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서리스는 로란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정지한 느낌과 함께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용신이 성위를 죽이라 하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기에 서리스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멈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리스의 얼굴은 무척이나 자연스레 풀어졌다.
그건 일종에 버릇이었다.
어떠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처세술.
소드란의 가주로서 험난하게 살아온 서리스에게는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데 제격이었으니까.
‘로란은 용신이 심어놓은 첩자다.’
그 사실을 안 시점에서 서리스는 어떻게든 그에게서 좀 더 정보를 뜯어내야 함을 느꼈다.
제파림 이후 용신과 관련된 인물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니 말이다.
“……로란, 너에게서는 검은별이 느껴지지 않는데. 어찌 된 영문이지.”
그렇기에 서리스는 우선 말을 돌려 보기로 했다.
서리스가 로란을 의외의 인물이라 말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에게서 검은별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코가 예민한 크라페가 한 공간에 있었는데도 그의 검은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서리스도 그를 의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 나는 좀 다른 케이스거든. 그보다 어릴 때 봐서 그런가. 서리스는 내 얼굴이 기억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러는 순간 로란이 자신을 안다는 듯 싱글벙글 웃자 서리스가 속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과 아는 사이다?
‘아니, 내가 아니야.’
자신이 과거로 돌아오기 전, 용신과 거래를 한 서리스와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자 서리스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과거의 서리스와 자신이 뭔가 다르다고 느낀다면 용신에게 무언가 전할지도 모른다.
그걸 안 이상 절대로 자신이 그때의 서리스와 다른 인물이란 걸 들키면 안 된다.
‘차라리 모르쇠로 간다.’
저쪽도 자신을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냐고 판단하고 있다.
어쭙잖게 아는 척해서 걸릴 바에야 기억 못 한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게 나았다.
‘나는 제파림과 만났었는데. 용신은 거기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건가?’
제파림은 자신이 용제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관해서 용신에게 아무런 말도 안 했다는 게 좀 이상했다.
‘혹시.’
그는 제파림의 성격을 얼추 알고 있다.
그는 용제를 시기하고 두려워했었다.
그렇기에 용제가 남긴 씨앗인 자신을 자기 손으로 직접 없애고 싶어 할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언급을 안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제파림과 만난 것 같던데.”
그런 의문을 가지던 찰나 때마침 로란이 이를 언급했다.
이에 서리스는 또 한 번 긴장해야만 했다.
“그랑은 너무 다투지 말아줘. 둘 다 열쇠에 욕심이 있는 건 잘 알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돌아온 말은 마치 큰형이 형제 싸움을 타이르는 듯한 말이었다.
제파림과 자신이 왜 싸우게 된 건지 모르는 건가?
“……제파림은 욕심이 많아. 그래서 부딪친 거뿐이다.”
“그거야 잘 알지. 그래서 용신께서 그를 뽑은 거고. 그리고 서리스 너도 마찬가지잖아?”
웃음 짓는 얼굴로 로란이 자신을 보자 서리스는 따라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전할 이야기는 이걸로 끝. 성위를 죽이라는 명령을 잘 기억해둬. 가능하면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해줘야 할 거야.”
“그 명령을 들어 줄 수가 없겠는데.”
“……무슨 의미지?”
명령을 거절한다는 내 발언을 듣고 로란의 눈이 살짝 날카롭게 변했다.
“겨우 월하십인까지 올라왔어. 성위를 내 손으로 죽이면 다른 이들이 나를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
나는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자 능숙하게 내가 성위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내 운신의 폭을 줄이는 짓을 내가 뭣 하려 하겠어.”
로란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말했잖아. 그분께서 명령하신 거라고.”
“그러니 그분을 직접 만나서 내가 직접 간청드리도록 하게 해줘. 제파림 같이 멍청하게 삼무제에게 쫓기는 꼴이 되지 않도록.”
서리스는 도박 수를 던졌다.
차라리 이 틈에 용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말이다.
서리스의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용신의 명령을 직접 거역하는 행동이다 보니 그의 연락책인 듯한 로란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흐으음, 꽤 당돌하게 나오네.”
그런 서리스를 보고 로란은 턱을 매만진 채 잠시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좋아. 제파림과 같은 수순을 밟지 않는다. 확실히 앞에 걸어간 길이 그런데 굳이 똑같은 걸 밟을 이유는 없긴 하지.”
“말은 통해서 다행이군.”
“용신께서도 꽉 막힌 분은 아니야. 단지, 성위가 방해되니까 좀 빠르게 치우려 하신 것뿐이지.”
성위가 어떤 식으로 용신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은 우리가 해줄게. 어차피 서리스 네가 죽였어도 천구가 죽인 걸로 되었을 테지만. 그렇게 걱정이 많다면야.”
그러는 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천구가 죽인 거로 된다고?”
갑자기 성위의 아들인 천구 아리즈 아리온이 그를 죽인 거로 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야 네가 말했듯이 우리도 네가 제파림과 같은 수순을 밟게 할 이유는 없다고 했잖아? 적당한 시나리오 정도는 이미 준비해두고 있었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성위가 천구에 손에 죽었다고 조작한다는 거지.
