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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205화 (205/275)

205화

며칠 뒤, 은신사 데레비스는 약속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라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랜만에 그라말테를 방문한 그는 무척이나 어색해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한 번씩 와보기는 했었지만.’

크라페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후로 가족들 앞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그다.

그렇기에 데레비스도 이런 상황은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크라페와는 어떻게 오랜 골을 조금은 메꿨다고는 하나 에이징에게 있어 자신은 말도 없이 가족을 떠난 남편이다.

그녀 앞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던 은신사는 집 안으로 좀처럼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만 계속 서성였다.

끼익―

그러던 순간 갑자기 정문이 열렸다.

흠칫한 데레비스가 안쪽을 보자 거기에는 크라페가 서 있었고.

그는 데레비스를 보더니 자기 머리를 한차례 긁적이었다.

“들어오세요.”

먼 거리에서도 냄새로 상대를 구분하는 크라페다.

그러니 데레비스가 왔던 걸 진작 알고 있었고, 그가 들어오지 않는 사실에 결국 먼저 나선 것이다.

아들이 문을 열어준 만큼 데레비스는 멋쩍은 표정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 끝에 서 있던 서리스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야기는 잘되신 모양이군요.”

“……일단은. 물론, 반대하는 이들도 있긴 하나, 세계 침식자는 원래도 그리 협조적인 성격이 아니니 찬성하는 이들만 움직이기로 했네.”

그것만 해도 인류 측 전력은 확실하게 올라간다.

세계 침식자야말로 세계 침식자를 상대하는 법을 가장 잘 알 테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크라페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둘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에이징은 많이 화내지 않던가.”

그러는 순간 뒤따라 걷던 데레비스가 서리스에게 물었다.

차마 크라페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인 듯하였다.

그런 데레비스를 보고 한차례 볼을 긁적인 서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버리면, 사실 누구든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할 말이 없군.”

데레비스는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에이징과 크라페에게는 정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걸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잘해주면 되겠죠.”

서리스가 그리 말해주는 사이 크라페는 에이징의 방 앞에 도착하였다.

크라페가 방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쪽에서 에이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만으로 데레비스는 다시금 긴장했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데레비스는 자신이 본 광경에 입을 벌렸다.

거기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이징이 서 있었다.

오래전 그와 식을 올릴 때 입었던 드레스를 아직도 고이 간직해 온 그녀는 그때 그 차림 그대로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환골탈태를 겪은 무인 중 한 명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녀의 외모는 예전과 똑같이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데레비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크라페.”

서리스가 크라페를 조용히 부르자 크라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둘이서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인가 에이징과 둘이서만 남게 된 데레비스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당신은 예전부터 잔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지.”

그렇기에 에이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안도 많고, 딴생각도 많고, 그런 주제에 사람은 좋아서 나를 종종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어.”

오랜만에 본 아내는 첫 만남 때와 같이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좋아했어. 가문에서 평범한 남자와 결혼한다며 반대를 해도 힘으로 눌러주면서 말이지.”

“……에이징.”

“당신은 내 사랑이 그렇게나 작아 보였을까? 세계 침식자라는 이유로 내가 당신을 내칠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강인했던 그의 아내는 통보 없는 이별로 인해 무척이나 약해져 있었다.

천하오장성이라는 수준 높은 무인이라고는 하나 에이징 또한 사람이다.

그녀는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을 잃었음에 괴로워했다.

오죽하면 그 과정에서 그라말테의 다른 귀족들이 숨겨둔 욕심을 드러내며, 이권을 나눠 먹겠다고 설쳤겠는가.

“아니지. 당신은 예전부터 내 사랑을 의심하기보다는 가족을 걱정했겠지.”

그리 말한 에이징은 데레비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오래전 이별했던 남편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세계 침식자와 관계된 배신자라고 우리 두 사람이 손가락질받기를 당신은 바라지 않았겠지. 알아. 다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떠나지 말기를 바랐어.”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며 데레비스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품 안에 더 끌어안는 것밖에 없었다.

