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기이이이익!”
눈앞으로 날아드는 빛줄기를 피해 바닥을 구른 서리스가 자기 바로 옆으로 고개를 내민 마수 한 마리를 갈랐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주인들과의 전투 속에서 서리스는 숨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죽인 놈만 몇 마리지.’
세계 침식을 흡수할 틈도 없이 몰아치는 마수들 때문에.
서리스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는 없었다.
잠시라도 멈추는 순간 잡아먹히는 건 이쪽이기 때문이었다.
주인들과 서리스는 지금 오로지 자신이 포식자가 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서리스 쪽이다.
날아드는 사람 만한 모기의 주둥이를 낚아채어 배를 가른 것처럼.
주인들을 몰아치고는 있지만, 체력은 계속 깎여 나가고 있었다.
‘진짜들은 아직 나서지 않았다.’
저 멀리서 숨을 죽인 채, 오로지 자신의 빈틈만을 노리고 있는 몇몇 마수들이 느껴졌다.
강혼과의 훈련이 아니었다면, 느끼지도 못했을 수준의 작은 기척이었다.
하지만 서리스는 놈들이야말로 이곳의 진짜 주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마의 숲에서 그 위험도로 손꼽히는 다섯 주인.
각자 고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네임드 마수들은 몇십 년 동안 토벌되지 않은 마굴의 진정한 주인들이었다.
‘빅토르는.’
거기다 서리스는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도 빅토르가 커다란 지네 마수의 머리를 터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처가 조금씩이지만, 늘고 있어.’
그림자에다 금강잔월까지 익힌 서리스와 달리 빅토르는 평범한 육체다.
별조차 고유 별이 아닌 집단별을 사용하는 마당.
그가 자연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실전에서 쓰기에는 미숙했다.
‘강혼 님은 어쩌실 속셈이지.’
서리스도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빅토르가 리타이어 되기 전에 저 네임드들을 다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곧장 움직이기로 했다.
“악스판시온.”
서리스의 부름을 듣고 악스판시온이 우웅하고 울었다.
“터트린다.”
그리고 서리스의 말이 이어진 순간 악스판시온의 울림이 이제껏 보인 적 없었던 세기로 울려 퍼졌다.
서리스는 지금까지 검은별의 힘을 악스판시온에게 저장해두고 있었다.
워낙 꿀떡꿀떡 잘 먹는 녀석이니, 그림자도 부담하기 힘든 검은별도 다 먹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악스판시온이 줄곧 저장해둔 검은별의 힘이 쏟아져 나왔다.
“흡!”
당겨진 호흡과 함께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수들이 서리스에게 몰려 들어왔지만, 서리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불꽃에 뛰어드는 나방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잘 왔다.”
그 순간 악스판시온을 중심으로 음영이 지었다.
모든 어둠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양 악스판시온은 이제껏 이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변했다.
주인들이 뒤늦게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건 이미 한참 늦은 판단이었다.
“잘 가라.”
단출한 한마디와 함께 악스판시온을 쥔 서리스의 팔근육이 최대치로 부풀었다.
이윽고 단두대가 땅을 향해 내려쳐 졌다.
금강잔월(金强虥狘)
박살(撲殺)
내려쳐 진 악스판시온에서 터져 나온 검은 폭발이 일대를 뒤덮었다.
주마의 숲에서 한자리하는 주인들조차 그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고.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마수들도 그 여파에 휘말려 나가떨어졌다.
거뭇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을 때, 네임드 주인들의 시선이 연기 안을 주시하던 그 순간.
파악!
갑자기 연기 속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그걸 본 네임드 주인의 집중력이 일순간 그쪽으로 쏠렸다.
그들은 서리스만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호라도 줄 것이지!”
그러나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빅토르였다.
숯 검댕이 묻은 것 같은 꼴로 튀어나온 빅토르는 양 주먹을 쥔 채 앞으로 겨누었다.
“뭘 봐 이 마수 새끼들아!”
욕지거리와 함께 자연의 힘을 담아 넣은 빅토르의 권이 내질러졌다.
