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임시 감옥 안.
서리스는 칼릭스를 마주 본 채,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보다 밝아 보이십니다.”
“네 눈에 그리 비친다면 다행이네.”
보아하니 농담할 여유는 아직 있는 모양이다.
서리스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래서 왜 이 꼴이십니까?”
서리스가 되묻자 칼릭스는 침묵을 한 채, 뒤쪽에 서 있는 렐리즈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는 말하기 힘들다는 것일까.
렐리즈는 자신의 아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둘이 대화하도록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렐리즈가 나가자 칼릭스는 그제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다 내가 자초한 거지. 가주 자리에 눈이 멀어 손대면 안 되는 놈들에게 손을 뻗었을 뿐이야.”
“그래서 그 결과가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까?”
서리스가 질문하자 칼릭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서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 그렇게 저를 도발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이리 얌전해진 겁니까?”
“큭, 큭큭.”
또다시 웃음소리만 낸 칼릭스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서리스, 한 가지 알려줄까?”
“뭡니까.”
“세상은 실패자를 알아주지 않는다.”
서리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나 했더니.
“그딴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헛소리가 아니다. 이게 바로 현실이야. 우리 아버지가 그 증거다.”
“그래서 뭐, 자신도 패배자라고 할 속셈입니까?”
확실히 그의 말대로 검왕 펜타니엄 렐리즈는 첫째였던 락로드와의 가주 자리 경쟁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단지, 검황인 펜타니엄 락로드가 너무 뛰어났을 뿐.
렐리즈는 그 증거로 지금도 천하오장성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패배자라 부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패배자가 맞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칼릭스는 발버둥 쳤다.
직계가 아닌 방계임에도 불구하고 가주 자리에 오르고자.
그는 펜타니엄을 망가트리면서까지 가주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게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서리스가 등장하며 그의 계획은 초창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새웠던 계획이라고는 남지도 않았을 정도로 무너졌다.
락스카만 해도 칼릭스가 그를 꺾을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황이었다.
그런 그도 하나하나 계획을 짜고, 또 짜야 겨우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서리스가 그런 락스카의 명성조차 집어삼켜 먹을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며 모든 계획이 박살 나고 말았다.
정확히는 그의 계획이 서리스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를 못했다.
거기에 서리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상황들도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느 누가 20살에 최연소 월하십인에 올라 천상하월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역할까지 오르겠는가.
세상은 지금 모두가 서리스를 주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애써 여유 있는 모습을 지켰었지만.
그것도 한계점이 있었다.
가주 자리에서 멀어져, 이제는 잡을 수 없는 지경이 왔다고 칼릭스가 느꼈을 때.
세계 침식자가 워너힐 아카데미를 찾아오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은 말이 그를 무너트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안되는 건 안 되는 모양이야. 나는 패배자의 핏줄이었다.”
칼릭스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던 자신에게 렐리즈는 그리 말했다.
「칼릭스 포기해라.」
포기해라.
자신을 응원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래도 믿고는 있었으리라 생각했던 렐리즈는.
너무나 쉽게 자신에게 포기하라 말하였다.
그것이 칼릭스를 무너트렸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시던 그 순간조차도 포기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칼릭스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의 눈에 더 이상 그 어떠한 의지도 담기지 않았음을 깨달은 순간.
칼릭스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언젠가 아버지와 같이 꺾여버리는 바람 앞 촛불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다.
“……좋겠네. 서리스.”
너는 별이라서.
어떠한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을 환한 별의 핏줄로 태어났으니까.
“뒤늦게 불붙은 네가 이 정도로 환하게 빛날 줄이야. 세상은 모를 일이야.”
혼자서 중얼거리는 칼릭스를 보고 서리스는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그의 눈에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의지가 괜히 과거에 자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한심하다.
그리고 과거의 나 또한 이렇게나 한심하게 보였구나.
그렇게 생각한 서리스는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과 대화할 마음이 조금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너져버린 그에게는 무엇을 물어도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다.
차라리 다른 이들과 작전을 짜는 게 나았다.
‘왜 굳이 나를 여기로 데려와 주나 했더니.’
아무래도 렐리즈는 자신에게 칼릭스의 심문이 시간 낭비라는 걸 알려줄 속셈인 모양이었다.
‘지독한 인간 같으니.’
서리스는 혀를 차곤 감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렐리즈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아직은 조금 싸늘한 밤공기를 느낀 서리스가 몸을 돌리려 한 순간이었다.
“서리스!”
그 순간 들려온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서리스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사진산 선배님?”
붕대로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일곱별 중 최연장자인 사풍세가의 사성 사진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번에 발리움의 새 단장 자리에 올랐다고 했던가.
칼릭스도 원래 대로였다면 5월 내로 인수인계를 마치고 다른 단으로 가거나.
아니면 워너힐 아카데미를 떠났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는 감옥에 있다.
그것도 세계 침식자에 협조한 것으로 말이다.
‘십중팔구 이 일이 끝나는 순간.’
