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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98화 (198/275)

198화

그라말테 세라 크라페.

어린 시절부터 후각이 뛰어났던 그는 아버지에게서 세계 침식의 악취가 난다고 아무런 악의도 없이 말했었다.

비밀이 드러난 아버지는 모습을 감췄고, 크라페는 그때부터 줄곧 그를 쫓았다.

자신의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크라페는 거기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에 우연히 맡게 된 아버지의 냄새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근처에 있다.

혹시 자신을 보러온 걸까?

그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크라페는 그 냄새를 바로 뒤쫓았다.

자기 손으로 부숴 버렸던 가정을 되찾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이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크라페는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적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빗속.

크라페는 자기 팔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손으로 감싸 채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았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며 잠깐 쉬자 금방이라도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얼마나 달렸더라.

감은 안 잡히지만, 꽤 긴 시간이었다는 것 정돈 잘 알 수 있었다.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런 순간 숲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고 일부러 체력 소모만을 유도하는 그는 다름 아닌 망아꾼의 분신체였다.

예전에 망아꾼이 나타났을 때 나던 악취를 기억하기에 알 수 있던 부분이었다.

문제는 저번과 달리 지금의 자신은 혼자이며 그의 분신체는 크라페의 코로도 가늠이 안 될 만큼 무수히 많다는 점이었다.

“우린 네 협조를 좀 얻으려는 거야.”

“……세계 침식자가 나한테 왜?”

크라페가 조금이라도 체력을 더 회복하고자 시간을 끌듯 말했다.

그러자 망아꾼은 그 사실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양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네 아버지 은신사의 힘이 필요하거든. 근데 그는 우리와 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쪽이라 말이야.”

우리.

그 말인즉슨 망아꾼과 같이 자신의 아버지를 노리는 세계 침식자가 더 있다는 소리였다.

그는 대체 왜 아버지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까.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 힘을 좋은 일에 쓰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크라페는 잘 알 수 있었다.

“나를 인질로 쓸 속셈?”

“눈치가 빠르니 좋은걸. 걱정하지 마. 아프게는 안 할 거니까.”

인질로 쓴다고 한 주제에 아프게 안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

그러나 크라페는 이러는 동안 체력을 잘 회복했다.

틈을 만들어 한 번에 빠져나갈 것을 결심한 크라페가 목걸이를 쥐었다.

번쩍.

그 순간, 그라말테에 내려오는 로엘사론에서 터져 나온 빛과 함께 크라페가 바닥을 박찼다.

비가 오는 만큼 어두웠기에 한 번에 터진 빛은 상대의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크라페는 이 시도가 성공할 것임을 확신하고 달렸다.

그러나 그것이 오판이었음을 크라페는 얼마 안 가서 깨닫게 되었다.

그의 빛이 터져 나온 그 순간 모든 빛이 한 사람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린 그는 크라페가 터트린 모든 빛을 삼켜 버렸고, 크라페는 그걸 보고 경악하듯 눈을 크게 떴다.

“잘했어. 17호.”

크라페의 빛을 삼킨 이를 칭찬한 전신에 붕대를 감은 분신체가 달려들었다.

크라페는 뒤늦게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퍼억!

그의 다리에 걷어차인 크라페의 몸이 기역 자 형태로 꺾였다.

“커헉!”

순식간에 공중으로 뜬 크라페는 가까스로 황금의 방패를 이용해 그의 다리를 막았지만.

그것조차 뚫고 오는 충격에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당하고 만다.

그 사실을 알기에 크라페는 즉시 바닥을 향해 가문비기 아우레우스 파르마를 내질렀다.

콰과과과광!

빛의 탄환 수십 개가 바닥을 향해 쏘아졌다.

그와 함께 바닥 위를 뒹굴며 추락한 크라페는 다시금 빠져나가고자 달렸다.

하지만 그가 발을 내뻗었을 때, 그는 발목에서 오는 강렬한 힘에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돌리자 붕대 하나가 자기 발목을 묶고 있었다.

이 붕대…… 평범한 붕대가 아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상황은 이미 늦었다.

붕대가 당겨지며 그 힘에 의해 크라페는 또 한 번 하늘을 날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고자 용을 썼지만, 붕대는 크라페의 다리를 휘어 감으며 그를 순식간에 압박했다.

마치 미라와 같은 모습이 된 크라페는 서서히 숨이 막혀가며 의식이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안돼.’

아버지를 찾기는커녕 그를 끌어낼 미끼로써 이용당해야 한다니.

그건 자신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정신이 아득해져 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도주를 위해 달리고, 전투를 반복했던 크라페였다.

그의 별과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결국, 버티지 못한 그가 정신을 읽기 직전.

서걱!

무언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크라페가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방금까지 붕대에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풀리며 공기가 공급되었다.

“허억!”

들어오는 산소를 들이마시자 겨우 정신이 돌아옴을 느낀 크라페는 자기를 옭아맨 붕대를 뜯어내었다.

그러면서 왜 갑자기 붕대가 풀렸는지를 확인하고자 고개를 드니 거기에는 모든 망아꾼의 분신체가 몰려들어 있었다.

“은신사, 역시 제 아들은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모양이죠!”

비웃음이 담긴 분신체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마치 메아리치듯 울리는 놈들의 목소리 속에서 크라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은신사.

