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천하오장성.
독왕 불터렉스 그릭슨의 죽음.
그 일이 전 세계로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터렉스 쪽에서 발표하기를 그의 사인은 노쇠에 따른 자연사라고 하였지만, 그를 최근에 본 이들은 그 말을 믿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서리스 또한 있었다.
그릭슨의 죽음.
그것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는지 그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장례식 참가를 위해 불터렉스 본가에 오랜만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서리스의 눈에는 진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자신이 독기를 빼줬던 그 날부터.
그릭슨과 서리스는 은인 관계가 되었다.
그는 불터렉스의 평생의 한이 해결된 것을 솔직하게 기뻐했고.
한참 어린 서리스에게 가문 전체의 은인이라며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다. 이 은혜는 내가 평생 갚으마.」
발렌타인과의 교제를 대놓고 제의받은 건 난처했긴 했지만.
서리스는 그가 발렌타인과 불터렉스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천하오장성으로서 동경했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도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친구의 할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독기가 사라져 이제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며 은근히 웃던 무인이 이토록 허무하게 말이다.
‘제파림.’
확실하다.
그릭슨을 죽인 것은 분명 제파림이었다.
그릭슨의 독기가 제거됐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존재가 방해라 여겨 살해한 것이다.
으드득―
서리스의 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릭슨은 이리 허망하게 죽을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제파림 같은 녀석에게 살해당할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리스 님, 오랜만에 뵙네요.”
분노를 삭이고 있던 서리스의 귀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린 장소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우산을 쥐고 있는 그녀는 발렌타인의 유모, 독산천귀 루니릴이었다.
“루니릴 님.”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녀는 비록 파문당했다곤 하나 그릭슨의 친딸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차마 뭐라 말할 수 없었던 서리스가 고개를 숙이자 루니릴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 비해 정말 많이 성장하셨네요. 몰라뵐 정도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서리스의 얼굴은 펴질 수가 없었다.
“서리스 님.”
그러는 순간 루나릴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왔다.
이에 서리스가 고개를 들자 루나릴은 정문 쪽을 가리켜 보였다.
“서리스 님은 발렌타인 님의 친우로 오신 거죠?”
루나릴의 행동을 보건대 그릭슨은 서리스가 독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가문에 알리지 않은 듯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다음에 자신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서리스는 그릭슨의 은인이 아닌 발렌타인의 친구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럼 저희 발렌타인 님 좀 부탁드릴게요. 유모나 이모로서는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서요.”
그 말을 듣고 서리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저편에 발렌타인이 초연하게 선 채 장례식을 찾아온 이들을 맞이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그릭슨의 가족들이 견뎌내고 있다.
그런 마당에 자신이 왈가불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리스는 저 멀리 관에 담긴 그릭슨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호령하는 다섯 개의 별 중 하나가 스러진 모습은 서리스에게 여러 생각을 품게 했다.
* * *
장례식이 거의 다 끝나고, 그날 밤에 서리스는 발렌타인을 다시 찾아갔다.
그녀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터렉스의 가문별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였다.
“서리스 님.”
그의 기척을 이미 느꼈는지 그녀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서도 표정 하나 없던 그녀는 지금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의자에 따라 앉은 서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좀 괜찮으십니까.”
“저희 불터렉스에서는 급사로 인한 이별이 자주 있었으니까요.”
불터렉스에서 나고 자란 발렌타인은 독기로 인해 죽은 이들을 종종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릭슨의 죽음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표정을 가르쳤던 서리스는 그녀의 표정이 지금 꾸며진 것이란 걸 잘 알았다.
“거짓말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지금 친구를 위로해 주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서리스의 말을 듣고 발렌타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발렌타인을 무척이나 아끼던 그릭슨이다.
그가 사랑해준 만큼 발렌타인 또한 그릭슨을 무척이나 따랐을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서리스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토닥여 주었다.
“흑, 흐윽, 할아버님.”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을 해봤자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가 견뎌내기에는 가족의 죽음은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줄곧 표정을 굳히고 있던 발렌타인은 그렇게 서리스의 품 안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쏟았다.
그의 온기 앞에 꾹꾹 눌러놨던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내 책임이다.’
그릭슨의 죽음은 분명 자신이 독기를 처리해 줬기 때문이었다.
제파림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너무 섣부른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 서리스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최근 모든 일이 다 잘 풀리니 방심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나의 실수가 큰 별을 잃는 뼈아픈 결과를 낳았다.
당장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이 코앞인데 천하오장성이라는 자리 하나가 비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를 서리스는 오롯이 제파림에게 쏟아부었다.
용제에 이어 그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악행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뒤, 서리스는 울다 지친 발렌타인을 그녀의 방에 데려다주었다.
