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채엥!
맑은 검명이 한차례 울려 퍼졌다.
염화랑의 화염을 두르고 아드란칼의 뼈로 만들어진 검과 데이모스의 근력으로 서리스에게 맞서고 있는 도로시는 이를 꽉 깨물었다.
서리스는 전력으로 임하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양 처음부터 용인화를 발동했다.
처음에는 도로시도 삼중 마왕화를 익힌 만큼 어느 정도는 할 만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깨져 나가고 말았다.
서리스가 용인화를 쓴 순간부터 도로시는 그의 움직임을 간신히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비기인 마왕화보다 상위호환이라고 여겨질 만큼 용인화한 서리스는 초인과도 같았다.
‘직계님, 너무하네!’
그러면서도 도로시는 눈을 번뜩이며 자신이 이길만한 방법을 물색했다.
서리스가 전력으로 부딪쳐 주는 게 오히려 더 기뻤던 도로시는 그를 꺾기 위해 자신의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렇기에 몰아치는 서리스의 검격 속에서도 도로시는 반전의 틈을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틈은 보이지 않는다.
서리스는 정말 완벽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면 그만이야!’
그런데도 도로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처럼 불붙은 의지를 따라 그녀의 검에도 화염이 일었다.
그 순간, 서리스의 검과 부딪친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그의 시야를 가렸고.
아드란칼로 만들어진 도로시의 검이 갑자기 분해됨과 함께 서리스의 검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된다.
서리스의 힘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끌려갈 테니까.
푸욱―
그렇기에 도로시의 검에서 치솟은 뼈가 마치 창대처럼 길어지며 바닥에 박혀 들었다.
서리스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뼈를 부숴버리고자 했지만.
그의 검을 휘감은 뼈는 마치 탄성을 가진 고무처럼 늘어졌다.
뒤늦게 서리스의 눈이 커지자 새로운 검을 만든 도로시가 해맑게 웃었다.
변수로 틈을 만들어낸 것이다.
“직계님!”
이에 맞춰 데이모스의 힘이 더해지며 그녀의 팔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다.
처음으로 잡은 기회다.
그리고 이후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기회였다.
도로시의 팔꿈치에서 돋아난 뼈가 불타오르며 추진력을 더했다.
자기 목을 향해 내려쳐 지는 검을 바라보며 서리스는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녀석 날 정말로 죽일 목적인가 본데.’
살기를 잔뜩 내뿜고 있는 도로시는 전투에 너무 몰입했는지,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오직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그녀를 보고.
서리스는 숨을 천천히 들어 삼켰다.
용인화를 하고부터 서리스의 눈에는 모든 흐름이 느리게만 보였다.
마치 남들과 다른 시간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는 그의 육체가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사고가 그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해서였다.
‘바루그가 만든 악스판시온.’
본래는 몇 초 정도밖에 용인화를 유지 못 하던 서리스였으나, 강화된 악스판시온을 쥐고 난 뒤로는 그 변신 시간이 대폭 늘었다.
보아하니 서리스의 별이 다 떨어지면 아까 전, 악스판시온에 넣어둔 별이 그 소모를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악스판시온 속에 담긴 자신의 별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바루그, 이 사람 엄청난 걸 만들어 왔네.’
사용자의 별 소모를 대신 감당해주는 검이라니.
모든 이가 꿈꾸는 최고의 무기다.
‘그렇다면.’
목 끝까지 다가온 도로시의 검을 앞에 두고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에 담긴 별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러자 악스판시온에 두른 그림자가 미친 듯이 요동치더니, 그 위로 하나의 기운이 더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신룡월단.’
투둑!
모든 흐름을 끊어내는 신룡월단은 도로시가 만들어낸 모든 변수를 끊어내고 말았다.
그 사실을 도로시 또한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휘두르는 검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멈출 방법조차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
분명 도로시가 한참 전에 먼저 검을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서리스의 검이 먼저 그녀에게 닿았다.
그 아득한 속도를 앞에 두고 도로시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콰아아아아아앙!
도로시가 하늘을 날았다.