그 순간 압축된 대기가 폭발하듯 네임드 주인을 향해 권격이 쏟아졌다.
생각 이상의 출력에 네임드 주인인 털 뭉치 한 마리가 튕겨 날아갔다.
빅토르는 놈들 간의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다른 네임드 주인들은 그런 빅토르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기감에 뒤늦게 뭔가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연기 사이로 악스판시온을 겨눈 채 용인화를 발동한 서리스가 보였다.
마치 검은별을 한데 뭉쳐 압축해 놓은 듯한 강렬한 열기가 서리스의 몸 위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가 검은색의 연기를 흩뿌림과 함께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소리가 뒤따라 울려 퍼짐과 함께 서리스는 한 네임드 주인 앞에 도달해 있었다.
녀석은 몸 여기저기에 나무로 된 검을 끼운 나무 인간 모습의 목악귀(木惡鬼)라는 녀석이었다.
목악귀는 서리스의 돌진에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느린 반응에도 놈은 몸에 달린 나무 검 하나를 뽑는 데 성공했다.
그 단단함은 나무 중 최고봉인 천능선목 이상이라 불리는 목악귀의 나무 검이다.
목악귀는 당연히 서리스의 검을 쳐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서리스의 검 위에는 무형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서거억!
그리고 목악귀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서리스의 검이 자신의 나무 검을 마치 종잇장같이 베어 가름과 함께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록빛으로 물든 목악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녀석은 다른 검을 뽑아 보려 했지만, 서리스의 검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서걱!
처음 뽑은 나무 검과 같이 목악귀의 목 또한 잘려나가며 핑그르르 허공을 날았다.
서리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려한 검로를 그리며 목악귀의 몸을 난도질했다.
목악귀는 나무 마수이기 때문에 목만 자른다 해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한 놈.’
목악귀를 산산 조각낸 서리스가 용인화를 유지 시킨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런 서리스의 눈에 네임드 주인 셋이 동시에 이쪽으로 달려드는 게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송곳니와 손톱을 드러내는 주인들의 공격은 이미 지척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일순간 그의 팔근육이 압축되듯 조이더니 악스판시온이 번뜩였다.
새까만 털 아래로 입만 달린 네임드 주인 흑암구(黑暗口)의 이빨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강철도 뚫어버리는 흑암구의 이빨이다.
놈은 그대로 서리스를 이빨로 으스러트리려 했으나 그의 검이 마치 물 흐르듯 이어졌다.
분명 흑암구가 먼저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리스의 검은 어느샌가 놈의 이빨과 맞닿아 있었다.
빠름과는 또 다른 검.
상대가 먼저 공격함에도 그 수를 쫓아 상대를 꺾는 검의 극의.
후발 선제의 묘리.
그것이 신룡월단과 만나며 전에 없던 살상력을 내보였다.
모든 흐름을 끊어 버리는 신룡월단의 검이 마치 두부 자르듯 흑암구의 이빨과 몸을 그대로 절단했다.
동시에 서리스의 검이 흑암구의 입에서 빠져나오며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두 놈.’
그 궤적의 다음 상대는 정중사(鄭重死).
중과 같이 민머리에 이마에 박힌 여섯 개의 반점이 눈인 마수는.
하반신 또한 여섯 개의 뱀의 몸통과 문어 다리 같은 형태의 꼬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중사 또한 서리스를 향해 공격하고 있었는데.
놈의 입에서는 고열의 광선이 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광선은 악스판시온이 닿는 순간 빨려 들어가듯 집어삼켜 졌다.
그런 서리스의 발아래로 정중사의 꼬리가 몰려들었다.
동시에 마지막 남은 네임드 주인 중 하나인 궁기(窮奇)가 동시에 갈고리 같은 손톱을 휘둘러왔다.
연이은 공격에 서리스는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꼬리를 가르고 손톱을 받아쳤다.
정중사는 서리스를 바닥에 착지시킬 생각이 없었다.
거세게 휘두르는 꼬리들과 함께 놈의 입에 다시금 광선이 모여든 순간.
서리스는 망설임 없이 악스판시온을 놈의 입으로 집어 던졌다.