“미안해.”

비록 지금은 사과밖에 할 수 없을지라도.

데레비스는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것을 사죄하였다.

이런 사과조차 안 하면 가슴을 옥죄는 죄책감에 숨을 못 쉴 거 같았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사죄함으로써 자기 잘못을 책임지고 싶었다.

그렇게 에이징은 떠났던 남편의 품에서 오랜만에 아내로서 담아왔던 눈물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어머니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크라페는 복도 창문에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리스.”

“어.”

크라페의 부름에 서리스가 답하자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밀이란 건 뭐야.”

뜬금없는 질문에 서리스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이내 피식 웃었다.

“상대를 너무 아껴서, 무심코 마음속에 담아 두는 말이 비밀이란 거다.”

서리스는 어려운 것 없다는 양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비밀로 상처 입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지. 원래 그런 법이야.”

“…….”

크라페는 서리스의 말을 이해한 건지 모를 표정으로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에이징의 울음소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이내 방문이 열렸다.

“어디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꾸나.”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에이징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어느 때보다도 강렬히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신왕 그라말테 세라 에이징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 * *

천상하월.

특수한 상황 발생이 아니라면 개최할 일이 없는 대회의를 신왕이 건의했다.

회의의 주제는 세계 침식자가 대대적인 인류 침략을 준비 중에 있다는 것.

세계의 존망이 걸린 상황인 만큼 이번 대회의는 오직 그에 상응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만 그 소식이 전해졌다.

회의 장소는 그라말테가 담당하였고.

이동의 경우 마왕 아라만이 협조해주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때아닌 대회의 개최에 세계 정상급의 인물들이 속속히 모여드는 상황.

그렇게 회의장을 찾은 인물 중에는 독왕 불터렉스 그릭슨도 있었다.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이라.’

최근 불터렉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떠올린 그릭슨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불터렉스 안에서 세계 침식자와 거래를 하는 인물들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자신의 직속 자객들이었던 독수까지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을 바로 처형할 생각이었던 그릭슨이지만, 그들의 사정을 듣고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불터렉스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불터렉스는 줄곧 최흉 중 하나인 만악의 질병을 막아왔다.

만악의 질병을 막는 과정에서 불터렉스의 직계들은 어쩔 수 없이 몸 내부에 독기가 쌓일 수밖에 없었고.

그건 불터렉스의 가문비기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때문에 불터렉스 직계들의 수명은 극단적으로 짧은 편이었다.

천하오장성인 그릭슨이니까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거지.

그조차도 날이 가면 갈수록 몸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세계 침식자가 그들의 몸 안에 쌓인 독기를 흡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죽어가던 이가 내부의 독기를 배출함으로써 완치된 일도 있었다.

그릭슨의 직속인 독수들이 세계 침식자와 접촉한 것도.

주군인 그릭슨의 몸에 있는 독기를 어떻게든 해결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릭슨은 그들의 거래 상대가 세계 침식자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차마 내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괜찮다.

하지만 자식들과 그보다도 더 아래 손녀와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와의 거래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자식이 단명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세계 침식자와 전쟁이라…….’

그릭슨 입장에서는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릭슨 님, 어서 오십시오.”

그러는 순간 그는 공간 이동을 넘자마자 보이는 시중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회장으로의 안내를 부탁했다.

회의 시작은 2시부터다.

마왕이 참가 의사를 밝힌 인원들을 한 명씩 데려오고 있는 만큼 회의 참가자가 한 번에 다 모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일찍 온 인물들은 회의장 입구 앞에 준비된 장소에서 잠시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시중을 따라간 곳은 탁 트인 장소에 여기저기 음식들이 차려진, 전형적인 홀이었다.

2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 만큼 그릭슨이 안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아는 얼굴이 제일 먼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릭슨 오라버니, 이거 참 오랜만에 뵙네.”

