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한심하다는 듯 서리스가 말했을 때 사 번과 오 번이 동시에 움직였다.
쌍둥이 모습인 두 분신체는 똑같이 생긴 곡도를 쥐고 있었는데.
거래가 파투난 걸 알자마자 서리스를 죽이려 달려들었다.
자신들에게 방해가 될 적이라면 이렇게 혼자 떨어져 있을 때, 처리하고 가는 게 나았다.
놈들이 휘두른 곡도가 순식간에 서리스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잉!
그 순간.
서리스의 목에 닿은 그들의 곡도가 그의 목을 자르기는커녕 오히려 바위를 때린 듯 진동했다.
“무슨.”
분명 자신들이 내려친 건 사람의 목인데 이게 대체.
드웨이진을 통해 강기수식을 배운 서리스의 육체는 이제 바위보다도 단단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두 분신체가 경악하듯 서리스를 본 순간 그는 그들에게 웃어주었다.
“너희가 먼저 친 거다?”
그 말이 이어졌을 때, 둘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휘두르자 거기서 생겨난 풍압이 둘을 날려 버린 것이다.
금강잔월을 넘어 신룡월단까지 익히기 시작한 서리스의 힘은 그야말로 초인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그 힘을 마음대로 써도 되는 녀석들이 있다.
그동안의 훈련을 통해 얻은 성취를 여실히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큭!”
마치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한 두 분신체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누가 보아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분노한 것이다.
“팔번!”
“나 참, 다들 왜 이리 자기 명을 단축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팔 번 붕대남은 즉시 사 번과 오 번의 곡도로 자기 붕대를 뻗었다.
그렇게 둘의 곡도에 붕대가 휘감긴 순간, 둘은 이전보다 훨씬 강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검은별이 어둠을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 수를 쓰긴 쓴 모양인데.”
그 순간, 사 번과 오 번이 또다시 동시에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며 서리스도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에 맞춰 둘의 곡도가 휘어지며 서리스의 목과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뱀 같이 휘어진 두 곡도는 과거, 이 몸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만난 암살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두 검을 각각 팔과 악스판시온으로 막아낸 서리스는 팔에 생긴 생채기에 살짝 핏물이 맺힌 걸 보고.
곡도의 강도와 절삭력이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죽여!”
그것을 안 사 번과 오 번은 서리스를 몰아치고자 속도를 더더욱 끌어 올렸다.
마치 승기를 잡은 듯하였다.
그 순간, 서리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과 이어진 검은별의 선을 향해 악스판시온을 휘둘렀고.
악스판시온은 먹보답게 둘에게 이어진 검은별의 힘을 삼켜 버렸다.
우뚝!
그리고 그것은 사 번과 오 번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망아꾼의 분신체는 본체와 검은별로 이어져 유지되고 있다.
즉, 이들은 자체적으로 검은별을 지닌 게 아니며 이 사실은 악스판시온을 지닌 서리스와는 그 상성이 최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던 사 번과 오 번은 흐려지는 시야와 함께 자신들에게 날아드는 악스판시온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걱!
그리고 둘의 목이 하늘 높이 날았다.
일격에 목이 잘려 버린 사 번과 오 번이 쓰러지고, 서리스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흐악?!”
그리고 그 살기와 마주한 붕대남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번호가 높은 둘이 순식간에 당했다.
자신이 놈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 터가 없었다.
나무에 붕대를 휘감아 그걸 당겨 날아가며 붕대남은 전력으로 도망쳤다.
서리스는 그런 붕대남의 뒤를 쫓는 대신 그에게 검을 겨누며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망토와 같이 휘날렸다.
숲 사이로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붕대남이었지만, 그 속도는 서리스가 보기에 한없이 느리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망토가 완성되자마자 오른쪽 발을 쿠웅 내려찍었다.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사식(四式)
흑영분신(黑影奮汛)
작은 울림과 함께 서리스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붕대남은 자기 등 느껴지는 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그는 그 와중에도 몸을 앞으로 굴렀고, 그와 동시에 등 뒤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사, 살았…….”
그리고 그 말을 외친 순간 그는 보았다.
자기 목에서 시작된 실선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을 말이다.
“썩, 을.”
마지막 욕지거리와 함께 그는 몸이 무너져 내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악스판시온에 묻은 핏물을 털어낸 서리스가 검은색 브로치를 쥐었다.
“흑마녀.”
그가 부르자마자 검은색 개구리가 브로치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어깨 위에 앉은 개구리는 서리스의 말을 기다렸고,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저번에 세계 침식자의 힘도 흡수하라 했지.”
손을 뻗은 서리스를 통해 사 번과 오 번, 팔 번 붕대남의 검은별이 서리스에게 흡수되었다.
“응, 같은 세계 침식이니까.”
“그래, 좋아. 그렇게 하자고.”
그리 말한 서리스의 두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과거 천하오장성 신왕 그라말테 세라 에이징은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에서 사망했다.
그 이유는 세계 침식자의 기습 때문이라고 추정되었으나 문제는 그 범인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인류 쪽이 신중해진 만큼 전쟁은 장기간으로 이어졌고, 여기저기에서 피해가 속출했었다.
그리고 지금 서리스는 크라페의 어머니인 에이징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은신사.’
크라페의 아버지이자 에이징의 남편인 그가 망아꾼의 협박으로 자기 아들을 살리고자 아내를 죽였다.