‘섣불리 발을 빼서는 안 되었었나?’
서리스는 속이 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대화로 보건대 로란은 혼자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분명 그의 곁에는 용신과 관련된 이들이 더 있다.
‘애초에 열쇠조차 제파림과 나뿐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야.’
대체 용신은 어디까지 이 세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걸까.
로란과 같이 검은별이 느껴지지 않는 이들이 더 있다고 한다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용신과 관련된 인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지금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상황이 썩 좋게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건은 우리가 맡을게. 용신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야.”
“내가 직접 만나 뵙고 간청드리지 않아도 되겠어?”
“서리스도 바쁘잖아. 곧 있을 세계 침식자의 전쟁을 위해 그렇게 뛰어다니는 것도 그 녀석들의 검은별을 먹기 위함이 아니야?”
“다 보고 있었군.”
“감시한다는 식으로 여기지는 말아줘. 우리라고 해서 매일 너를 쫓아다니는 건 아니거든. 들려오는 정보로 판단했을 뿐이야.”
감시는 없다. 이 소리인가.
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서리스는 저 말이 거짓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로란과의 대화에서 서리스는 저들이 용신에 관한 신앙심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믿는 게 아니다.
자신을 열쇠로 고른 용신의 선택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감시가 있었더라면 흑마녀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서리스 주위에 감시가 있다는 건 그녀에게 있어 절대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 사항일 테니까.
“내가 성위를 직접 죽일 수는 없어도 도울 일은 있나.”
“하하, 생긴다면 귀띔은 해줄게.”
그리 말한 로란은 몸을 돌렸다.
“그럼 고생해. 언젠가 네가 열쇠가 되는 날을 우리는 늘 기다리고 있으니까.”
용신의 아래 있는 우리는 같은 형제라는 양.
그는 무척이나 친숙하게 서리스에게 말하곤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서리스는 조용히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서리스의 손에는 어느샌가 검은색 브로치가 쥐어져 있었다.
“……감시는.”
서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자 브로치가 한차례 손에서 떨었다.
서리스의 예상대로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대답을 들으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한 서리스는 검은색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흑마녀의 개구리가 튀어나와 서리스의 손 위에 앉았다.
“흑마녀, 너는 저들에 관해서 알고 있었냐?”
“조금.”
서리스의 질문을 듣고 흑마녀가 대답했다.
“저들은 용신의 날개. 사상지평(事象地平)이라는 자들이야.”
“사상지평?”
처음 듣는 단체였다.
그렇기에 서리스가 의문을 보이자 흑마녀는 부가 설명을 붙여 주었다.
“저들의 특기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게 만들어.”
“네 말이 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으응, 정보 조작이 특기. 정확히는 인식하는 모든 걸 조작해. 검은별이 안 느껴진 이유도 그와 같아.”
인식하는 걸 모두 조작한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래서 사상지평. 나도 그들에 관해 아는 게 조금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렇다는 건,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세계도 그들이 활동하며 여러 인식을 조작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렇다면 성위는 그때 이미 죽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가져온 꼭두각시를 세워놓고, 인식을 덧씌워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건, 세계는 이미 예전부터 그들의 입맛대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할 수 있나.”
“용신에게 힘을 빌렸을 테니까. 장담은 못 하겠지만, 일반적인 세계 침식자들보다 강할 거야.”
그 말을 듣자 서리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 다른 괴물들이 등장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용신이 열쇠들을 자유롭게 풀어놨는지 또한 알았다.
그들이 실패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잡혀 그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사상지평이라는 녀석들을 이용해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지웠을 것이다.
‘천구가 성위를 죽였다고 보이게 한다는 것도 같은 방법일 거다.’
서리스는 팔짱 낀 손으로 자기 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사상지평을 당장 적으로 돌렸을 때의 득실을 계산 중이었다.
“사상지평은 용신의 별을 받은 자에게는 통하지 않아.”
그러는 순간 흑마녀가 입을 열어왔다.
“그리고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자에게도 마찬가지야.”
사상지평이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한 변수였다.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자라는 건?”
“천상사성.”
흑마녀가 입을 떼자 서리스는 주먹을 쥐었다.
천상사성.
그들 중 한 명이 있다면 성위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흑마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성위를 지키도록 부탁할 수 있을 법한 천상사성은.’
천상사성은 네 명이다.
검황 펜타니엄 락로드.
영황 마키나 드페리널.
마황 올스타드 스타란스.
그리고 다른 한 명.
‘무황 강혼.’
용제의 형인 제라드의 일인전승 무투신을 이어받은 자.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천사사성 중 유일하게 이 이야기를 들어 줄법한 이는 그 한 명밖에 없었다.
서리스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용제의 형이었던 제라드가 부디 그의 제자인 강혼에게 용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를 믿어야 했다.
“일단, 만나볼 수밖에 없겠지.”
사상지평을 막으려면 그밖에 없다.
천상사성 무황 강혼.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