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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203화 (203/275)

203화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한 뜀박질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망아꾼의 분신체 이 번이었다.

망아꾼에게 크라페 쪽 납치 지원을 지시받았던 그는 작전 구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본체로부터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믿기지 않지만, 아마 누군가에게 당한 듯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이 번은 자신이 현재 최고 번호임을 깨닫자마자 남은 분신체들의 힘을 끌어모았고, 생존을 위한 도주를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망아꾼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법이었다.

“젠장, 젠장!”

이제는 망아꾼의 본체가 된 이 번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사삭!

그가 나아가려는 방향에서 미세한 소리 하나가 감지됐다.

이에 이 번은 입술을 깨물며 전방으로 검은색 기탄은 날렸다.

콰앙!

그러나 애꿎은 나무만이 부서질 뿐.

그의 기탄에 당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썩을!”

그 사실에 더욱 초조함을 느낀 이 번은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을 쫓고 있는 적이 다름 아닌 은신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왜 이 번을 쫓고 있는가.

답은 간단했다.

‘본체가 죽은 걸 벌써 알아챈 건가!’

침공파 사이에서도 크라페가 은신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 망아꾼뿐이었다.

세력 내에서도 은근한 알력 다툼이 있는 만큼 망아꾼은 은신사라는 카드를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망아꾼만 완전히 죽일 수 있다면 세계 침식자 중 크라페를 노릴 생각을 할 이가 아예 없어진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번은 은신사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만 죽이면 이 정보는 영원히 묻힌다는 소리였으니까.

“죽어! 개자식아! 죽으라고!”

그 순간 이 번이 발광하듯 마구잡이로 기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도 은신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지속 되자 끝내, 이 번의 정신력에 한계점이 온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 쫓기다간 미쳐 버린다.

차라리 맞서 싸우겠다고 생각한 이 번은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며 과장되게 기탄을 날렸다.

은신사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 몸에 충전시켜 놓은 기탄을 한 번에 터트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는 곧 알아차리고 말았다.

은신사가 괜히 은신사라 불리는 게 아니다.

암살에 최적화되어 있는 그의 세계 외면이라는 비기는 그 어떠한 은신술보다 뛰어났다.

주르륵―

언제 그였는지 모를 이 번의 목에서 핏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 번은 눈을 부릅뜨며 자기 목을 감쌌고, 망아꾼이 죽었을 때 내뱉었던 욕설을 똑같이 중얼거리며 충전된 기탄을 잡고 있던 억제력을 놓쳤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이 번의 몸이 산산이 조각났다.

굴러온 그의 머리를 턱 하니 밟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은신사였다.

손에 쥔 꼬챙이 같은 검에서 뚝뚝 흐르는 핏물을 털어낸 그는 그걸 허리춤으로 되돌렸다.

그러면서 그는 복면 아래로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이 번에게서 흘러나오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아꾼의 본체는 대체 누가.”

은신사는 의문을 담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시하던 망아꾼의 분신체들이 단체로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걸 본 그는 그 즉시 한데로 모이는 기운을 쫓아 이 번을 추적했었다.

망아꾼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으려면 모든 분신체를 다 죽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기운을 추적해 남은 놈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그의 의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망아꾼의 본체를 죽인 이는 대체 누구인가.

‘우리 쪽에서는…….’

망아꾼을 공격한 이는 없었다.

애초에 놈이 그리 쉽게 당해줄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

반대파는 인류와의 전면전을 꺼릴 뿐이지 침공파와 본격적으로 싸우고 싶어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인물 소행이라는 것인데.

‘천하오장성이라도 나선 건가?’

문뜩 자기 아내를 떠올린 은신사는 쓸쓸히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구하고자 잠시 나섰을 때, 보았던 크라페의 얼굴도 덩달아 떠올랐다.

정말로 많이 컸다.

예전에는 자기 허리에 겨우 왔었는데, 이제는 키도 자기보다 좀 더 커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은신사를 뿌듯하게 하는 한편, 아비가 세계 침식자란 사실이 아들에게 얼마나 큰 짐으로 느껴질지 새삼 깨달았다.

은신사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고가 계속 이어지자 서둘러 고개를 털어내었다.

이런 식에 사고방식은 좋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전에 지난 일.

인제 와서 거기에 얽매여서는 지킬 수 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한다.

그러는 순간 은신사의 코끝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빠르게 이리로 다가오는 이의 냄새는 그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너무 오래 드러냈다.

아무래도 크라페가 자신의 냄새를 맡은 듯, 이리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신사는 서둘러 몸을 돌리며 복면을 끌어 쓰곤 세계 외면을 발동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로 숲을 뛰쳐나온 한 인물이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체격이 좋은 인물은 날아오르듯 숲을 뛰쳐나오더니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도약했다.

그에게서는 이상하게도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박자 반응이 늦은 은신사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뒤늦게 세계 외면을 발동시키며 자리를 빠져나가고자 했지만, 간발의 차로 실패하고 말았다.