그리고 그런 은신사를 크라페는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했을 테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맞물리며 진실을 추론한 서리스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망아꾼이 저지른 비열한 짓거리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망아꾼이 어디 있는지 너는 알고 있지.”
서리스가 묻자 개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로 안내해 줘.”
세계 침식자를 사냥할 시간이다.
* * *
망아꾼.
여러 분신체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수작을 부리는 그는 지금 삼 번인 용 다르키우스를 타고 상공을 날고 있었다.
조금 전 사 번과 오 번, 그리고 팔 번을 통해 보았던 장면.
그들이 죽기 전까지 비춘 서리스를 떠올린 그는 이해 못 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죠? 거래가 마음에 안 들기라도 했던 건가요?”
그는 서리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그의 눈에 서리스는 용신의 열쇠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검은별의 힘에 눈이 돌아가 누구든 그냥 해치울 생각밖에 없는 걸까.
용신의 열쇠는 세계 침식을 흡수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대상을 잘못 골랐군요.”
애꿎은 분신들만 잃었다고 생각하며 망아꾼은 혀를 찼다.
미친놈을 상대할 이유는 없다.
저건 그냥 무시하는 게 맞겠지.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은신사다.
워너힐 아카데미 습격 당시 무장공주가 주변을 휘저어 놓는 중, 크라페는 세계에서 숨는 힘을 사용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망아꾼은 크라페가 은신사의 아들임을 눈치챘고.
그 일이 지금 그를 인질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은신사의 힘은 천상사성과 천하오장성을 암살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은신사를 끌어내려면 반드시 그의 아들을 사로잡아야만 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가도록 하세요.”
망아꾼이 지시를 내리자마자 다르키우스의 손아귀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망아꾼은 다른 분신체로 눈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다르키우스를 타고 날아가던 망아꾼의 머리 위 상공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망아꾼이 태평하게 분신체를 살펴 나가던 그 순간 검은색의 일렁임을 뚫고 누군가 뛰어내렸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대검을 쥐고 나타난 그는 벼락같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곧이어 망아꾼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서리스였다.
한순간 그가 왜 자신의 눈앞에 있는지 인지 못 했던, 망아꾼의 두 눈이 서서히 커지던 그 순간.
서리스의 검이 다르키우스의 목을 내려쳤다.
서걱!
신룡월단의 힘으로 잘려나간 다르키우스의 목에서 핏물을 치솟으며 그 거대한 머리가 저편으로 날아갔다.
머리를 잃은 다르키우스는 순식간에 고꾸라지며 땅으로 추락했다.
“허어?”
망아꾼의 입에서 황당하다는 목소리와 함께 그는 추락하는 다르키우스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르키우스의 목을 자른 서리스가 추락하는 몸체의 위에서 자기 몸을 그림자로 고정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당연히 적의였다.
그는 지금 자신을 죽이러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망아꾼은 더 의아하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흑마녀, 당신이 왜 그를 돕고 있는 겁니까?”
그가 자신을 이렇게 기습할 수 있던 건 흑마녀의 도움일 것이다.
그런 그녀의 행동 의미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망아꾼은 눈살을 찌푸렸다.
흑마녀는 반대파도 자신들의 편도 아니다.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중립 쪽 인물이다.
그녀에 관해 아는 건, 그녀가 용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뿐.
그런 그녀가 왜 용신의 열쇠인 서리스를 돕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의문은 의미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흑마녀와 그는 손을 잡았고, 그 두 사람이 자신의 적이라는 거였으니까.
“분신체만 쓰니 제가 얕보입니까?”
설마 자신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올 줄이야.
망아꾼의 옷깃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 검은색의 무언가가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뒤이어 그것은 가운데가 빈 링 형태가 되더니 이내 삐죽하고 바깥으로 가시를 만들어내었다.
“차라리 첫 일격을 삼 번이 아니라 저를 노렸어야죠.”
그런 망아꾼의 손을 따라 기다란 검은색 봉이 만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다르키우스의 몸에서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망아꾼의 분신체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났다.
무한 자가 복제.
망아꾼이 지닌 힘이었다.
순식간에 다르키우스의 전신을 뒤덮은 분신체를 보면서도 서리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악스판시온을 천천히 옆으로 틀며 자세를 잡아 나갈 뿐이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망아꾼은 한차례 한숨을 쉬곤 봉을 앞으로 뻗었다.
“죽이십쇼.”
그리고 그 순간 모든 분신체들이 서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몰아치듯 쏟아지는 분신들은 인해전술이 무슨 뜻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악스판시온에서 시작된 힘과 함께 서리스의 모습이 바뀌었다.
마치 용을 축소 시켜 놓은 듯한 머리 위 두 뿔과 굵은 꼬리는 검은 별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오싹!
그걸 목격한 망아꾼이 뒤늦게 상황이 잘못된 것을 느꼈다.
그를 중심으로 쏟아진 별과 흘러나오는 어둠은 이윽고 하나의 검이 되었다.
하늘 위, 다르키우스 보다도 압도적인 크기에 거인이 휘두를 법한 그림자 검.
오직 제왕을 위해 만들어진 검 앞에 세상이 한순간 그것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한 흐름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쏟아지는 망아꾼의 분신을 향해 서리스가 부풀어 오른 팔근육과 함께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제왕의 검이 휘둘러졌다.
제왕월영도(帝王月影刀)
하늘조차 베어버릴 그 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