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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208화 (208/275)

208화

천상하월의 회의가 끝나고, 한 사내가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일렉시즘 드라진.

뇌주(雷主)이자 월하십인 중 한 명인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대회의에서 들은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대파 세계 침식자 녀석들이 저쪽에 붙으면 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가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침공파 세계 침식자들이었다.

그는 월하십인이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은 잠식자였던 것이다.

평생을 소가문으로 살았다.

이제는 이런 삶을 타파하고 싶었던 그는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영역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 증거로 그의 목덜미에서는 검은별의 어둠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그러던 순간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그가 걸음을 멈추며 발을 뒤로 뺐고, 그 타이밍에 맞춰서 얼음이 치솟았다.

닿기만 해도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은 얼음을 보고, 드라진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지금 눈앞의 얼음이 누구의 짓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라진,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뒤에서 들려오는 그 얼음장 같은 목소리는 마치 사신과도 같았다.

드라진의 고개가 서서히 뒤로 돌아갔고, 거기에는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걸어오고 있는 영황 마키나 드페리널이 있었다.

일렉시즘은 예부터 대가문 마키나를 섬기던 소가문.

그렇기에 드페리널은 드라진이 세계 침식자와 손잡은 걸 알고, 처형하러 온 것이었다.

“드, 드페리널 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발뺌할 생각은 마라.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너 때문이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드라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드페리널이 구태여 천상하월에 나왔을 때부터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긴 했다.

그리고 그걸 느꼈을 때부터 자리를 피했어야만 했다.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너희들도 똑같이 세계 침식자와 손잡고 있지 않나, 나를 욕할 권리가 있나?”

이미 들킨 이상 예의 차릴 건 없다고 판단한 걸까.

드라진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드페리널은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풀며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천상사성이라는 위치에 있는 드페리널은 이미 세계 최강의 강자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누가 누구랑 손을 잡던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계 침식자라 할지언정 그에게는 큰 위험이 안되니까.

“약한 이들끼리 손을 잡아 서로를 지켜 보이겠다는데, 내가 뭐하러 욕을 할까.”

그 오만한 말 앞에 드라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저자는 늘 저렇다.

정상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저 오만함을 보며 몇 번이나 낙담했는가.

“하지만 그 약한 이가 내 가문과 연관된 인물이라면 다르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주위로 스산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마키나를 욕보이지는 말아야지.”

그 말이 이어졌을 때, 작렬하는 검은 번개가 드페리널 앞에 내리꽂아 졌다.

일렉시즘의 뇌뢰천성이 검은별에 덧씌워져 새까맣게 변한 것이었다.

“우리 가문을 평생 욕보인 건, 드페리널 바로 너다!”

울분을 다해 외친 드라진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어느샌가 검은 번개로 된 창을 쥔 드라진이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이대로 드페리널의 목을 날려 버릴 속셈이었다.

“최근에 만난 꼬마보다도 못한 수준이군.”

드라진이 전력으로 창을 휘두른 순간, 그의 귓가로 드페리널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솟아오른 얼음의 해일을 앞에 두고, 드라진은 아주 잠시 자기 아들을 떠올렸으나.

그 생각은 얼음의 파도에 덮쳐지며 금세 사라졌지만 말이다.

* * *

그릭슨의 독기를 흡수하고 난 후, 조만간 불터렉스 본가에 찾아가 다른 이들의 독기도 흡수해 주기로 한 서리스는 그라말테에 머무르고 있었다.

세계 침식자 중 침공 반대파들을 끌어들이자는 의견을 낸 게 자신이니,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에이징을 돕기로 한 것이었다.

“……수상할 정도로 사무 일을 잘하지 않나?”

“그런가요? 기본 정도 한다고 보는데 말이죠.”

옆에서 자신을 도와 사무 쪽 업무를 처리하는 서리스를 보며 에이징은 마치 기이한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인들은 아무래도 이런 쪽 일에는 약한 이가 많은데, 서리스는 왜인지 대가문에서 자라며 이런 쪽에도 이골이 난 자기보다 더 사무 일에 익숙한 것 같았다.

사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서리스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무인 쪽 일보다는 사무 업무에 더 집중했었으니.

무너져 가는 가문을 어떻게든 붙들어 보고자 여기저기 자금줄을 알아보고.

없는 자금으로 청림단 관리와 영지 관리라는 지옥 같은 삶을 지금 삶보다도 훨씬 길게 보냈다.

그렇다 보니 무인으로서는 최근에야 경지에 올랐지만, 주 업무였던 사무 일은 이미 오래전에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쪽 서류, 세 번째 문단 끝 문장에 오류가 좀 있어 보입니다. 이러면 나중에 다른 귀족들이 파고들 여지가 있으니 수정해서 올려놓겠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고맙군.”

서리스와 며칠간 사무 일을 함께해본 에이징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너무 유능해서, 영지 사무원으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뇌주가 침공 쪽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은 것이 들켜 영황에게 처형당했다더군.”

“들었습니다.”

서리스가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하자 에이징은 검토가 끝난 서류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 사이에서의 배신이야 종종 있는 일이니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과거 에이징은 남편인 데레비스의 실종으로 실연에 빠져 있을 때, 그 틈을 노리고 접근하던 하위 귀족들을 기억한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다 정리했지만, 그 과정이 꽤나 험난했기 때문인지 뇌주의 배신에도 그녀는 덤덤했다.