사형이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살려두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서리스, 아니, 검룡님,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존댓말까지 붙이며 간곡하게 부탁하는 그를 보고 서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칼릭스 형 쪽과 관련된 겁니까?”
사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기 쉬운 내용이 아님을 서리스는 눈치챘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좀 옮기시죠.”
서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사진산과 함께 숲 쪽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인기척 하나 없이 무척이나 조용했다.
거기에서 사진산과 마주하게 된 서리스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무슨 일인 겁니까?”
“그게, 칼릭스 단장, 아니, 전 단장은 이번 일의 범인이 아닙니다.”
범인이 아니라니.
‘하지만 칼릭스의 반응을 보면 분명…….’
그 순간 서리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뭔가가 있었다.
칼릭스는 본인이 이번 일을 저질렀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정말로 사진산 말대로 이번 일을 저지른 범인이 아니라면.
이렇게 상황을 만들 수 있는 한 집단이 있었다.
‘사상지평.’
용신의 부하들이자 세계마저 속일 수 있는 집단.
그들은 천구가 성위를 죽였다고 만들려 했듯이 칼릭스를 이번 일의 범인으로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칼릭스가 사상지평의 힘에 덮어 씌워졌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세계 침식자가 침입했을 당시 저는 다수의 조력자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때마침 칼릭스 전 단장이 저를 도와주었었는데, 거기서 한 세계 침식자 무리와 마주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사진산의 입에서 세계 침식자란 말이 나왔다.
사상지평을 모르는 그이니, 그들을 세계 침식자라고 생각한 거겠지.
“둘이 함께 맞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칼릭스 선배는 자기가 시간을 벌 테니 저보고 먼저 도망치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리스는 여기서 의문을 느꼈다.
칼릭스가 사상지평에 당했다는 건 그와 관련된 다른 이들도 모두 사상지평에 노출되었다는 거다.
그런데 사진산은 칼릭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뿐만 아니라 사상지평을 본 것까지 전부 기억 중이었다.
“그러면서 저에게 준 게 이겁니다.”
사진산은 살짝 주저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서리스에게 무언가를 하나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서리스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것은 검은색 깃털이었다.
그리고 서리스는 이 깃털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제파림.’
이건 다름 아닌 까마귀 같은 그놈의 깃털이었다.
저기에 깃든 검은별의 힘은 누가 봐도 제파림의 것이었다.
‘칼릭스는 제파림의 부하였구나.’
어디까지 연관되었는지는 몰라도 그와의 연관성은 확실해 보였다.
사진산은 열쇠의 힘이 깃든 검은 깃털을 가지고 있어서 사상지평의 힘에 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상지평의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강자인 렐리즈가 왜 칼릭스를 그냥 잡아 온 지 알겠다.
‘제파림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어차피 칼릭스가 세계 침식자와 관련된 건 사실이었으니, 그를 결국 처형할 목적이었다.
“그 뒤, 칼릭스 전 단장 덕분에 어떻게 빠져나오긴 했는데. 칼릭스 전 단장이 갑자기 범인이라며 검왕님께서 잡아 오는 게 아니시겠습니까.”
사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칼릭스를 상당히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그를 보고 그가 건네준 깃털을 받은 서리스는 사진산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사진산 선배.”
이건 이번 일을 해결할 중요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사진산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서리스는 곧장 다시 감옥을 찾았다.
칼릭스는 여전히 아까 본 자세 그대로 무릎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간 서리스가 한숨 소리와 함께 칼릭스의 옷에 검은 깃털을 쑤셔 넣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움찔거리며 크게 떨렸다.
검은 깃털의 영향을 받자마자 사상지평의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칼릭스, 너 제파림의 부하였구나.”
이제는 존칭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서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사상지평이 풀린 영향인지 아니면 서리스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칼릭스의 눈은 이전보다 덜 흐리멍덩하게 느껴졌다.
“네가 범인이 아니라는 건 사진산 선배에게 들었다. 그리고 너도 이제는 본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서리스가 그리 말하자 칼릭스는 잠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처음과 같은 웃음을 흘렸다.
“서리스,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 게 있긴 해?”
칼릭스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은 자세로 허리를 폈다.
자신이 범인이 아닌 것을 알았음에도 그의 태도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세계 침식자와 관련된 걸 아버지가 안 시점에서 난 죽을 운명이다.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만?”
이미 패배자로서 모든 걸 받아들인 그를 보고 서리스는 한차례 웃음을 흘려 주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끝마쳤을 때, 서리스는 칼릭스를 걷어차고 있었다.
뻐억!
턱을 맞은 칼릭스가 바닥을 나뒹굴고,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서리스의 두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칼릭스, 난 네가 사상지평에 술수에 당했든, 제파림의 부하든, 네게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는지 다 관심 없어.”
서리스는 칼릭스의 멱살을 콱 쥐었다.
“지금 워너힐 아카데미 안에는 내 친구들이 있어. 네 녀석이 방금 보인 반응을 보면, 넌 진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지?”
칼릭스의 흐릿한 눈이 서리스에게로 향했다.
“당장 그거나 쳐 말해.”
서리스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 딱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