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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238화 (238/275)

238화

서리스를 앞에 두고 칼릭스가 침묵했다.

조금 전의 대화를 보면 서리스는 제파림도 사상지평이라는 집단도 전부 알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쪽 정보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 그를 보며 칼릭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알려주면, 그 대가는?”

칼릭스의 두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패배자라 부르는 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았기에 자신 또한 패배자라고 했지만.

칼릭스는 절대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바람 앞에 꺼질 촛불이라 해도 그 미약한 불길이 자꾸 그의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리스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절대 스스로를 패배자라 인정하지 못한다.

서리스 자신이 평생을 패배자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악룡을 막기 위해 자기 몸을 던졌던 것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불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리고 지금 칼릭스의 불길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제파림을 쓰러트리는 걸 돕고자, 일부러 그의 곁에 접근해, 함께했다고 증언해주지.”

“서리스, 네 말 한마디로 이 상황이 뒤집힐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걸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칼릭스가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월하십인인 서리스라도 지금은 고작해야 일개 가문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부가주인 검왕이 처형을 마음먹은 시점부터 칼릭스가 살고 싶다면 더 확실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런 그를 보고 서리스의 몸 주위에서 시작된 그림자에서 검은색의 먹물 같은 기운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파림에게 힘을 빌린 칼릭스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리스, 너.”

“칼릭스, 난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용신에 관한 것부터 용제와 제파림의 관계까지.

칼릭스의 정보력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제파림을 쓰러트리고자 삼무제가 직접 움직이고 있다.”

삼무제는 비록 과거의 영웅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실존하며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 그들이 서리스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면 칼릭스의 처형을 뒤로 미루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제파림을 배신하고 나를 도와. 그럼 적어도 이 자리에서의 처형은 피할 수 있을 거다.”

서리스의 제안을 듣고 칼릭스는 조용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를 살려두면 나는 기어코 가주까지 기어 올라갈 텐데?”

그 이야기를 듣고 서리스는 코웃음 쳤다.

“해볼 테면 해봐.”

그리고 그 도발은 지금의 칼릭스에게 가장 적절한 답변이었다.

“하, 하하.”

한차례 웃음을 흘린 칼릭스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서리스, 나는 아버지 같은 꼴이 되지 않을 거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거울은 본래 무엇이든 비출 수 있는 법이다.

언제나 검왕만이 드리워져 있던 칼릭스의 마음속 거울에.

드디어 처음으로 그의 모습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범인은?”

서리스가 질문하자 칼릭스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듣자마자 서리스의 입에서 쓰디쓴 한숨이 흘러나왔다.

뇌성 일렉시즘 호라이즌.

그가 바로 칼릭스가 말한 범인이었기 때문이었다.

* * *

뇌성 일렉시즘 호라이즌.

서리스와 같은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이들 중 한 명이자 창술 실력자인 그는 창밖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워너힐 아카데미 여기저기에서 학생을 인질로 삼아 각 단원을 제압하는 조력자와 세계 침식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이었고.

일개 학생들이 대항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워너힐 아카데미가 점령당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저지른 짓이지.’

호라이즌은 푸른색의 눈을 내려 깐 채 자신이 저지른 참상에서 눈을 피했다.

그의 목덜미에 박힌 선명한 검은별은 그가 세계 침식자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인류를 배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평생을 소가문으로써 짓눌려 살아야만 했던 삶이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 오고 이바드라와 여러 인물을 만나며 조금씩 변해 가던 호라이즌이었지만.

그는 아버지이자 가주인 뇌주 일렉시즘 드라진이 드페리널에게 죽자, 다시 마음의 병이 들어 버렸다.

만약 아버지가 소가문의 가주가 아니었다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런 의문이 계속해서 마음속 어딘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드라진은 언제나 일렉시즘을 더 성장시키고 싶어 하였다.

일개 소가문이 아니라 다른 대가문과 같은 위용을 지니고 싶어 했고.

그만큼 노력하여 월하십인의 자리까지 올랐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마키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키나에는 드페리널이라는 괴물이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드라진은 여전히 대가문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호라이즌이 소가문이라는 이유로 뮤리널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오자.

드라진 또한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하나뿐인 아들이 소가문이라는 이유 만으로 천대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았다.

비록 자기 손은 더럽혀질지라도 가문과 아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하려고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을 보고 자라온 호라이즌이다.

그의 노력을 너무나 잘 아는 호라이즌이었기에 드페리널의 손에 생을 마감하고, 가문조차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은 드라진이 욕을 먹으며 그 위상이 박살이 나버리자.

호라이즌은 그 현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닌 척을 하며 애써 견디던 호라이즌의 눈에 워너힐 아카데미는 점차 끔찍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아버지와 가문을 잃었는데.

워너힐 아카데미에 다니는 수많은 대가문의 자식들은 너무나 잘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결국, 그는 그렇게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게 되었다.

대가문의 명맥을 끊고, 워너힐 아카데미를 무너트리기 위해 말이다.

“뇌성.”

그러는 순간 호라이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 즉시 부복 자세를 취했다.

거기에는 기다란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리고, 양팔에 냉기가 흘러나오는 사슬을 묶은 남자가 서 있었다.

“예, 흑설야 님.”

그는 다름 아닌 세계 침식자 중 가장 위험한 사인 중 하나인 흑설야였다.

