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왔어.”
이쪽 위치를 다 꿰고 있는 건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안에 계십니까?”
즐거운 듯 한껏 웃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음산한 목소리를 듣고, 크라페가 목걸이를 쥐었다.
“먼저 친다.”
애초에 도망 다니고 숨기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
그런 만큼 크라페가 선공을 제안하자 아이랑과 발렌타인도 이에 동의했다.
그 순간 크라페의 목걸이에서 시작된 빛줄기가 순식간에 문을 덮쳤다.
콰앙!
열선이 문을 부숨과 함께 문 뒤편도 통째로 날려 버리자 자욱한 연기가 피어났다.
그 연기를 지나쳐 발렌타인과 아이랑이 밖으로 쇄도했지만.
거기에는 텅 빈 공간만이 있었다.
“푸흑, 하하학.”
그 순간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다름 아닌 뒤쪽에서였다.
아이랑과 발렌타인이 뛰쳐나온 방안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핏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남성이 있었다.
조력자 혈랑.
마치 사람을 놀리듯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그가 혀를 날름거렸다.
“역시 내가 당첨.”
혈랑과 아이랑 및 두 사람이 마주한 순간.
마찬가지로 조력자 산귀 쪽도 다른 이들과 마주한 상황이었다.
그가 제일 처음 만난 이는 눈을 곱게 감고 검을 늘어트린 검사였다.
체격 자체는 말라 보이지만 옷 아래로 슬쩍 보이는 단련된 근육은 그의 수행이 절대 부족하지 않음을 나타냈다.
“맹인인가.”
그를 보자마자 상대의 눈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산귀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인질로 삼아야 하는 만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런 만큼 확실하게 제압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산귀가 바닥을 박찬 순간이었다.
핏!
한순간 검명이 울려 퍼졌다.
산귀는 왼쪽 가슴에서 흘러나온 핏물을 보곤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조금 전의 공격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빠르다.’
검을 뽑지는 않은 것 같은데.
발도술인가?
산귀가 심상치 않은 상대임을 짐작했을 때, 그건 그의 앞에 서 있는 서발광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을 벨 속셈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몸이 단단하다.
그는 강철 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서발광은 두렵지 않았다.
저보다 더한 육체를 가진 서리스와도 매일 같이 대련했던 서발광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리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상대가 자신한테 베이는 시점에서 승산은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건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다.
산귀의 발아래에서 솟구친 그림자에서 도로시와 제로가 동시에 뛰쳐나왔다.
마왕화를 써서 그림자와 융합한 도로시와 제로의 그림자 검이 산귀를 덮쳤다.
채엥, 쾅!
산귀는 둘의 공격에 당하면서도 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내려쳤다.
그러자 내려쳐 진 공격을 피해 도로시와 제로가 서발광 쪽으로 물러섰다.
“어쩌다 보니 청랑단 멤버로 다시 모였네.”
“활쟁이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야!”
서발광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도로시도 따라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제로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둘, 지금 서리스 형이랑 나를 비교하고 있었지?”
“들켰다! 착쁜놈, 돌격!”
“아하하.”
전혀 긴장감 없는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동안 산귀는 혀를 찼다.
재빠른 놈들만 있으니 살짝 짜증이 난 것이다.
산귀는 자기 육체의 강건함만을 믿고 육탄 돌격하는 타입이다.
그는 저런 식으로 쫄래쫄래 피하는 이들을 제일 싫어했다.
‘몇 명은 죽일지도 모르겠군.’
의지를 다진 산귀가 두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넷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심화해 가며 여기저기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한 소음을 전부 귀에 들으며 살룡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이 복도 앞에서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두 개의 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붕대로 가려진 얼굴에서 노란색 고름이 흘러나왔다.
살룡은 그것이 귀찮은 듯 붕대를 더 강하게 동여매곤 도를 뽑았다.
“재밌군. 본디 세계 침식자라 하면 도망치는 어린아이들밖에 없는 곳이라 생각했건만.”
“내가 너 같은 놈들에게 도망을 왜 쳐?”
살룡이 말한 순간 그의 앞에는 그림자 검을 쥔 한 소녀가 있었다.
올해 스무 살.
이제야 막 성인이 된 그녀였지만 검에서 느껴지는 예기는 그녀가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검성 펜타니엄 샬롯.
별호에 어울릴 만큼 그녀에게서는 고고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별을 제 손으로 몇 개나 떨어트려 죽인 살룡의 입장에서는 그냥 가소로울 뿐이었다.
별은 아무리 거세게 빛나도 더 큰 별에게 잡아먹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계속 숨어 있을 속셈인가?”
그리고 이 장소엔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
어둠 속, 살룡의 목소리에 따라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샬롯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성은 몸 주위에 별들이 마치 환호하듯 몰려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법사라는 증거이자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임을 의미했다.
마성 올스타드 스타리즈.