조금 전 자신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크라페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버지와의 만남을 고대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안돼! 나 때문에 오지 마!”

크라페가 소리를 내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은신사라는 이름답게 그의 아버지는 망아꾼조차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망아꾼은 모든 분신체를 모아 은신사가 빠져나갈 틈 없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것이었다.

“오지 말긴 뭘 오지 마?”

그런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 위에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그건 크라페에게 익숙한 이의 것이었지만, 여기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목소리였다.

크라페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거기에는 거대한 그림자 대검을 쥔 채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한 남성이 있었다.

“서, 리스?”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서리스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휘둘러진 대검이 주변 일대를 날려 버렸다.

* * *

검풍에 휘말린 망아꾼의 분신체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그 폭풍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건 망아꾼의 분신체 중 일 번대들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은신사 때문에 크라페를 쫓았건만.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이 나타났다.

8번 분신체인 붕대남은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아까 보았던 그림자 검을 쥔 남자는 예전에 십칠 번을 죽인 남자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과거 용신의 열쇠 중 하나였던 제파림과 유사한 자.

아마 용신의 또 다른 열쇠일 게 분명했다.

‘그런 놈이 어째서 우리를…….’

그 생각에 닿은 순간 망아꾼 분신체들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자인 내 별을 노리기 시작한 거군요.”

망아꾼의 본체 목소리가 분신체의 입을 빌려 흘러나왔다.

노기가 담긴 그 목소리는 지금 서리스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확신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로서는 용제가 만들어낸 변수가 바로 서리스라는 것을 모르는 만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용신의 열쇠들은 세계 침식의 힘을 모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썩 좋은 게 아니었다.

저번에 십칠 번을 죽인 것을 보면 그는 상당한 강자였다.

거기에 그 뒤로 꽤 시간이 흘렀으니 더더욱 강해졌을 게 분명했다.

용신의 열쇠들은 최흉을 삼키기 직전까지는 그 성장 속도가 말도 안 되니까.

‘그 최흉을 넘지 못하는 열쇠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최흉 직전까지 그들의 성장은 세계 침식자들조차 사냥할 만큼 강해지기 쉽다.

세계 침식의 힘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검은 별은 더더욱 강한 힘을 그들에게 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부딪칠 필요 없어요.’

저쪽의 목적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검은 별만 흡수할 수 있다면 다 좋은 게 열쇠다.

그렇다면 오히려 협력 관계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파 세계 침식자들의 검은별을 그가 먹을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니까.

그 순간 먼지구름 사이로 서리스가 튀어나왔다.

서걱!

그가 휘두른 검에 분신체 두 명이 순식간에 당했다.

그 힘은 확실하게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고, 망아꾼의 일 번 대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봐요. 열쇠 씨! 거래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8번 분신체인 붕대남이 입을 열었다.

열쇠라는 말에 반응한 서리스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분신체인 붕대남 조차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게 거래 상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사이 서리스의 뒤를 따르던 이들도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자가 관련된 만큼 아크 단원들이 함께 온 것이었다.

그들 쪽을 잠시 보던 서리스는 검을 스윽하니 거두곤 붕대남을 향해 말했다.

“너를 포함한 일 번부터 오 번까지가 나를 따라온다면 대화를 들어주마.”

상당히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서리스가 내뱉었다.

게다가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번호를 다 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강자다.

저 말은 어떤 의미로는 자신이 일 번부터 오 번까지를 상대하고 있어 이 자리에 없었다는 변명을 동료들에게 하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붕대남은 긴장한 기색으로 그에게 말했다.

“일 번부터 삼 번은 이곳에 없고, 본체 곁에 있습니다. 둘은 빼고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그리 말한 서리스가 숲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하자 붕대남은 주위에 분신체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그 뒤를 따랐다.

저쪽이 대화할 마음이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그는 숲의 중간 지점을 넘어갈 때쯤 그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사 번, 오 번, 팔 번 붕대남도 따라 멈추어 섰다.

그런 그들을 한차례 둘러본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손에 쥔 채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는 일 번대 분신체들 조차 긴장할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통의 무인들과 달리 서리스가 지닌 검은별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자가 품은 검은 별은 지금 분신체들만으로 상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일 번대 중 가장 앞자리 수의 셋이 있지 않은 이상 서리스의 심기를 건드려선 좋은 게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대한 탈 없이 거래를 마치고자 하였다.

“거래라고 했지? 그래서 요구 조건이 뭐지?”

서리스가 관심을 보였다.

그걸로 일단 안도한 붕대남은 그가 혹할만한 제안을 던졌다.

“지금 세계 침식자는 두 분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 침공파 다른 하나는 현상유지파죠.”

“그래서 너희는 그 반대파의 검은별을 나에게 줄 테니 너희를 도와라…… 이런 거냐?”

“눈치가 빠르시군요.”

붕대남은 안도하듯 미소 지었다.

“저희 목표는 은신사입니다. 그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그를 저희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니까요. 이번 일은 그냥 눈감고 넘어가 주기만 해도 거래 성사라 생각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남은 건 그가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 뿐.

서리스의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붕대남이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을 때.

“하, 하하하!”

그때, 서리스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고민하고 있을 거로 생각한 그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을 때.

붕대남과 분신체들은 모두 이 순간 느꼈다.

그는 처음부터 거래에는 응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정도 것이지.”

그리고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향할 방향성 또한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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