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드페리널의 깜짝 등장 이후 서리스는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그가 이 자리에 등장할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을 깨고 나타난 드페리널이 한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들에게서 처음으로 부탁받았다. 이번 회의에서 네게 힘을 좀 실어 달라더군.”
“……선배가 말입니까?”
설마 엑스널이 그런 행동을 했을 줄이야.
이번 대회의는 세계 침식자와 관련 있기에 아크단도 아예 연관이 없지는 않았던 만큼.
서리스는 힐로즈에게 대강 이야기를 전해 놓았다.
그래서 힐로즈 또한 다른 단원들에게 귀띔해놓았고.
다름 아닌 엑스널이 그걸 듣고 드페리널에게 간청한 것이다.
대회의에 서리스도 함께 참가하니 그의 의견에 힘을 좀 실어달라고.
아무리 서리스가 날고 긴다 한들 그는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를 대표하는 강자인 천하오장성과 월하십인이 모인 자리에서 루키인 서리스가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이번 회의에 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신왕과 은신사를 다시 이어주는 일에 직접 관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을 턱이 없고, 그는 기껏해야 상황 전달용으로 쓰이고 끝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번 상황을 현재까지 주도해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서리스다.
그가 자기 의견을 제대로 피력조차 못 하면 안된다고 판단한 엑스널은 자신의 아버지인 드페리널에게 직접 간청한 것이었다.
천상사성인 영황을 움직인 상황.
엑스널은 입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망설였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서리스에게 모든 걸 추월당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변해야 한다.
그렇기에 마키나 가문에 떳떳해야 하고, 가주인 드페리널 앞에서도 의견을 당당히 밝힐 수 있을 정도로 강심장이어야 했다.
그런 엑스널의 변화를 체감한 드페리널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엑스널은 이러나저러나 뮤리널을 포함해 가주를 이을 자 중 한 명이다.
그런 그의 성장은 가문의 발전에도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 고개를 숙이기만 해서는 성장하지 못하기에 드페리널은 이번 상황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눈치챈 서리스가 드페리널을 올려다보았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드페리널 또한 어느 정도 계산하고 움직인 행동인 셈이었다.
게다가 그가 말했듯 펜타니엄과 마키나의 사이가 슬슬 원만해질 때가 됐다는 말에는 이런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
서리스는 누가 뭐래도 펜타니엄을 대표하는 루키 중 한 명이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버렸네.’
영황인 드페리널이 회의에 참여하여 서리스와의 친분이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의 발언을 섣불리 무시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나중에 엑스널에게 감사 인사를 해두자고 생각한 서리스는 회장 안을 감도는 정적을 느꼈다.
드페리널의 등장이 상상 이상에 충격이었는 듯, 모두가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삼 천상사성이라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는 순간 또 다른 손님 두 명이 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은 서리스와 같은 머리카락 색이나 칼릭스와 많이 닮은 얼굴.
그는 바로 서리스의 삼촌이자 검왕이라 불리는 펜타니엄 렐리즈였다.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소가문 회의할 때, 그는 부가주로서 종종 참여했었으니 말이다.
또 다른 한 명은 다름 아닌 락스카였다.
그도 월하십인이니 회의에 참여하러 온 것이었다.
그 순간 렐리즈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드페리널 때와 같이 그는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펜타니엄 가문 사람치고 꽤 사나운 인상인 그를 마주한 서리스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 가주님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되었다.”
그는 격식을 딱히 차릴 필요 없다는 듯이 말하곤 서리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칼릭스가 또 여러 수작을 부리던 모양이더군.”
설마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서리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칼릭스는 직계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할 테니.”
그리고 이어진 말을 듣고 서리스는 칼릭스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어째서 가주 자리에 마지막까지 도전 못 했었는지를 떠올렸다.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친부인 렐리즈 때문이었다.
렐리즈가 직접 칼릭스가 벌여온 일들을 밝히며 그를 자기 손으로 처형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미 칼릭스가 벌이던 일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거였나’
그렇다면 자기 아들이 벌이고 있는 일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는 무엇일까.