* * *
한차례 대련이 끝나고, 용인화를 푼 서리스에게 도로시가 다가왔다.
그에게 맞은 부분이 아픈 듯 옆구리를 감싸고 있는 도로시는 서리스를 보며 불만스레 말했다.
“직계님, 너무 강하잖아!”
“네가 남 말할 소리냐. 용인화 없었으면 조금 전에 내 목이 날아갔어.”
자기 목을 슥슥 만지는 서리스를 보고 도로시는 칫하고 삐진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대련이 즐거웠던 듯 그녀가 웃기 시작하자 서리스도 따라 웃어주었다.
“나는 오늘부로 돌아가는데 직계님은?”
그 물음에 서리스는 아라만을 돌아보았다.
이번 훈련의 주관은 순전히 아라만의 몫이다.
그런 만큼 얼마나 더 훈련하게 될지는 그에게 달려 있었다.
“이번 훈련이 끝나면 아크 단도 워너힐로 한 번 돌아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런가요?”
아무래도 그의 말대로 워너힐로 복귀할 때가 된 모양이다.
“그림자 아이, 너도 이제는 저쪽에 합류해. 용인화는 이제 실전에서 갈고 닦는 거 말고는 의미 없을 거 같아.”
“알겠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용인화는 이제 완성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아라만에게 배울 것도 없겠지.
“흠, 서리스, 앞으로 그거 잘 간수해라.”
“예, 좋은 무기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됐다. 좋은 놈에게 가야 좋은 무기지.”
그렇게 말한 바루그는 대충 손을 휘적거렸다.
이로써 용인화는 실전용으로 쓰기에 충분할 만큼 마스터했다.
그 사실에 서리스는 솔직하게 기뻐하며 악스판시온을 그림자 속에 넣었다.
‘차근차근 쌓아 나가는 기분이군.’
수련의 성과를 똑똑히 느낀 서리스는 그 뒤, 돌아가는 도로시와 바루그를 배웅하고, 바로 아크 단으로 향했다.
용인화를 터득한 후의 만족감이 지나가고 나니 어서 빨리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셈이었다.
“오, 서리스 왔냐!”
그렇게 서리스가 아크 단원들이 훈련하고 있는 훈련장에 도착하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빅토르가 제일 먼저 인사를 해왔다.
그의 꼴은 상당히 엉망이었는데, 딱 봐도 훈련이 엄청나게 격렬했음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그는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빅토르 선배, 바닥에서 자면 감기 걸립니다.”
“걱정 마. 이 빅토르 님은 감기 같은 거 안 걸려.”
이렇게 보니 이 인간, 도로시랑 상당히 사고방식이 비슷하다.
알고 보면 먼 친척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서리스는 그런 그를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걸어갔고, 거기에는 저번에 보았던 아라만이 만든 키메라와 싸우고 있는 단원들이 있었다.
스타리즈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강철로 된 가시가 키메라의 발아래에서 치솟았다.
키메라가 몸을 공중으로 띄운 순간 놈은 자기 머리 위에 처진 번개 그물에 걸렸다.
지지지직!
하지만 그걸로는 놈의 움직임을 잠깐 묶어둘 뿐이었다.
이것도 다 계획된 작전인지 키메라가 몸을 빼내려는 순간, 그 아래에는 엑스널이 얼음으로 세공된 검을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엑스널의 절대영도가 담긴 검이 키메라의 몸을 고속으로 꿰뚫었다.
놈이 뒤늦게 엑스널을 꼬리로 쳐내긴 했지만.
엑스널은 자기 몸에 처진 얼음으로 이를 방어하며 조금 물러설 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 엑스널, 더 빠르게. 화력을 올려. ]
그 순간 디바쉬의 언령 비기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 언령을 듣자마자 엑스널의 육체가 일순간 더 빨라졌다.
꼬리에 당한 자세에서 순식간에 몸을 바로 한 엑스널의 검이 키메라의 목으로 뻗어 나갔다.
파직!
그리고 그와 함께 엑스널의 검 위로 번갯불이 치솟아 올랐다.
절대영도와 합쳐진 스타리즈의 강화 마법이었다.