갑자기 서리스가 검을 포기할 거라 생각 못 했는지, 정중사의 입에 검이 닿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정중사는 급히 머리를 돌리며 꼬리를 움직였다.
서리스가 무기를 포기했으니 그를 바로 죽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중사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악스판시온의 바로 뒤를 쫓아 서리스가 그림자 검을 쥐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내 검은 원래 그림자다.”
그 말과 함께 서리스의 검 속 제왕이 울부짖었다.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삼식(三式)
흑월귀참(黑月歸斬)
반월 형태로 이어진 그림자 검격이 정중사에게 적중했다.
“기이이이이익!”
몸의 절반이 잘려나간 정중사가 비명을 지른 순간.
악스판시온을 허공에서 잡은 서리스가 그대로 정중사를 내려쳤다.
서걱!
작은 소리와 함께 정중사의 머리가 그대로 쪼개졌다.
‘세 놈.’
서리스는 그런 놈을 걷어참과 함께 달려든 궁기의 손톱을 다시금 받아치며 물러섰다.
이런 서리스의 움직임은 단 한 호흡만이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순간순간의 판단력이 이번 훈련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덕이었다.
“후우.”
마지막 네임드 마수인 궁기를 앞에 두고 서리스가 처음으로 호흡을 골랐다.
그제야 궁기의 모습이 서리스의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갈고리 모양의 발톱과 톱 같은 송곳니.
다리 부분에 검은색 날개를 단 흑호의 모습인 궁기는 사람의 네다섯 배는 되는 덩치였다.
게다가 놈은 그동안 잘 먹고 잘 지냈는지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궁기와 서리스가 대치하였다.
거대한 앞발로 바닥을 쓸듯 움직이는 놈을 앞에 둔 채.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꽈악 쥐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궁기였다.
서리스가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고자 뜀박질과 함께 달려든 궁기의 몸에서 새까만 번개가 쏟아져 나왔다.
아직 용인화를 유지 중인 서리스조차 무시할 수 없는 번개의 위력에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휘둘렀다.
하지만 궁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신에서 번개를 쏟아내며 육탄 돌격을 해왔다.
쩌엉!
서리스의 검과 궁기의 이빨이 맞닿으며 대기가 거세게 흔들렸다.
네임드 주인 중에서도 위험하기로 소문난 궁기다.
당연히 그 힘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하듯 궁기와의 전투는 상당히 길어지기 시작했다.
서리스의 몸에도 하나둘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네임드 마수 셋을 한 호흡에 해치우느라 무리를 한 여파로 움직임이 조금 굼떠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
‘원래 무리할 생각은 없었지만.’
서리스는 강제로 세 개의 별을 동시에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세 개의 별을 각자의 개성을 살렸을 뿐, 완전한 비기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궁기는 비기의 합에 딱 맞는 상대였다.
세별이 동시에 빛나자 궁기도 위협을 느꼈는지 검은색 번개를 자신이 스스로 삼켰다.
그 순간 궁기가 번개 자체가 되었다.
새까만 번개를 두른 궁기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앙!
서리스와 같이 소리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속도로 천둥을 터트리며 궁기가 달려들었다.
주마의 숲은 삽시간에 궁기의 번개로 불타며 애꿎은 다른 주인들만 거기에 휘말려 죽어나갔다.
그런 번개의 폭풍 속에서도 서리스는 고요함을 느꼈다.
그가 집중 중인 것은 오직 세 개의 별뿐.
악스판시온의 위에 그림자가 덧씌워졌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는 검은별의 어둠을 머금었다.
비슷하지만 서도 다른 그림자와 어둠.
하지만 그런 둘의 흐름을 같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금강잔월이었다.
서리스의 두 눈이 청명하게 빛났다.
이 순간을 위해 비기를 익혔다는 듯 서리스는 서서히 악스판시온을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합을 나눈 세 개의 별이 일순간 하나의 별이 된 듯한 감각이 느껴졌을 때.
서리스는 단호히 그 검을 내려그었다.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칠식(七式)
유성참(流星斬)
그리고 주마의 숲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