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제로가 패배했다.
그것을 직접 본 서리스는 침묵을 한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 상황 속에서 샬롯에게 덤벼 보지도 못했을 제로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전력을 다해 싸운 제로는 그 누구보다 밝게 빛나 보였다.
‘성장했구나.’
철없는 남동생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마냥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뮤리널과 샬롯이 충돌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림자 선포랬나.’
서리스는 샬롯이 사용한 그림자 선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별빛을 흡수하는 기술.
악스판시온에 비하면 흡수 면에서 한참 밀리긴 하나 샬롯이 엄청난 걸 만들어 내긴 한듯하였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그림자의 특성을 이용한 거니까.’
샬롯이 천재라고 다시금 느끼며 서리스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영성이라고 불리는 뮤리널이다.
같은 오대가답게 그녀는 실력만 따지면 제로보다 위일 것이다.
그 증거로 샬롯의 그림자 선포로 별의 위력이 떨어지긴 했으나 뮤리널은 나름 잘 맞서고 있었다.
기술의 범위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는 전부 베어 가르는 샬롯의 일격을 뮤리널은 내부의 냉기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뿐.
제로와 마찬가지로 뮤리널은 샬롯에게 단 한 번의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압도적이네요.”
아이랑 조차도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지금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이제 시험장 내에 샬롯과 뮤리널 말고는 남아 있는 이도 없다.
그건 그들의 전투가 끝나면 이번 시험도 끝난다는 소리였다.
“샬롯,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어요.”
“오만한 만큼 거기에 어울리게 성장하는 동생이니까요.”
서리스는 아이랑의 말을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아이랑이 서리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화면을 힐끗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런 싸움을 보고만 있으니 몸이 좀 쑤시네요.”
동생들이 저렇게나 강해져서 와줬는데 가만히 있기가 그랬다.
“서리스 님, 혹시.”
“예, 다음 시험에 나올 예정인 학생 단장들의 역할, 제가 하나 맡아야겠습니다.”
그저 입학시험일 뿐이니 본래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제로와 샬롯의 성장을 보고 나니 가만히 있기가 아쉬웠다.
두 사람의 전력을 받아주고 싶어졌다.
“동생들 관리는 제가 해야 할 테니까요.”
무엇보다 서리스는 샬롯의 그늘에 눌려 제로가 또다시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제로가 샬롯을 좇는 게 아니라 자신을 좇아왔으면 했다.
“짓궂으시네요.”
“원래 형제가 그런 법이죠.”
서리스가 미소 짓고 자리를 뜨자 아이랑도 따라 일어섰다.
왜냐하면, 그사이 화면에서는 이미 거의 결판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얼음 조각 사이로 뮤리널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샬롯과의 공방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위험한 것이었다.
‘역시 강해.’
자신이 그토록 샬롯을 좋아했던 이유.
그 이유가 바로 이 강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뮤리널은 왜인지 오늘만큼은 이 강함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느낀 이유는 다름 아닌 제로 때문이었다.
어째 선가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샬롯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나는 지금까지 단정 지었었어.’
뮤리널은 샬롯을 동경한다.
그러나 그 동경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포기와도 같았다.
샬롯은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평생을 마키나에서 사랑받아온 그녀였지만.
샬롯 앞에만 서면 그녀는 빛바랜 돌멩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샬롯에게 무너져 내린 날.
그녀는 차라리 그녀를 동경하기로 했다.
또래 중 가장 뛰어난 이를 동경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오히려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제로를 보고 그게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겨났다.
자신보다도 더욱 샬롯에게 짓눌려 살았을 그가 오늘 그녀에게 끝까지 맞서며 싸우던 그 모습은.
뮤리널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원래는 중간에 난입할 생각이었던 뮤리널이었다.
어차피 제로가 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샬롯과 둘만 남으면 자신에게 승산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샬롯을 향해 끝까지 달려드는 제로를 보고 뮤리널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뮤리널, 왜 그래 답지 않게.”
그러는 순간 샬롯이 검을 아래로 내려그은 채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설마, 제로를 보고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었어?”
그 말을 듣고 뮤리널은 얼음 검을 꽈악 쥐었다.
“샬롯, 나는 널 동경해.”
그러는 순간 뮤리널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미 그 사실을 애저녁에 알고 있었던 샬롯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동경하니까. 너를 멀리 보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었어.”
그녀를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여겼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 같아.”
샬롯도 사람이다.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 같은 노력으로 달리고 있다.
“힘든 길을 굳이 사서 가려고 하네.”
그런 뮤리널을 보고 샬롯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네가 자기 주제를 아는 친구라 좋았었는데.”
오만함이 가득 담긴 그 발언을 듣고 뮤리널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 마. 넌 날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었던 거 알아.”
자신뿐만이 아니겠지.
