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회의는 이후 에이징의 주도하에 다시금 진행되기 시작했다.
서리스가 한 역할은 어디까지나 참고인으로서 상황 보고와 함께 에이징의 제안을 설득시키기 위함일 뿐.
그로서는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이런 식의 회의들은 죄다 머리 아프단 말이지.’
사람과 사람이 하는 회의이다 보니 죄다 다른 생각을 하는 터라 의견 충돌은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귀찮긴 해도 사전 작업을 좀 해놔야 이야기가 수월하게 진행된다.
‘나는 왜 이런 정치질에서 멀어질 수가 없는가.’
서리스의 진지한 고찰은 한동안 이어졌지만, 그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힘들 때 쌓았던 경험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긴 하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었다.
사람 관계는 원래 속고 속이는 게 일상인데 인제 와서 있던 능력을 안 써먹는 것도 웃기긴 했으니 말이다.
“그럼 일단 결론은 저 신왕이 책임을 지며, 세계 침식자 쪽 조력을 받는 것으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밤중까지 이어진 천상하월 대회의가 겨우 끝났다.
아무리 서리스가 밑밥을 깔아 놨다고 해도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는 일이다.
당연히 여타 여러 갈등이 발생했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오랜 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의견을 제시한 에이징 쪽이 감당하기로 하였다.
애초에 그녀가 남편인 은신사 데레비스를 인류의 편으로 인정받게 하고 싶은 이상.
세계 침식자 중에서도 우리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은 물론 크라페까지 같이 부정당해 버린다.
새로운 것을 제안한 이는 그로부터 발생할 문제점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의견 자체를 제시한 것은 서리스였긴 하나 이제 에이징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 서리스의 눈이 아주 잠시 월하십인 중 한 명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드페리널 또한 그를 보고 있단 걸 알았기에 서리스는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저쪽은 저쪽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리 판단한 서리스는 회의장을 나가는 에이징의 뒤를 따랐다.
“책임을 전부 혼자 떠맡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서리스의 물음을 듣고 에이징은 한차례 웃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어린애의 걱정을 들은 듯이 미소 짓던 그녀는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내 아들의 친구에게 책임을 지게 하겠느냐?”
아무리 서리스가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강하다 하더라도 에이징의 눈에 비친 그는 아들의 동갑내기 친구일 뿐이었다.
물론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지게 할 만큼 몰상식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 남편의 일이다.”
에이징은 자신을 따라 걷고 있는 남편의 손을 소중히 감쌌다.
“아내 된 사람으로서 내 남편을 증명하는 일에 책임조차 못 지면 어쩌겠느냐.”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 오직 피로함만이 가득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더없는 행복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순간은 역경이 아닌 가정을 되찾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서리스는 잠시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음의 가치를 느꼈다.
‘뭐, 어차피 내게는 나중의 일이지.’
조금 먼 미래를 잠시 떠올려 봤던 서리스는 둘에게서 눈을 떼곤 창문 너머, 반대편 복도를 걷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독왕 불터렉스 그릭슨.
그의 문제를 해결할 때가 드디어 왔다.
* * *
회의가 끝나고,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온 그릭슨은 뻐근한 목을 풀었다.
그는 마왕이 차례로 각자의 가문으로 옮겨주기 전까지 배정받은 방에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이런 거로 피로감을 느끼다니…… 나도 늙긴 늙었군.’
이제는 백발이 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릭슨은 천하오장성에 오른 인물이긴 하나 환골탈태를 겪지는 못했다.
이 세상에서 환골탈태를 이룬 이는 삼무제를 제외한다면 천상사성과 검왕, 신왕, 마왕으로 총 7명.
같은 천하오장성인 그릭슨은 환골탈태에 이루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환골탈태를 이룰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그걸 이루지 못했다.
불터렉스에 있어서 천추의 한이라 할 수 있는 최흉 만악의 질병의 독기.
그 독기가 너무 많이 쌓여버린 그릭슨의 몸은 환골탈태를 이루기 힘들었다.
독기를 전부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그는 이 노쇠한 몸과 함께 죽을 것이다.
‘내게 남은 수명은…….’
아마 그리 길지는 않을 테지.
선대가 죽어 별이 되었듯이 자신 또한 가문의 별에 깃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그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불터렉스가 짊어진 짐이 있었기에 그들은 대가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여태껏 그 명맥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그저 후대에서도 자신과 같은 일이 반복되며 자손들의 발목을 잡을 것임을 알기에 답답할 뿐이었다.
당장 서리스만 봐도 그렇다.
저 난놈은 그대로 성장해 펜타니엄의 위세를 엄청나게 떨칠 것이 분명했다.
불터렉스와 펜타니엄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불터렉스는 만악의 질병의 독기를 평생 지녀야 하는 만큼 일정 경지 이상의 무인이 탄생하기가 어렵다.
서리스를 필두로 가파르게 성장할 펜타니엄을 상대로 과연 자신이 없는 불터렉스가 버틸 수 있을까.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가문 사이에는 이런저런 정치적 문제가 계속 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인데 말이다.
그의 여동생인 윈터는 사랑스러운 손녀 발렌타인을 서리스에게 시집 보낼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만.
손녀를 너무 아끼는 그릭슨은 어느 누가 와도 발렌타인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불터렉스를 위해 발렌타인을 떠나보낸다는 생각까지 하는 그였다.
‘역시.’
독기를 흡수해 줬다던 그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아야 할까.
고민에 빠져 있던 그릭슨의 기감에 누군가 복도를 걸어 이쪽으로 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척은 오늘 자신이 쭉 노려보고 있던 그놈이었다.
