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검은 깃털과 검과 번개가 세상을 뒤엎을 하늘에서 맞부딪쳤다.
지형이 뒤바뀌며 산 하나가 평지가 되어 버릴 정도로 삼무제 둘과 그런 삼무제 중 한 명을 죽인 이의 전투는 그야말로 재해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경천동지한 전투 속에서도 점차 승부의 향방이 가려지고 있었다.
애초에 이 전투 자체가 원래는 성립되기 힘든 싸움이었다.
제파림은 본체가 아닌, 일부 영체를 제롬의 몸에 깃들여 놨을 뿐인 가짜고.
무엇보다 그릭슨의 독이 그 육체를 계속 좀 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삼무제 중 둘을 상대로 승리를 한다는 건 기적이 일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바로 분신에 가까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제파림이 그 둘을 상대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지금 만악의 질병에 잠들어 있는 제파림의 본체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강할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강자들의 치열한 전투도 슬슬 끝이 보였다.
제파림은 피가 흐르는 복부를 움켜잡으며 서 있었는데, 잘려나간 다리 대신에 깃털 뭉치로 몸을 지탱하는 모습이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그의 팔과 몸 여기저기에서는 진한 검은 독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격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릭슨의 극독은 그가 깃든 제롬의 육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독은 만악의 질병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검은별을 쓰는 이일수록 더 빠르게 중독되게 개발되었다.
그래서 한때 그릭슨은 이 극독으로 세계 침식자 학살자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제파림의 손에 살해당했으니, 대전쟁을 앞둔 인류 입장에서는 큰 전력 손실이라고 봐도 좋았다.
제파림 또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서리스를 빌미 삼아 그릭슨을 죽인 것이기도 했다.
“꽤나 위험한 독이었군. 방법이 없어,”
이리저리 해독해보려 했던 제파림이었지만.
그는 결국 손을 놓기로 했다.
본체가 아니고서야 그릭슨의 독은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놈의 마지막 발악은 생각 이상으로 지독하게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인지 제파림은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졌다.
몸만 정상이었으면 눈앞의 두 놈 중 하나는 데려갈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뭔 놈의 독이 몸에 깃든 검은별을 직접적으로 갉아 먹다니…… 그러다 보니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점차 줄고 있었다.
제파림은 눈앞의 연기를 해치고 나타난 두 놈을 바라보았다.
한쪽은 그림자 검을 쥔 요치아.
다른 한쪽은 번개를 몸에 두른 스타린이었다.
제롬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검은별을 운용해 만든 검은 깃털이 더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제파림은 한숨과 함께 웃었다.
“곧 다시 보지.”
뒤이어 제파림의 목에 깊숙한 자상이 생겼다.
스타린의 번개 또한 정확하게 그의 심장을 꿰뚫었고, 두 개의 약점을 동시에 공격당한 제파림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스타린과 요치아는 숨을 몰아쉬며 제롬의 육체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그 몸에서 흘러나온 희멀건 안개가 서서히 대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음을 말이다.
제파림의 비기 성령불사의 힘으로 제롬의 육체에 남아 있던 그의 영체가 본체로 돌아가고자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본체도 이제는 다 회복했고.’
더 이상 제롬의 육체에 있을 필요는 없었으니, 제파림은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저 멀리 먹물 같은 어둠으로 점철된 검은별 하나가 이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사실에 그가 의아함을 느꼈을 때.
제파림은 그의 모습이 겨우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또 다른 열쇠지 않는가?
아까 전, 자신이 경고했던 후배 열쇠가 이쪽으로 오고 있음에 제파림은 의아함을 느꼈다.
설마, 열쇠끼리 동질감이라도 생겨서 두 놈에게 자신의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그런 거라면 조금 기특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열쇠인 이상 용신 님을 섬기며 같은 길을 나아가는 자이니까.
하지만 미련하기도 했다.
저 정도 수준으로는 이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것.’
그러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영체 상태였다.
본체로 돌아갈 일만 남은 그는 혀를 차며 다시 이동하려고 했다.
오싹!
그 순간, 일평생 단 한 번밖에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제파림의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이 느낌.’
먼 과거, 자신의 영체가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어 오래도록 회복에만 전념해야 했던, 그날.
그날에 받았던 그 감각과 똑같은 불길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지금 그 감각이 다름 아닌 서리스가 쥐고 있는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용인화를 끝낸 채, 악스판시온을 쥐고 전력으로 내달리고 있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정체는 바로 제롬의 비기였다.
신룡월단.
그가 용신을 죽이기 위해 만든 그 비기였다.
‘어떻게?’
제파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갑자기 대체 어디서 제롬과 전혀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 그의 비기를 사용하고 있단 말인가.
제파림은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격렬한 분노까지 느꼈다.
제롬은 시대를 넘어 지금의 시대까지 자신을 방해할 씨앗을 남겨둔 것이었다.
‘형님은 기어코 끝까지 나를 방해할 생각인가!’
치밀어 오른 화를 속으로 토해낸 제파림이었지만, 그는 지금 이리로 달려오는 서리스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본체도 아닌 영체의 일부인 그다.
육체에 깃들어 있다면 모를까, 이미 영체로 빠져나온 시점에서 그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다.
영체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이가 절로 갈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제롬에게 치밀어 오른 갈 곳 잃은 분노를 서리스에게 쏟았다.
영체의 일부라 한들 영체는 영체다.
피해를 본다면 분명히 본체에게도 타격이 갈 것이었다.