오대가에서 가장 재능 있다고 평가된 두 사람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
“둘이서 덤빌 생각인가?”
“뭐 하러 아들을 많이 모으겠노. 둘이면 충분하지.”
스타리즈의 말을 듣고 살룡은 한차례 헛웃음을 흘렸다.
둘의 눈에 천재 특유의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살룡은 조금 이상함을 느끼기도 했다.
천재란 무릇 오만함과 방심을 같이 겸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정상에 있었기에 그것은 절대 버릴 수 없는 버릇과도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는 천재가 지닌 오만함은 존재했지만, 방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하게는 마치 누군가에 의해 그런 안일함이 고쳐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꺾여 본 적이 있다는 건가?’
천재의 방심이란 자신보다 더 압도적인 천재를 만났을 때 없어진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살룡은 둘을 보곤 꽤나 흥미로운 기분을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천재만 봐도 언젠가는 이쪽 세계에서 정상인 천상사성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은데.
설마하니 이런 천재들을 한 번 꺾어 놓을 만한 녀석이 곁에 있다는 건가.
‘검룡.’
그래, 분명 그런 별호였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신성 말이다.
“재밌군.”
입버릇처럼 재밌다는 말을 내뱉은 살룡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재미와 거리가 멀었다.
스르릉―
뽑힌 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흩뿌려진 검은별의 기운이 순식간에 주위를 잠식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를 잡아 놓으면 그 검룡이라는 녀석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같은 룡을 쓰는 자다.
떠오르는 별을 잡아먹는 건 이쪽의 특기.
기대를 충족시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살룡의 검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았다.
“잡아먹히지 않게 잘 버텨봐라.”
이윽고 검은 불길이 복도 전체를 뒤덮었다.
* * *
검은 불길이 치솟는 곳이 있다면 주홍빛 불길이 치솟는 곳도 있었다.
벌써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바드라는 자신의 검과 창을 맞댄 호라이즌을 보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둘이서 동고동락하며 아카데미 생활을 한 것도 벌써 1년이 넘어갔다.
그동안 두 사람은 라이벌이자 친구로서 함께 지내왔다.
그렇기에 서로를 무척이나 잘 알았다.
맞부딪친 검을 타고 흐르는 번개가 벼락같이 이바드라의 머리를 꿰뚫으려 하자.
그는 그 즉시 고개를 돌리며 화염을 터트렸다.
그러나 호라이즌도 이를 알고 창으로 화염을 무마시킴과 함께 또다시 검과 창이 오갔다.
둘의 실력은 솔직하게 말해 비슷한 수준이었다.
둘 다 우직하게 훈련과 단련으로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보니.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결판이 잘 나지 않았다.
호라이즌과 이바드라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검과 창 사이로 호라이즌을 보며 이바드라는 떠올렸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의 마음을 무너트린 것들을 과연 다시 되돌릴 수 있는가를.
하지만 이바드라로서는 끝내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가문이 무너지고 아버지를 잃은 뒤.
소가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어야 했을 호라이즌을 설득할 방법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강해지고자 얼마나 발버둥 쳤었는지 말이다.
“이바드라 나는 약한 인간이다.”
그러는 순간 이바드라의 생각을 눈치챈 듯 호라이즌의 입이 열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 이바드라는 코웃음 쳤다.
“네가 약한 인간이면 너와 비슷한 실력을 보이는 이 몸도 약한 거냐?”
“아니, 너랑 나랑은 다르다. 너는 나처럼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호라이즌의 마음속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더 이상 쥐어짜도 고름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무슨 약을 바르든 그의 마음에 남겨진 흉터는 절대 사라지지 않겠지.
“웃기지 마라.”
하지만 이바드라는 그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사람은 누구나 무너진다. 이 몸이 살면서 그런 놈들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자신 또한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보다도 더하게 무너진 사람을 이바드라는 알고 있다.
“그 서리스조차도 한때는 몰락한 삼남이라 불렸었다.”
눈여겨볼 수조차 없을 만큼 무너져 술과 놀음으로 허송세월하던 서리스.
그 당시의 그를 이바드라는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떤가.
황금 세대를 포함해 전 세대를 포함해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거세게 빛나는 별이다.
이바드라는 그런 서리스를 옆에서 보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 몸은 그 서리스의 라이벌이다.”
설령 서리스가 자신을 그리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바드라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네놈도 이 몸의 라이벌이다.”
이를 으득 간 이바드라의 불길이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거세게 타올랐다.
“그런 놈들이 이 몸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포기하게 둘 생각은 조금도 없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아득한 불길이 태양이 되어 이바드라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러한 태양을 올려다보며 호라이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순간에 이바드라가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나약한 마음.”
타오른 태양 아래로 이바드라의 두 눈이 불꽃처럼 빛났다.
“죄다 태워주마.”
멸천화륜검(滅天火圇劍)
오의(奧義)
멸화(滅火)
바르크의 태양이 밝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