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천하오장성이라는 위치에 오른 만큼 신왕 그라말테 세라 에이징은 세계 정상급 무인이다.
그런 그녀가 과연 은신사의 정체를 몰랐을까?
서리스는 단연코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천하오장성은 동전 따먹기로 얻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하물며 그냥 지나가며 본 것도 아니고, 매일 옆에서 함께 살았을 남편의 정체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 점을 지적하자 은신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애써 외면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게 두려웠겠지.
그는 세계 침식자이고, 세계 침식자는 인류의 적이었으니까.
“크라페, 신왕님께서는 네 아버지를 아직 기다리고 계셔?”
서리스가 크라페를 돌아보며 묻자 은신사는 이제야 그쪽을 돌아 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건 은신사 입장에서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아들의 얼굴은 은신사에게 있어 또다시 말문을 막히게 하였다.
크라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평소 감정 없이 나른한 표정을 짓고 다니기 일쑤인 그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응.”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은신사의 굳건한 결심을 무너뜨렸다.
“어머니도 나도, 모두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
그가 떠난 십오 년 전부터 크라페와 에이징은 줄곧 은신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라페가 그를 지금까지 찾아다닌 것만 보아도 그 답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미안하구나.”
은신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서리스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는 의미였다.
* * *
은신사는 그 뒤로 우선 반대파 쪽에 이야기해 보겠다고 말해왔다.
자신이 찬성해도 반대파 다른 이들이 거절한다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시일 내로 답을 내주기로 한 그를 보고 서리스는 곧장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그라말테 세라 에이징과 직접 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었다.
은신사 쪽에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아직 모른다.
한쪽만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크라페, 에이징 님을 설득하는 데는 네 힘이 필요해.”
누가 뭐라 해도 서리스는 크라페네 가족 일에 끼어들 수 없는 외부인일 뿐이다.
은신사의 경우에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그를 납득 시키기 좋을 거라는 판단을 해서였지만 에이징의 경우에는 크라페가 더 알맞았다.
그런 서리스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줘.”
크라페는 꽤 믿음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은신사를 만났던 것이 그에게 있어 엄청난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었다.
은신사를 만나고 나서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것이 어느 정도 풀린 듯한 크라페를 보고 서리스는 안도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려고?”
그라말테까지 가려면 비룡을 타도 꽤 시간이 걸린다.
그 부분을 언급하며 크라페가 의문을 보이자 서리스는 한차례 헛기침하였다.
어차피 세계 침식자와 손을 잡기로 한 마당이다.
오히려 크라페에게 있어서는 서리스가 은신사에게 친근하게 굴 수 있었던 부분을 어느 정도 납득하게 해줄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럴 거로 믿고 서리스는 크라페에게 자신들이 이동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흑마녀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쩌다 보니 흑마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침공파를 막아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지녀서 협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크라페는 흑마녀에게 서리스와 같이 습격 당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런 만큼 그가 이를 쉽사리 납득 해줄지 의문이었지만 크라페는 의외로 손쉽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랬구나.”
“……더 안 물어봐?”
“뭐 하러?”
크라페는 오히려 자기 쪽에서 의문을 보였다.
“나는 널 믿어.”
그리고 돌아온 말을 듣고, 서리스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이렇게 사람을 쉽게 믿어서 어쩔는지.
“고맙다.”
“너도 날 믿었잖아.”
크라페 입장에서 서리스는 세계 침식자인 아버지를 보고도 적의를 보이지 않은 친구다.
그건 은신사가 자신의 아버지이니 믿어 준 것도 분명 없지 않았다.
그가 애초에 세계 침식자를 만남으로써 세계 침식자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든 말든.
크라페에게 있어서는 그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크라페의 생각을 알아들은 서리스는 새삼 자신의 또래에 좋은 녀석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이 세대의 아이들이 성장해 어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일선에 서게 된다면.
꽤 괜찮은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내 세계와는 분명 다르겠지.’
이것이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행한 것들이 모여 바꾼 결과라는 거에 서리스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세계는 바뀐다.
용제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일은 결단코 무가치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다시금 세계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고자 발을 뻗었다.
그라말테로 갈 시간이었다.
* * *
그라말테 세라 에이징.
천하오장성이자 신왕으로 불리는 그녀는 뻐근한 눈가를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오늘도 그라말테의 업무를 마무리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성벽 끝자락에 있는 최흉 별가루 평원을 바라보았다.
별가루 평원의 주인 월사자가 최근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포착되었다.
그 때문에 요즘 들어 날이 바짝 서 있는 그녀는 꽤나 피로한 안색이었다.
체형 탓에 뻐근한 어깨를 한차례 푼 그녀는 금색의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를 불러 커피라도 한 잔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라말테 전체에 처져 있는 비기 아우레우스 파르마에 무언가의 침입이 감지되었다.