서리스가 순식간에 다가와 그의 손목을 탁하니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단 한 줌의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신은 세계 침식자다.

그걸 아는 게 분명한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소개하였다.

“크라페의 친구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펜타니엄, 오대가이자 천상사성 검황이 가주로 있는 가문이었다.

순간, 은신사는 서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별의 기척을 눈치채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일단은 열쇠입니다. 용신과는 적이지만요.”

세계 침식자들은 대부분 용신을 적대한다는 사실을 서리스는 흑마녀를 통해 이미 전해 들었다.

용신의 힘이 너무 강하여 굳이 그와 맞서지 않는 것뿐이지 그들은 용신에게 고향 세계가 멸망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은신사가 경계하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흥미를 느낄 만한 키워드를 던졌다.

서리스의 의도는 적중했고, 은신사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용신의 열쇠인 그가 용신을 욕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기이한 것이었으니까.

“서리스.”

그러는 순간 한 박자 늦게 숲에서 크라페가 뛰어나왔다.

그는 서리스에게 붙잡힌 은신사를 보더니 그 눈을 커다랗게 떴고.

은신사 또한 서리스에게 한 눈이 팔려 도망가는 타이밍을 놓친 걸 자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크라페의 친구라면, 이만 이 손을 놓아주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저희 쪽 사안이 좀 급해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아버님이 속한 반대파분들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반대파라는 이야기가 나온 순간 은신사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길래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용신의 열쇠가 이렇게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은신사는 더더욱 의문을 품었다.

그러는 순간 그는 그 의문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망아꾼은…….”

“제가 죽였습니다.”

역시…….

은신사의 시선이 잠시동안 크라페에게 머물렀다.

서리스는 조금 전에 자신을 크라페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또한 서리스와 잘 아는 사이인 듯하였고.

‘섣불리 판단하기 위험한 친구군…….’

본인 입으로 자신이 용신의 적이라고 하긴 했으나 그건 모를 일이다.

그런 만큼 은신사는 위험해 보이는 이가 크라페의 옆에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후우.”

조그맣게 한숨을 쉰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알았네. 그 이야기,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지.”

처음 본 아들 친구와의 첫 만남은 참으로 황당하게 시작되었다.

* * *

서리스는 대화를 나누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셋이 있던 공터는 이 번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나뒹굴고 있었던 만큼.

차분히 대화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은신사와 함께 숲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온 그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은신사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크라페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크라페가 자신과 연관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번만 해도 망아꾼과 같은 인물이 자기 아들을 노렸다.

그가 신왕인 에이징처럼 엄청난 강자라면 모를까, 아직 어린 그에게 세계 침식자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우선하여 대화할 이는 바로 서리스였다.

“그래서 반대파와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겐가.”

“내용 자체는 간단합니다. 반대파 쪽에서 저희가 침공파를 막는 데 힘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서리스는 숨길 것 없이 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그 본론은 은신사 입장에서는 꽤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그는 세계 침식자에게 세계 침식자를 막게 도와달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세계 침식자이다만?”

“제 상황도 조금 전에 얼핏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크라페는 서리스가 검은별과 관련된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서리스가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넌지시 돌려 말하자 은신사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서리스는 용신의 열쇠이며 세계 침식자와 연관이 깊다.

그러니 그가 자신들 쪽에 도움을 청하는 거야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나보고 자네를 위해 침공파 쪽 세계 침식자를 죽여 달라는 건가?”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은신사가 망아꾼이 했던 제안과 똑같은 것을 자신에게 제안하냐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하자 서리스는 정색하며 이를 부정했다.

“저는 그런 식의 도움을 바란 게 아닙니다. 그저 제 세계가 엉망이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요.”

“제 세계라…….”

현재의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음 세계로 떠나가기 위해 용신이 만든 열쇠가 말한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뭣하면 저는 빼고 이야기하셔도 상관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대파의 힘을 저희 세계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내 힘이 뭐 그리 도움 된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크라페의 아버지이시잖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은신사는 서리스의 말뜻을 눈치챘다.

반대파의 일원인 자신과 천하오장성인 신왕 에이징은 부부 사이다.

두 사람은 세계 침식자와 이쪽 세계 사람들 간의 화합의 증거인 셈이니 협조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은신사는 코웃음을 쳤다.

“제정신인가?”

은신사의 눈동자 속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 정체를 밝히는 순간, 그녀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지금 이런 제안을 하는 게지?”

세계 침식자의 아내.

세계 침식자는 어느 세계를 가든 배척받고, 미움받는다.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 때문인 것도 있으나, 그들은 결국, 외부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계 자체가 그들을 꺼리며 거부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지금도 세계 침식자는 무조건 적이라고 불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적이 맞았다.

그런 세계 침식자의 아내라는 낙인은 어떤 의미일까.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배반과도 같았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서리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있던 서리스는 은신사의 격렬한 반응 앞에서도 무덤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애초에 신왕님은 그런 걸 다 감안하고 당신과 혼인을 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말은 은신사의 말문을 막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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