서리스는 이를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어차피 칼릭스와 렐리즈 사이에 있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에 와서는 칼릭스의 모든 계획을 서리스가 망쳐 버린 상황인 만큼 그는 칼릭스가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애초에 서리스는 펜타니엄 가주 자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리 말한 렐리즈가 떠나가자 락스카가 다가왔다.
몇 달 만에 본 그는 그때 만났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많이 변했군.”
그러나 그와 마주한 서리스는 무척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는 곧 8성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정말 경이로울 정도의 성장 속도였다.
“제게 곧 따라 잡히실 거 같지 않습니까?”
서리스가 가벼운 도발을 날리자 락스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아직은 아니다.”
저리 쉽게 단언하는 것을 보니 진심이겠지.
그의 강인함이 또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숭상하며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조금은 흔들릴 법도 한데.’
왜 그가 마지막까지 펜타니엄 가주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며 평가받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성격부터 시작해서 검황 락로드와 닮은 구석이 무척이나 많았으니까.
‘하여튼…… 이렇게 도발해도 무미건조한 반응뿐이라니까.’
제로 녀석이었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내년이면 제로와 샬롯이 워너힐 아카데미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올 시기다.
샬롯이야 그렇다 쳐도 제로는 얼마나 성장했을지 조금 궁금했다.
이번 생에서 가장 많이 바뀐 건 제로라 할 수 있으니 기대해 봐도 좋겠지.
“모든 인원이 모였으므로 회의실로 이동하겠습니다.”
그사이 회의를 참가하기로 한 모든 인원이 도착했다.
세계 정상급 실력자들의 집합.
하나같이 대가문이나 최소 소가문의 가주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세계 정상급 실력자들조차 세계 침식자를 상대로 개인의 무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손과 발은 4개밖에 되지 않는다.
침공파 쪽 세계 침식자가 잠식자와 조력자들을 이끌고 전쟁을 터트리면, 인류가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가 너무 클 것이다.
서리스는 그 피해를 줄이고 싶었기에 이 자리에 왔다.
“반갑습니다. 이번 천상하월 대회의를 소집한 그라말테 세라 에이징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대가문의 가주답게 그녀는 간단명료하게 이번 회의가 열린 이유를 알렸다.
최근 세계 침식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며, 그들이 침공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접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질문 있으신 분 계십니까?”
에이징이 잠시 말을 멈추자, 손을 든 것은 염호 바르크 바그닐이었다.
“침공 쪽 정보를 얻었다고 들었소만. 세계 침식자들에게서 어찌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그가 질문을 하자 에이징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제 남편에게서입니다.”
“남편이라 하면 혹시 오래전에 사라졌다던…….”
바그닐은 물론 다른 이들도 그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눈치였다.
에이징이 과거 자기 남편을 찾고자 세계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닌 것은 꽤 유명한 일화였기 때문이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에이징의 눈이 문 쪽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지만, 영황 드페리널과 검왕 렐리즈만이 그녀 쪽을 보고 있었다.
“제 남편은 이미 이 회의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에이징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천하오장성들이 먼저 반응했다.
“세계 인식 자체를 넘어섰네?”
제일 먼저 마왕 아라만이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세계 침식자 은신사로군.”
암왕 살롱이 잇따라 반응하고, 독왕 그릭슨이 뒤늦게 혀를 차 보였다.
에이징의 뒤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었다.
은신사.
세계 인식 자체를 피해 버리는 터무니 없는 은신 기술을 가진 그는 일부 천하오장성의 눈조차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왕님, 지금 저분이 남편이라고 말씀하신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렇기에 모두의 시선에 적의가 담기기 시작했다.
에이징은 지금 세계 침식자인 은신사가 바로 자기 남편이라고 말하였다.
에이징이 자기 입으로 직접 진실을 밝혔기에 다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지.