흑색의 도복을 입은 그는 입술 색이 거의 없는 새하얀 입술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나는 월하십인 중 한 명인 검치와 천구를 죽이러 간다. 너는 마왕의 저택으로 가라.”

마왕의 저택.

그 말을 듣자마자 호라이즌은 자신과 같은 황금 세대의 일원들을 떠올렸다.

세계 침식자의 습격이 있고 나서 황금 세대 전원이 마궁으로 변한 마왕의 거처로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문 내에서 다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려면 반드시 인질로 잡아야 했다.

세계 침식자들이 워너힐 아카데미를 무리하게 공격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예, 알겠습니다.”

“조력자 둘과 세계 침식자 살룡(殺龍)이 함께 갈 거다.”

그 말을 하고는 흑설야는 옷자락을 흩날리며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그런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호라이즌은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시 봐도 괴물 같은 인물이다.

그가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뱃속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던 호라이즌은 숨을 한차례 내뱉곤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네가 뇌성이군. 일곱별이 조력자가 될 줄이야. 영광이다.”

“하하학, 새내기 반갑다잉?”

그러는 순간 그의 곁으로 다른 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마치 산을 축소 시켜놓은 듯한 거대한 덩치를 지닌 산귀(山鬼).

다른 한쪽은 진한 다크써클과 함께 음산한 웃음을 짓는 혈랑(血郞)이었다.

조력자 중에서도 상당히 위험하기 그지없는 그들을 보며 호라이즌이 더 나아간 순간.

그 앞에는 또 다른 인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를 검은색의 붕대로 칭칭 감아 그 내부가 보이지 않는 남자.

그러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별의 기운은 두 조력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세계 침식자 살룡.

대가문 직계들을 잡기 위해 온 진짜 주요 전력이었다.

“안내해라.”

저택으로 안내하라는 말을 듣고 호라이즌은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그들의 눈에 마왕의 저택이 보였다.

본래는 서리스와 그 친구들이 주로 사용하던 기숙사였으나.

이제는 미궁으로 변해 그들을 막아선 성과도 같았다.

“내부에서만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구조의 마법이 걸려 있다. 그걸 풀어야 할 거다.”

“그럼 뜯겠다.”

호라이즌의 조언을 듣고 산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거대한 덩치와 같이 팔 또한 말도 안 되는 굵기인 그는 그대로 문과 현관 벽에 손을 뻗었다.

두둑!

그 순간 그의 굵다란 손가락이 벽 안으로 파고들었다.

“흡.”

그가 단 한 번 숨을 들이켜며 팔 근육에 힘을 준 순간 쩌적하고 현관 벽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정말로 문짝 채로 뜯어버린 그가 부서진 벽 안으로 들어서자 세 사람도 그를 뒤따랐다.

미궁이 되었다는 말을 증명하듯 그 내부는 호라이즌이 알던 것과 달랐다.

장식품이나 가구들이 뒤죽박죽 섞여 천장이나 벽에서 삐져나와 있었고.

안쪽으로 이어진 길들은 괜히 음산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내 차례네.”

그러는 순간 혈랑이 손톱과 같은 수갑구를 꺼내 자신의 흉터 난 팔을 갈랐다.

후두둑!

튀어 오른 핏물이 바닥을 적시자 그 핏물은 마치 의지가 담긴 것처럼 바닥을 타고 순식간에 뻗어져 나갔다.

“핏물이 살아 있는 녀석들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가보자고.”

자기 피를 잔뜩 쏟았음에도 어쩐지 신이 나 보이는 혈랑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렇게 얼마 안 가 미궁을 걸어 나가던 혈랑이 코끝을 움찔거렸다.

그러다 이내 그의 입술이 귀에 걸릴 듯이 옆으로 벌어졌다.

“예쁜이들을 찾은 거 같은데?”

징그러운 웃음을 그리는 그를 보고 혈랑은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딱 먹기 좋게 네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살룡 님, 어쩔깝쇼?”

“나뉘어서 움직인다. 시간이 아까우니까.”

“좋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대가문 직계들의 피 맛을 보겠습니까.”

신이 난 혈랑이 제각기 나아가야 할 장소를 알려주자 그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어느샌가 혼자 남게 된 호라이즌은 그렇게 혈랑이 알려준 길을 나아갔다.

드문드문 마왕의 저택에서 본 기억이 있는 길이 나올 때마다 마음속이 시큰거렸지만.

호라이즌은 자신이 배신자가 된 시점에서 과거의 인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호라이즌이 얼마간 나아갔을까, 그는 곧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주홍빛의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

다름 아닌 염성 바르크 이바드라였다.

자신과 같은 일곱별이자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그나마 연이 깊은 그였다.

그런 그와 마주한 호라이즌은 자연스럽게 번개로 만든 창을 쥐었다.

“호라이즌, 이 몸에게 무언가 할 말은 없나?”

이바드라 또한 검 위로 불길을 일으키며 묻자 호라이즌은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없어. 이바드라. 나는 원래 이런 놈이다.”

“썩을 자식, 괜찮은 척이란 척은 다 해놓고.”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얼마 전까지 라이벌이자 친우였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

그렇기에 방심 따위는 없었고, 불꽃과 번개가 동시에 치솟아 올랐다.

“이 몸한테 좀 맞고 나면 이야기는 들어주마.”

“그럴 일 없을 거다.”

이윽고 불꽃과 번개가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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