그리고 서리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리라.
“뭘 꼬라봐?”
그리고 그 순간 신룡월단이 깃든 검을 제파림의 영체에게 휘두르며 서리스가 씨익하니 웃어 보였다.
“하극상 처음 보냐?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죽이겠다. 네놈은 반드시 죽이겠다.’
처절한 저주를 퍼부은 제파림의 영체가 서리스의 검에 의해 반 토막 나며 찢어발겨 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리스는 용인화를 풀어내곤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죽이긴 뭘 죽여. 다음에 보면 죽는 건 너다.”
그의 입 모양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눈치챈 서리스는 그에게 들릴 리 없는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롬의 육체를 수습하는 스타린과 요치아가 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서리스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인제 와서 인사를 올리면 노부가 퍽이나 잘 받아주겠느냐?”
“안 받아주시면 어쩌실 겁니까. 제 덕에 반로환동까지 하셨는데 말입니다.”
“이 고얀 놈이!”
서리스의 말을 듣고 요치아는 서리스를 두들겨 패려고 검을 휘둘러 왔지만, 그는 이를 가볍게 회피했다.
가짜라곤 하나 제파림을 상대로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싸운 요치아다.
그도 기력이 많이 빠진 탓에 서리스도 피할 수 있었다.
“제자라는 것이 스승을 우러러보지는 못할망정, 이러다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몸은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요치아는 본래 반로환동에 도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리스는 어려진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용제, 제롬과는 또 다른 스승인 그가 앞으로 더 오래 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은 서리스에게도 뿌듯함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서 요치아도 혀를 쯧쯧 찰 뿐 더 때리려 들지는 않았다.
“서리스 꼬마야.”
그러는 순간 스타린이 그를 불렀다.
서리스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스타린은 재차 입을 열었다.
“제파림의 영체라는 것은 잘 처리했지?”
“예, 일부긴 하지만 본체에도 타격이 갔을 겁니다.”
서리스는 사전에 제파림에 관한 것을 스타린에게 알려 두었었다.
그리고 제파림에 관한 것을 알려준 건 다름 아닌 흑마녀였다.
그녀는 앞으로 행할 일들의 변수이자 귀찮은 방해꾼으로 제파림을 언급했고.
그에 관해서는 줄곧 정보를 수집해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제대로 성립된 셈인가.’
흑마녀의 덕을 이번에 톡톡히 봤음을 서리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 정보를 통해 제파림의 본체에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계획을 들은 스타린이 요치아까지 데려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지만 말이다.
“그때 이야기하는 걸 보고 제롬 놈과도 뭔가 연은 있겠거니 했는데, 비기만 홀랑 받아먹다니…… 펜타니엄이라는 놈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너무 꽉 막힌 소리 좀 그만하십쇼. 숨 막혀 죽겠습니다.”
사실 서리스가 금강잔월을 먼저 배운 것이나 요치아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서리스는 그에게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스타린 앞으로 다가갔다.
“스타린 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염원하던 그의 친구의 시체를 되찾았다.
비록 제파림 때문에 많이 훼손되긴 했으나 그의 숙원은 이룬 셈이었다.
“제파림, 그 자식을 계속 쫓아야겠지. 제롬의 복수는 제대로 마무리해야 하니까.”
목표를 잃은 사람은 허무함에 방황하기 마련인데, 그는 벌써 다음 목표를 정한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제롬의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제파림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 제롬의 시체 속에 자신의 영체를 남겨두었었다.
그래서인지 제파림의 검은별이 그릭슨의 독기에 당했다곤 하나 여전히 몸 내부에 진하게 남겨져 있었다.
‘이 양이라면.’
흡수하기 버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대량의 검은별이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서리스는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다.
머지않아 세계 침식자와의 대전쟁이 일어날 판이다.
지금은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했다.
‘해보자.’
서리스의 손을 타고 제파림의 검은별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삼무제와 거의 대등하게 맞섰던 대량의 검은별이 마치 서리스에게 쏟아지듯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탓에 서리스는 강렬하게 뛰는 심장과 함께 아찔한 두통을 느꼈다.
육체가 검은별을 받아들이느라 과열된 것이었다.
하지만 서리스는 이러한 대량의 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요치아에게 배운 적이 있다.
‘그림자로 흘려보낸다.’
쏟아 들어온 어둠이 서리스를 지나 그림자 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대량이라 일부는 밖으로 흘러 없어지기도 했지만, 서리스는 대부분의 검은별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 순간, 서리스의 그림자가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치솟아 오른 그림자가 서리스의 다리를 감싸고, 점차 그의 전신으로 뻗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치아와 스타린의 시선이 교차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한 발짝 더 높은 경지에 오르려고 하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집중력이 한계치까지 올라가 이 세상에 자신 혼자라고 느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볼 수 있는 순간.
그 순간에 돌입한 서리스는 새까만 그림자를 몸 전체에 두른 채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으로부터의 방해는 없었다.
삼무제 두 명이 서리스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만큼 개미 하나도 그의 근처로 얼씬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한 보호 속에서 서리스는 자기 내면에서 흐르는 어둠과 별빛을 오롯이 손안에 모아갔다.
한참을 걸려 끌어모은 어둠과 별빛을 서리스가 품에 안은 그 순간.
내면 속, 밤하늘에 자리해 있던 8번째 별이 선명하게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서리스는 하늘 위, 용제의 별이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8성.
월하십인들의 영역.
그 초인의 영역에 드디어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