그녀는 벗어놨던 제복 상의를 대강 두르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추워지기 시작한 싸늘한 날씨에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몸은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몸 전체에 상시로 켜져 있는 아우레우스 파르마는 그녀 자체를 황금의 방패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발걸음이 뒤뜰로 이어졌다.
그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걷던 순간, 그녀의 눈에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들어왔다.
“어머니.”
아들을 잠깐 본 그녀의 눈동자가 그 옆에 있는 남성에게로 향했다.
큰 키와 듬직한 체형을 지닌 그는 언뜻 보면 자기 아들보다 형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 비해 느껴지는 감각은 아직 20대 초반인 것 같았다.
검은색 머리카락.
강렬하게 느껴지는 별과 발아래에서 일렁이는 특유의 그림자.
‘펜타니엄.’
거기에 자기 아들 또래 중 펜타니엄과 연관 지어 떠올릴만한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펜타니엄 서리스.
최근 워너힐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들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차세대 신성.
“무슨 일로 왔느냐.”
에이징이 묻자 크라페는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본래 이런 식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아이라 에이징에게 있어서 그 모습은 조금 새로웠다.
그러나 크라페의 입에서 들려온 말은 더더욱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그 말을 듣자마자 자기 남편인 데레비스를 떠올린 에이징의 두 눈이 한차례 떨렸다.
데레비스,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이이자 결국 세계 침식자라는 점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족 곁을 떠나버린 못된 사람.
그런 그를 크라페가 다시 만났다고 하자 에이징은 말문이 막혔다.
크라페가 예전부터 데레비스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에이징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굳이 말리지 않은 것은 크라페가 본래 목표 의식이 옅은 아이라서였다.
자기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가출은 큰 충격이었고.
괜히 실의에 빠질 바에야 차라리 그렇게라도 움직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크라페는 드디어 아버지를 만난다는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아이 때문인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에이징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리스에게서였다.
그 과정은 모르겠으나 저 아이가 크라페를 변화시킨 것이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크라페가 정중하게 묻자 에이징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이와 단순히 만나고 헤어진 게 아닌 듯하였다.
크라페와 서리스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하녀가 가져온 커피를 받아 들곤 쇼파에 앉았다.
그러곤 자기 아들과 그 친구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커피를 한 모금한 에이징은 시작된 크라페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들었다.
세계 침식자가 침공파와 반대파로 세력이 나뉘었고, 남편인 은신사가 반대파에 속해 있다는 것.
곧 있을 침공파의 습격 전에 반대파의 세계 침식자들과 협력하기 위해 다른 가문 사람들을 신왕의 이름으로 설득해달라는 요청.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에이징은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야기가 상상 이상으로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크라페가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에이징은 서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한 건 분명 저 친구 쪽이겠지.
그렇다면 당사자와 이야기해 보는 게 맞을 거다.
“서리스, 맞겠지?”
“예, 인사가 늦었습니다.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 보이자 에이징은 잔을 내려 두었다.
“말의 요지는 이해했네. 크라페의 말마따나 나와 데레비스의 사이를 발표한다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다행입니다.”
“그래서 그 설득을 어떤 식으로 하겠다는 거지? 무턱대고 다른 가문을 찾아가 이런 이야기를 일일이 늘어놓을 속셈인가?”
에이징은 이미 예상한 답이 있었지만, 서리스의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그러자 서리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천상하월(天上下月) 회의의 개최를 부탁드립니다.”
천상하월.
천상사성, 천하오장성, 월하십인.
이 세계에서 특출난 강자들을 전부 모으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 전력의 회의 소집령 발동을 이 당돌한 아이가 부탁했다.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 같으냐?”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압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 또한 그리 쉽게 넘길 일이 아님을 아실 겁니다.”
무려 세계 침식자들의 침공이다.
당장 기 싸움을 하는 것보다도 대책을 강구 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지만, 천상하월 회의의 이름값은 절대로 낮지 않다.
그만한 전력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고, 본인에게 책임이 갈 수 있음에도 서리스는 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것이다.
‘그만큼 이 세계의 안위가 먼저라는 걸까.’
아니면 책임질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스무 살 청년이라고는 생각 들지 않는 대범함을 보며 에이징은 크라페가 어째서 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눈치챘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타입이로군.’
서리스는 주위 사람을 모두 끌어당기는 타입이 분명했다.
이런 자는 십중팔구 둘 중 하나다.
결국, 마지막에 모두에게 버려져 몰락하거나.
혹은 모든 이들을 이끌어 결국에는 최정상에 서거나.
“그래.”
고작해야 스무 살 청년이 자신의 인생을 건 도박 수를 던져 보였다.
천하오장성씩이나 되어 햇병아리의 대범함에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도 데레비스가 이제는 내 남편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니. 좋다.”
에이징의 황금색 두 눈동자가 빛났다.
“데레비스가 돌아와 의견을 전하는 즉시 천상하월의 회의 소집을 건의해 주마.”
세계의 안위를 건 주사위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