“뇌주는 월하십인이지 않으냐.”

“그렇죠?”

“이번에 생긴 그 빈 자리가 욕심나지는 않느냐?”

이어진 질문에는 서리스도 손을 멈추었다.

월하십인.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이자, 엄청난 영광이 보장된 칭호.

실제로 서리스 또한 월하십인이라는 위치에 꿈을 품고 있긴 했다.

무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리지 않는가.

하지만.

“저는 아직 모자랍니다.”

“네가 지금 지닌 영향력만 놓고 봤을 때, 다음 월하십인 자리에서 너만 한 이는 없을 텐데?”

“실력으로 모자란 거죠.”

서리스는 7성 끝자락에 도달하긴 했으나, 아직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흔히들 월하십인의 자리는 8성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일단 기본 조건에서부터 자신이 부족함을 서리스는 알고 있던 것이다.

“아직은 제게 과한 자리죠.”

“자기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나 싶다만. 너라면 얼마 안 있어서 8성에 오를 게 분명하지 않으냐.”

“오히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귀도 막혀 있는 건 아니다. 네 소식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어.”

이미 서리스의 성장은 꿰고 있는 에이징이었다.

이 성장 속도라면 금방 다음 단계로 올라설 게 분명했다.

“그런 평가는 참 감사합니다만.”

서리스는 멋쩍게 웃었다.

“먼저 거기에 오를 사람이 한 명 이미 있긴 해서요.”

그 말을 듣고 에이징은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그게 누군지 알아챈 듯하였다.

“힐로즈인가.”

아크 단장이자 아바리안 힐로즈.

아직은 별다른 별호가 없긴 하나 월하십인에 오른다면 그 또한 별호가 생길 것이었다.

힐로즈는 원래도 월하십인 자리에 줄곧 거론되고 있었고, 이번에 드라진이 죽으며 그 자리가 난 것이다.

“저희 단장님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런 쪽 예의까지 차리다 보면 나중에는 올라갈 자리가 없을 거다.”

에이징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아쉽게도 제가 그렇게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제힘으로 쟁취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도발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에이징 님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천하오장성도 순식간이라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고 에이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가 언젠가 정말로 자신의 자리까지 올라올 것이란 걸 에이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무섭군.”

“세대가 세대니까요.”

정작 세대라 하기에는 서리스만이 유달리 특이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월하십인끼리의 투표로 최종적으로 힐로즈가 월하십인 자리에 오르는 것이 결정됐다.

그 소식을 듣고 아카데미로 돌아온 서리스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며 그를 축하해주었다.

“이야, 이제 아크 단도 어디 가서 어깨 펴고 다니겠다 아이가.”

“그렇지. 단장이 월하십인 정도는 돼야지!”

스타리즈와 빅토르가 신나게 떠들고 있는 사이, 서리스는 힐로즈에게 다가갔다.

그의 월하십인 등극을 축하하는 자리여서인지 워너힐 아카데미의 여러 단원이 찾아와 그를 축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아카데미 동기들인 것 같았다.

“단장님, 축하드립니다.”

서리스가 그에게 인사를 해오자 그를 본 힐로즈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서리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어, 아직 얼떨떨하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입니다. 곧 적응하실 거예요.”

힐로즈에게 덕담을 건넨 서리스는 그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다른 이들과 그가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러자 그의 곁으로 엑스널이 다가왔다.

“서리스 후배, 의외로 욕심을 안 냈네?”

“욕심이라뇨?”

“월하십인 자리, 서리스 후배가 욕심 좀 냈으면 얻을 수 있었잖아.”

그 소리인가.

“사람을 무슨 상도덕도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마십쇼.”

“어라, 아니었어?”

“지금은 상도덕이 좀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네요.”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뽑으려 하자 엑스널은 장난이었다는 양, 손을 내젓곤 이내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 엑스널을 보며 따라 벽에 몸을 기댄 서리스가 입을 열었다.

“엑스널 선배는 워너힐 아카데미 상황을 좀 아시죠?”

“대략은?”

“호라이즌은 어쩌고 있답니까.”

“뇌성 말이지?”

배신자인 뇌주 일렉시즘 드라진은 뇌성인 호라이즌의 아버지였다.

그리 친분이 깊지는 않았는지만, 아는 인물이었기에 서리스도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마 좀 더 뒤틀렸으면 망가졌겠지. 나처럼 말이야.”

한 번, 망아꾼의 입바른 소리에 넘어갈 뻔한 엑스널은 한차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나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이 그런 걸 가만 안 놓아두는 일도 있거든.”

“이바드라군요.”

호라이즌의 동기이자 같은 일곱별인 염성 바르크 이바드라.

그는 호라이즌과 유달리 친하게 지냈었다.

아무래도 이바드라가 호라이즌을 잘 챙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도 조바심에 힘들어하던 녀석이 그렇게 변했나.’

처음 이바드라를 만났던 날을 회상한 서리스는 다시금 모두가 성장하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의 눈에 파티장 입구로 급히 들어온 한 인물이 보였다.

그와는 잘 아는 사이였기에 서리스는 엑스널에게 양해를 구하곤 곧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발광, 무슨 일 있어?”

급하게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서발광이었다.

그는 서리스를 발견하곤 굳은 얼굴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서리스…… 독왕님께서 돌아가셨어.”

그리고 상황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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