그들은 에이징이 아니었다면 그 즉시 은신사를 죽이고자 움직였을 것이다.
무려 천하오장성과 월하십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 속.
일반인이라면 혼절을 해버렸을 이 공간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제가 감히 이 자리에서 입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이 살얼음판 속에서 용감하게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줄곧 에이징의 옆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조용히 있던 그가 입을 연 것이다.
“애들이 낄 자리가 아니다.”
“왜? 이야기 정도는 들어 볼 수도 있지. 이번 일에 꽤 관여를 많이 한 친구잖아?”
그릭슨이 조용히 경고하자 아라만이 싱글벙글 웃으며 서리스 편을 들어 주었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는 것만 봐도, 꼭 해야 할 이야기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살롱 또한 덩달아 서리스를 편들어주자 그릭슨은 둘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이 둘은 아무리 봐도 지금 저놈이 나중에 대성할 게 보이니까 미리 침 발라 두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짜증 나지만 지금 당장 서리스에게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월하십인에 육박한다.
저놈은 검치 락스카가 이뤄낸 최연소 월하십인 타이틀을 또 새롭게 갱신할 게 분명했다.
“그릭슨 오라버니, 저도 저쪽에 동의합니다만?”
제 편을 들어줘야 할 독후 윈터마저 실실 웃으며 이리 말하자 그릭슨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타인을 꼬아낸 놈이지만, 얼마 안 가 이 자리까지 치고 올라올 서리스였다.
에이징이 서리스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 보면 그가 이 회의에 꼭 필요하다는 소리겠지.
“자네가 내 손녀딸이랑 나이가 비슷한 나머지 그만 엄하게 굴었군. 무례를 사과하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으시죠.”
무려 독왕이 직접 자기 입으로 사과했다.
애초부터 그와 맞설 생각이 없었던 서리스는 느슨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우선, 이번 회의 개최를 에이징 님께 요청한 것은 저였습니다.”
이제 막 스무 살밖에 안 된 청년.
거기다가 그라말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펜타니엄 직계.
그런 서리스가 천상하월 대회의를 열어달라고 제안한 것을 에이징이 받아들인 시점에서.
서리스는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낸 셈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몇은 그제야 그걸 인지했다.
그냥 스무 살 청년으로만 보기에는 그가 보인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앞에서 에이징 님이 말했듯이 세계 침식자 쪽 침공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다름 아닌 에이징 님의 아들인 그라말테 세라 크라페를 노린 망아꾼을 통해서였습니다.”
서리스는 천천히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해나갔다.
망아꾼이 거래를 제안했다는 것은 제외하고.
그는 이야기를 끼워 맞추며 정보를 입수하는 과정을 그럴듯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세계 침식자 쪽에는 현재 침공 반대파가 있으며 그쪽에서도 이번 일에 협조하겠다고도 이야기하였다.
당연히 이 이야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모두가 이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무려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자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리스는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일부러 에이징의 뒤편에 서서 이야기했다.
만약 이 제안을 에이징이 했다면 그녀가 남편인 은신사를 너무 믿어 미쳐 버렸을 거로 생각해 반대했을 것이다.
혹은 서리스가 이 제안을 주도적으로 했다면 나이도 어린 그가 너무 과한 망상을 지녔다고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두 가지 사항이 전부 해당하지 않는다.
에이징과 은신사의 관계에 제삼자인 서리스가 나서서 발언한 시점에서.
에이징은 은신사의 말만 믿고 행동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서리스는 신왕이라는 천하오장성의 입을 빌려 이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는 만큼 그의 발언은 곧 신왕의 의견이라는 소리다.
파고들면 걸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회의에서 트집을 잡아 비꼬아 봤자 정치적으로 얻을 건 없었다.
당장 이 문제는 세계 침식자의 침공이라는 인류 존속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
그리고 서리스는 그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지금 자기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젊은 능구렁이 한 마리가 아주 꿀떡꿀떡 담을 넘어오는구나.’
이 순간 모두가 서리스를 보며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