푸욱! 파지지직!
디바쉬와 스타리즈의 힘을 합친 그의 검이 키메라의 목을 꿰뚫자 얼음과 번개가 동시에 치솟으며 놈의 육체가 붕괴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엑스널은 조그맣게 숨을 몰아쉬다가 서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후배님, 언제 왔어?”
“방금요. 그것보다 이제 절대영도를 자유자재로 다루시는 모양이네요.”
“발동 시간을 단축하는 데 집중했으니까.”
그 말만 들어도 그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지 잘 보였다.
“여, 왔나.”
-오셨군요.
뒤이어 스타리즈와 디바쉬도 인사를 해왔다.
아까 전, 협공을 보니 이제는 정말로 같은 단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들 서로의 호흡에 익숙해진 듯했다.
“빅토르 선배만 빼면 다 성장한 거 같네요.”
“뭐? 나는 왜 빼냐!”
어느새 체력을 회복한 빅토르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저래 보여도 처음 틈을 만들어 낸 건 빅트로 선배다.”
“오, 역시, 스타리즈, 네 녀석은 뭔가를 좀 아는구나!”
스타리즈는 그리 말하며 서리스에게 슬쩍 말했다.
“저 선배가 어그로 끄는 능력은 최고다. 키메라조차도 저 선배를 먼저 노리더라.”
“빅토르 선배의 순기능이로군.”
사실 저렇게 보여도 빅토르는 적 입장에서는 꽤 까다로운 상대에 속한다.
아무리 쓰러트려도 타고난 회복력으로 전장에 계속 돌아오니 상대하는 입장으로서는 미칠 지경일 것이다.
근성 하나는 서리스조차 인정하는 그다.
만약 저기서 점차 성장해, 그에 맞는 실력까지 겸비하게 된다면 정말로 괴물 같은 실력자가 되겠지.
실제로 그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알을 깨고 있는 인물이었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나가떨어지는 빈도가 급격하게 줄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건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야말로 다들 엄청난 속도로 성장 중이었다.
“그보다 여기 왔단 건, 이제 니도 합류하나?”
“그렇지.”
“이야, 키메라 난이도 더 올리겠네. 큰일 났다잉.”
아무래도 키메라의 난이도 조절이 가능한 듯, 스타리즈는 벌써 고생이라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리스, 왔구나.”
“예, 힐로즈 단장님.”
모두와 한마디씩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힐로즈 단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서리스는 그동안 훈련 와중에도 꼬박꼬박 힐로즈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했었다.
그가 아크 단의 단장인 만큼 단원의 실력은 파악해둬야 했으니까 말이다.
“힐로즈 단장님, 워너힐 아카데미로 한 번 돌아갈 예정이라 들었는데 말이죠.”
“11월 초쯤에 돌아갈 예정이야.”
그때쯤이면 서리 마탑과도 안녕인가.
“앗, 키메라 또 쓰러졌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라만이 나타났다.
그는 쓰러진 키메라를 살피곤 이리저리 만져보다 씩하니 웃으며 이쪽을 보았다.
“좋아. 그럼 키메라는 됐고, 서리스도 왔으니. 이제 다음 수업으로 넘어가자.”
다음 수업.
그 말을 듣고 모두의 시선이 아라만에게 향했다.
키메라만 해도 상대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 수업이라니?
혹시…….
“자, 이제 실전 수업이야.”
그러면서 아라만은 뒤적뒤적 품에서 마수 부산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뭐든지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실전 훈련을 보자.”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슨 뜻인지 이 순간 모두가 알아차렸다.
아라만이 가진 마왕화만큼 변수 창출에 유리한 비기도 없다.
아라만은 지금 드웨이진 때와 같이 아크 단원과 단체 대련을 하려는 것이었다.
모두의 눈이 번뜩였다.
천하오장성.
세계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가 직접 대련해주겠다고 하니 한순간에 의지가 타오른 것이었다.
그걸 본 아라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비늘 하나를 손에 콱하니 쥐었다.
“좀 많이 괴롭힐 거니까. 잘 버티자?”
아라만과의 진짜 수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