‘허어.’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다니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릭슨은 인상을 우그러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
그 순간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혀를 찬 그릭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다시 봐도 별 하나는 진짜 타고난 놈인 그를 보고 그릭슨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서리스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쉬고 계셨습니까?”
“이제 막 쉬려고 했었지. 늙은 몸은 쉬어주지를 않으면 고장 나니까.”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서리스는 죄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의 바르게 구는 척하는군.’
그의 모든 행동이 눈에 거슬렸지만, 서리스를 내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대회의가 있던 마당이다.
그게 끝나자마자 바로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였다.
“들어와라.”
그릭슨이 안으로 들어서자 서리스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안쪽에 갖춰진 소파에 털썩 앉고는 맞은 편에 앉은 서리스를 보며 물었다.
“사설은 필요 없다. 본론부터 말하도록.”
쉬는 시간을 방해받은 만큼 이야기를 길게 들어줄 생각이 없음을 그가 내비치자 서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터렉스의 독기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서리스의 입이 열린 순간 그릭슨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걸 서리스가 언급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알지?”
독기는 불터렉스의 비밀과도 같은 것이다.
불터렉스 자체가 폐쇄적인 성향이 있기다 하고.
불터렉스 입장에서는 약점과 같은 것을 구태여 밖에 알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밀을 서리스가 알고 있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저는 독기가 눈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보인다고?”
독기는 만악의 질병에 있는 세계 침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독기가 보인다니?
그릭슨 입장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예, 그리고 그 독기를 해독하는 것도 이제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를 우롱하려는 것이냐?”
독의 전문가인 불터렉스가 평생을 바쳐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독기다.
갑자기 나타난 서리스가 독기의 해결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걸 그가 쉽사리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릭슨이 이럴 것이란 걸 서리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내밀었다.
“잠시 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릭슨은 그가 미심쩍었지만,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서리스가 날고 긴다고 한들 그와 그릭슨 사이에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정도의 실력의 격차가 존재했다.
아직 월하십인에도 들지 못한 서리스이기에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대처가 가능했다.
그러니 순순히 손을 내밀어 서리스와 맞잡은 그 순간이었다.
손끝을 타고 몸 안을 가득 메웠던 탁한 독기가 일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릭슨의 두 눈이 부릅떠지자 서리스는 손을 바로 하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지금 행동으로 서리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릭슨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불터렉스가 평생을 바쳐도 해결 못 한 독기를 서리스가 한순간에 해독했으니.
당연히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이건 그 세계 침식자라는 놈과 같은 힘이지 않나.’
서리스가 한 건 분명 정화가 아니라 흡수와 유사했다.
자신들과 거래하러 왔던 인물과 같은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을 어디서 얻었느냐.”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역시 이 힘의 출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서리스 또한 자신을 찾아온 세계 침식자를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아챈 그릭슨은 눈가를 잠시 짚었다.
“그자는 세계 침식자였다. 너도 혹시 놈들과 관련되어있는 게냐.”
대회의에서 세계 침식자를 신왕과 같이 옹호한 것도 그렇고.
서리스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것을 그릭슨은 눈치챘다.
“저는…….”
“아니, 듣지 않겠다.”
하지만 그릭슨은 그가 말하려는 것을 멈춰 세웠다.
대신 양 무릎을 짚고 서리스에게 물었다.
“발렌타인,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릭슨이 뜬금없는 걸 묻자 서리스는 말을 멈추곤 잠시 침묵했다.
그릭슨의 눈동자에 깃든 깊은 애환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관계를 계속 쌓아 가고 싶은 그런 친구요.”
서리스가 솔직하게 답하자 그릭슨은 기다랗게 숨을 내뱉곤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을 보고 서리스가 멈칫하자 그릭슨은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여 이렇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딱 하나만 이렇게 내가 고개 숙여 부탁하마.”
그릭슨의 목소리에는 진솔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대로면 발렌타인, 그 아이의 몸에도 언젠가 독기가 쌓일 것이다. 그 아이에게 쌓인 독기를 네가 해결해 주겠다고 약조하면, 나는 네가 무슨 제안을 하든 받아들이겠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천하오장성과 독왕이라는 이름을 걸고, 그는 불터렉스의 태상가주로서 맹세했다.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잠시 침묵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정말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
“그럼 제 사촌 형인 펜타니엄 칼릭스가 어떻게 독왕 님의 독을 입수할 수 있었는지 좀 알아봐 주십쇼.”
“그리고?”
“그것뿐입니다.”
그릭슨은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것뿐이라니.
그 정도는 서리스도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일 텐데?
“조금 전, 제가 발렌타인 님과 친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친구네 할아버지가 하는 부탁을 들어드리는데, 뭐 그리 많은 걸 바라겠습니까. 거기다 그 부탁 자체도 친구를 위한 것인데요.”
그릭슨은 한차례 눈을 깜빡이었다.
“아, 물론 독왕 님과 불터렉스의 독기를 지워 드리는 건 별개입니다. 대신 저와 같다던 세계 침식자의 정보를 좀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쫓고 있는 놈이라서요.”
능청맞은 웃음과 함께 서리스가 그리 말하자 그릭슨은 맥 빠진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정말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타난 걸까.
정말로 불가사의한 놈이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불터렉스는 앞으로 다시 없을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발렌타인, 그 아이를 친구로 생각한다고 했느냐?”
“예, 그렇죠.”
“그럼 아내로 삼아라.”
그리고 이번에는 서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아이는 어차피 네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니.”
그릭슨의 마음속에서 얼떨결에 손녀사위로 인정받아 버린 서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