“윈터냐.”

독후 불터렉스 윈터의 인사에 그릭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월하십인인 그녀다 보니 이곳에 초대된 것이었다.

“최근 본가 쪽이 좀 시끄러운 거 같던데, 독왕의 명성도 이제 한물 갔나 봐?”

“워너힐 아카데미에 있는 녀석이 무얼 안다고.”

“거기 있는 나한테까지도 소식이 들려왔단 거 아니겠어?”

윈터가 장난스럽게 귀를 톡톡 두드리자 그릭슨은 가볍게 혀를 차 보였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는 여동생이건만 예나 지금이나 태도가 가벼운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릭슨의 눈에 어딘가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그릭슨은 서서히 눈썹을 일그러트리기 시작했고, 윈터도 그의 반응을 통해 누굴 말하는 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윈터, 저놈이 왜 여기 있지?”

그릭슨이 바라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천하오장성, 월하십인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 풋내기 서리스가 이 장소에 있다는 것이 의아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릭슨의 반응은 그것과는 달랐다.

손녀인 발렌타인이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그였기에 꽁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윈터는 그런 그릭슨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기쁘게 웃었다.

“아, 그릭슨 오라버니도 서리스를 알고 있는 모양이지? 잘됐어. 저 아이를 어떻게든 발렌타인과 이어주고 싶은데 말이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 말을 듣자마자 그릭슨이 질색하듯 외쳤다.

그러자 그런 그를 윈터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릭슨 오라버니, 설마 저 아이가 요즘 뭐라 불리는지는 알고 있겠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하아, 손녀 사랑은 알겠다마는, 그릭슨 오라버니, 그래도 독왕이라는 사람이 귀를 막고 살면 안 되지.”

그녀가 그리 말하는 사이 암왕 윌즈베르크 살롱이 시중의 안내를 받으며 나타났다.

그릭슨이 그를 보고 있자 살롱은 잠시 그릭슨과 눈인사만 나눈 뒤 서리스를 보곤 대뜸 그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인 듯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암왕이 왜 저놈한테?”

“그야, 사위로 점찍어 두려는 게지. 암왕도 딸이 있으니까.”

그릭슨이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자 윈터는 쯧쯧 혀를 차며 말해주었다.

그 사이 서리스의 앞으로 유명인사들이 속속히 모여들었다.

염호 바르크 아그닐과 대화하기도 하고, 이번 회의의 주체자인 에이징이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거기다가 마왕 아라만은 그와 무척이나 친근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릭슨의 눈에 더더욱 의아함이 깃들었다.

천하오장성과 월하십인 중 다수의 인물이 그를 무척이나 친숙하게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순간 한 인물이 시중의 안내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 인물이 등장하자마자 회장 안은 한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영황 마키나 드페리널.

천상사성인 그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영황이 왔다고?’

천상하월 회의는 명목상 그 참가자에 천상사성이 포함되어 있긴 하나.

천상사성들은 그 회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 한마디가 워낙 파급력이 큰 만큼 그들의 말이 곧 회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천상사성들은 대리인을 보내 회의 내용을 보고받는 거로 끝내고, 직접 참가하지 않는 게 나름의 관습이었다.

그러니 천상하월 회의에 등장한 드페리널을 보고 여기 모인 모두가 당황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드페리널은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더니 이내 서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숨죽이고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사이 드페리널이 서리스에게 무어라 말했다.

서리스가 그에게 답하자 드페리널은 이내 자기 턱을 매만지더니 그의 어깨를 툭 두드리곤 구석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회장 내의 모두가 경악한 것은 당연했다.

“이제 좀 알겠어?”

그리고 그건 그릭슨 또한 마찬가지였고, 윈터의 발언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는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몇 년 전에 본 꼬맹이가 터무니없는 거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과.

‘그래도 발렌타인은 안된다!’

자기 손녀딸을 지키고 싶은 할아버지로서 마음을 강렬하게 부딪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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