그녀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너를 동경했던 나니까! 상관없지만 말이야!”
뮤리널의 전신에서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모든 별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빙천괴령(氷天怪令)
십식(十式)
절대영도(絶對零度)
그 순간 그녀의 발아래를 중심으로 뻗어져 나간 냉기가 그림자 선포마저 얼어 붙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샬롯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샬롯!”
그 외침과 함께 뮤리널이 바닥에 일으킨 얼음과 함께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샬롯이 떠올린 건 서리스였다.
평생을 자기 아래에 있을 거로 생각한 그가 주변에 끼친 영향이 제로에 이어 뮤리널에게까지 향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아주 짧게 한숨을 내쉰 샬롯의 그림자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못 말리는 오빠라니까.”
그리고 2차 시험이 끝마쳤다.
* * *
시험이 다 끝나고 병실에서 눈을 뜬 제로는 몸 여기저기가 쑤셔오는 걸 느꼈다.
제대로 치료받았건만 몸이 삐걱거리는 게, 내일 시험 때도 꽤 고생할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제로는 밖으로 나오다가 익숙한 사람과 마주쳤다.
웨이브 진 은색 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뮤리널이었다.
그녀가 제로를 힐끔 보자 그는 그녀 꼴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냐. 그 꼴은? 어디서 두들겨 맞고 왔냐.”
“네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닐 텐데. 나보다 일찍 리타이어 해놓고 정신도 못 차린 게.”
그 말을 듣고 제로는 눈을 찌푸렸다.
“그야 내가 너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으니까.”
“그게 자랑인가.”
시비라도 걸려고 온 건가.
제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뮤리널이 말했다.
“……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샬롯한테 맞섰어.”
그러는 순간 이어진 말을 듣고 제로는 뮤리널을 돌아보았다.
같은 나이 또래 중 샬롯 다음으로 가장 강하다고 칭해지는 그녀다.
그런 그녀가 은연중에 샬롯과 얼마나 비교당했을지 잘 아는 제로는 킁하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그러냐.”
“샬롯답게, 역시 이길 방법이 안 보이더라. 걔 내가 알던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샬롯도 영향을 좀 받았거든.”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에 뮤리널이 제로를 돌아보았다.
그런 뮤리널과 마주한 제로는 씩하니 웃어 보였다.
“서리스 형한테 말이야. 한 살 차이가 나긴 해도 졌다면 졌었으니까.”
“그거 사실이었구나.”
“너도 서리스 형 만나봐서 알잖아?”
그 말을 듣고 뮤리널은 침묵했다.
만나기만 했을까 봐.
아주 묵사발이 될 만큼 두들겨 맞았었다.
그가 자신을 보기만 해도 여전히 오금을 지릴 듯한 공포를 느끼는 뮤리널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샬롯이 대단한 건 맞아.”
그러면서 제로는 조금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 아예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이제 안 들더라.”
뮤리널은 그런 제로를 보고 그가 어째서 샬롯에게 대항할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으, 쑤셔. 얼른 가서 쉬어야겠다.”
시험 결과는 아까 전에 통보를 들었기 때문에 제로는 그리 말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
그리고 그런 제로를 보며 뮤리널도 옆에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단지, 둘은 걸어가며 샬롯과의 전투를 머릿속에서 떠올릴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한 순간 그들은 저택 문 앞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마주했다.
그건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서리스 형!”
“윽.”
팔짱을 낀 채 줄곧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서리스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둘을 보곤 말했다.
“둘 다 따라와.”
따라오라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서로를 돌아본 둘은 서리스가 뒤뜰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조심히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뒤뜰로 온 서리스는 대뜸 악스판시온을 꺼내 들었다.
“두 사람 다, 오늘 시험 잘 봤어.”
그리고 이어진 말을 듣고 둘의 눈이 교차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잘 보긴 한 거 같은데, 부족한 점도 확실히 보이더라.”
스산한 기운이 서리스를 중심으로 흘렀다.
“서, 서리스 형, 우리 방금 시험 마치고 돌아왔는데?”
“나 별 없어.”
“걱정 마. 그런 거 없어도 문제점 파악은 확실히 시켜줄 테니까. 간단한 뒤풀이라고 생각해.”
이런 뒤풀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갔다.
“월하십인이 가르침을 주는 기회다. 잘 받아 배워라.”
그 말을 듣자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샬롯과의 전투를 곱씹던 둘이다.
거기에서 잘못된 점을 안다면 성장할 수 있을 거란 건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잘 배워둬. 내일 또 써먹을 수 있게.”
그리 말한 서리스가 씨익하니 웃어 보이자 둘은 대답 없이 각자의 검을 쥐었다.
성장 욕구 하나는 참 훌륭한 녀석들이었다.
열심히 노력한 녀석들에게 상 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