그릭슨의 죽음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그녀는 피로감을 못 이겨 깊게 잠들었고.
그런 그녀가 잠든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서리스는 하녀에게 잘 챙겨주라는 말을 남긴 뒤 밖으로 나왔다.
그러는 순간 그의 발걸음을 따라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리스는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춘 뒤 이내 악스판시온을 쥐었다.
채엥!
휘둘러진 검날이 상대의 검날과 맞부딪쳤다.
살기를 듬뿍 머금은 서리스의 시선이 뒤로 향했고, 거기에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깃털 같은 것을 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소매에서 삐져나온 검은 서리스의 검을 정확하게 막고 있었다.
“꽤 위협적이로군. 서리스였나? 반갑다. 또 다른 열쇠.”
처음 자신을 따라오던 발소리에서부터 이미 그의 정체를 꿰뚫고 있던 서리스의 두 눈이 날카로워졌다.
“제파림.”
“날 알고 있었군.”
서리스의 노기 섞인 목소리에도 제파림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그 사실이 서리스의 머리를 차갑게 식게 했다.
제파림은 천하오장성인 그릭슨을 죽였다.
그런 제파림에게 지금의 서리스는 분명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맹목적인 적의는 오히려 용제와 그릭슨의 복수조차 힘들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열쇠야. 반갑구나. 그 어린 몸으로 거기까지 성장하다니. 솔직히 나도 꽤 놀랐다.”
마치 후배를 보는 듯이 웃음 짓는 그 모습에서 서리스는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다른 열쇠들은 얼마 안 가서 죽는 게 대부분이던데. 이번 열쇠는 좀 다른 것 같더군.”
“무슨 일로 여길 온 거지?”
“경고다.”
그리고 그 순간 제파림에게서 모든 웃음기가 사라졌다.
“불터렉스는 내 먹잇감이다. 잘 익은 먹잇감을 그렇게 가로챘으니 선배로서 충고는 해줘야 하지 않겠나.”
제파림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이 스멀스멀 주변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어둠은 서리스조차 한순간 숨을 삼킬 만큼 강대한 것이었다.
놈은 수 세기를 살아가며 세계 침식을 쌓아 자신의 속에 집어삼켜 놓은 것이었다.
용신의 열쇠로서, 그를 위해 세계를 받치고자 그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서리스의 검은별 또한 이에 대항하듯 먹물 같은 어둠을 떨어트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먼저 어둠을 거둔 것은 제파림이었다.
“물론, 오늘은 앞서 말한 것처럼 경고일 뿐이다. 같은 용신 님의 열쇠로서 너무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되겠지.”
그는 다시금 웃음을 머금었지만, 서리스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런, 내가 너무 겁을 줬나?”
그러자 그가 난처한 목소리와 함께 볼을 긁적였다.
“우리 둘 다 용신 님의 구원을 앞둔 이인데 오래도록 봐야지. 걱정하지 마라.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하나, 제파림의 말과 달리 서리스가 집중하고 있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드러난 그의 팔 사이로 검은색 진액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그걸 보자마자 서리스는 알아차렸다.
‘그릭슨 님은 그냥 당한 게 아니야.’
무려 천하오장성인 그릭슨이다.
아무리 상대가 제파림이라고 한들 그런 그가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을 리가 없었다.
그의 팔 일부가 녹아내려 검은 핏물이 흐르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이건 기회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서리스는 조용히 속으로 살기를 갈무리했다.
“일단 나는 일이 바쁘니 다음에 보도록 하지. 만악의 질병에서 일이 좀 있으니까. 너라면 잘 알아들었을 거로 생각한다.”
그 말에는 약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만악의 질병은 자신이 선점했으니 들어올 생각 마라고.
그리 말한 제파림이 아직도 겁에 질린 듯이 보이는 서리스에게 웃음 짓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서리스는 그 즉시 검은색 브로치를 들어 올렸다.
“흑마녀.”
서리스의 부름을 따라 검은색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그 개구리를 손에 올린 채 서리스는 어느 때보다 살기 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제파림을 쫓을 수 있나?”
“……가능해. 제파림이 움직이는 원리도 나랑 같아.”
그러면서도 흑마녀는 대답을 살짝 주저했다.
“하지만 제파림은 강해. 지금의 너로서는 못 이길 거야.”
조언하는 흑마녀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한차례 스산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걱정하지 마라.”
자기 수준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독왕을 죽인 제파림을 상대로 지금의 자신이 어림도 없다는 거야 아까 전부터 잘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서리스는 제파림이 자신의 앞에서 떠나가기를 기다렸다.
제파림은 서리스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파림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건 나 말고도 또 있거든.”
그것도 서리스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이 말이다.
“스타린 님을 부른다.”
제파림에게 한 방 먹여줄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