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악스판시온과 재료를 바루그에게 건네준 지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흘러 더위도 한풀 꺾여 완전히 가을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날씨.
서리스는 검을 쥔 채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얼마 전 야왕을 쓰러트릴 때 사용했던 일식 용섬을 머릿속에 그린 그는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번뜩인 순간 무형의 기운과 함께 서리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휘둘러진 검과 함께 서리스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느끼며 그림자 검을 지웠다.
역시 실전에서 사용했던 것에 비해 모자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금강잔월은 흐름이고, 신룡월단은 그 흐름을 끊는 힘.’
그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알지만, 역시 아직은 훈련이 모자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리스 후배, 여기 있었어?”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엑스널이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잔근육이 더 늘어나기 시작한 그는 별이나 육체나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아라만의 훈련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서리스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라만 님께서 널 찾아달라길래 적당히 돌아다니고 있었지.”
“잘 얻어걸렸군요.”
서리 마탑에는 마법 실험실로 설계된 공실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적당히 돌아다니던 도중 운 좋게 발견한 것이리라.
“방금 그거…… 어쩌다 살짝 봤는데, 또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온 거야?”
“제가 언제 이상한 걸 배워왔다고 그러십니까?”
“항상 그렇잖아.”
엑스널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 서리스는 지금도 가뜩이나 버거운 상대이건만 또 어디선가 뭔가를 얻어오니 심통이 났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락스카와는 달리 엑스널은 서리스에게 박탈감과 허무함 같은 감정은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매일 같이 투덕거린 일이 있기 때문일까.
미운 정이 쌓였다는 게 이런 것 같았다.
“그만 좀 성장해. 주위 사람한테 배려심을 가지라고.”
“하하, 엑스널 선배님은 그래서 배려심 넘치시는 분이었군요.”
“당장 칼 뽑아. 지금 하늘 위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단 걸 가르쳐 줄게.”
“무슨 소리십니까? 원래 태양은 하나였잖습니까.”
말 한마디를 지지 않는 서리스를 엑스널이 쫓기 시작하자 그는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엑스널은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가뿐히 그를 따돌린 서리스는 곧바로 아라만에게로 향했다.
그가 부른 이유는 대강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라만 님.”
작업실 문을 지나친 서리스가 정원으로 나오자 거기에는 때마침 아라만과 바루그가 서 있었다.
그들의 옆 탁자에는 천으로 둘러싸인 검 한 자루가 있었는데, 서리스는 그걸 보자마자 무엇인지 깨달았다.
천으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기운은 너무나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왔군.”
“그림자 아이! 드디어 완성됐다고!”
무기 주인보다 더 신나 보이는 아라만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리스는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러자 바루그는 탁자에 올려둔 검을 들더니 서리스 앞에 내려놓았다.
“풀어 보거라.”
그의 말을 따라 서리스가 천을 천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천을 전부 풀었을 때, 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정말 감탄이 나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검이 여기 있었다.
이건 무기보다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악스판시온이 본래 지닌 흑도에 새겨진 은하수와 같은 별자리.
그리고 그 별자리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흑룡의 모습까지.
악스판시온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런 검을 서리스는 천천히 들어 올렸고,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마치 자신을 위해 맞춰진 듯하였다.
“서리스라 했지?”
“예.”
바루그의 부름에 서리스가 곧장 답하자 그는 업그레이드된 악스판시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원래의 악스판시온에 밤피르와 야왕의 부산물 일부를 첨가했다. 거기에 흑단 비늘과 세르아의 흑진주도 좀 썼지.”
밤피르와 야왕은 서리스가 구해온 거지만 뒤에 나온 재료 두 개는 서리스가 구해 온 게 아니었다.
두 재료 다 적은 양으로 웬만한 저택을 살 수 있는 가격의 물건이었기에 서리스가 놀란 표정을 짓자, 바루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다 부담했으니 너한테 값을 받을 생각은 없다.”
그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아라만이었다.
그가 다른 재룟값을 말도 없이 부담해 주었을 줄이야.
“아라만 님.”
“도로시랑 이야기를 좀 했거든. 그림자 아이가 내 딸을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더라고. 전부는 안 돼도 나름의 사례야.”
그동안 도로시와 자주 함께하더니 그러고 있었나.
그 사실은 예상 못 했던 서리스는 조금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흠흠, 그보다 시험 식도 다시 통과해야 할 거다.”
서리스가 고개 숙이는 사이 잠깐 소외됐던 바루그가 말해왔다.
시험 식이라 하면 예전에 악스판시온을 제압했던 것과 같은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검의 의식을 잠재워 놨으니 문제없지만, 별을 주입하면 바로 반응할 거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악스판시온 녀석과 기 싸움하게 생겼다.
그리 생각한 서리스는 두 사람에게서 조금 물러서곤 악스판시온을 들어 올렸다.
‘별을 부어 넣으면 된다고 했으니.’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에게 가끔 밥을 주던 때처럼 별을 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악스판시온이 제멋대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진동을 따라 악스판시온은 별을 마구잡이로 잡아먹기 시작했고, 그걸 본 서리스의 눈이 커졌다.
이 녀석 생각 이상으로 식성이 좋아졌다.
서리스가 바루그를 힐끔 보자 그는 더 하라는 양 고갯짓했다.
“너랑 나랑 힘 싸움하는 거 오랜만이지 않냐.”
그러자 악스판시온이 윙윙거리며 마치 대답하듯 울림을 토해냈다.
배은망덕한 자식, 자기 주인도 못 알아보기는.
그러면서도 서리스의 얼굴 위로는 미소가 그려졌다.
“먹고 싶은 만큼 다 먹어봐라.”
아주 배를 터트려 주겠다는 심보로 서리스는 별을 퍼붓기 시작했다.
두 개의 별은 물론 검은별의 힘까지 끌어올린 서리스의 대량의 별이 악스판시온에게 쏟아지자 녀석은 끝없는 허기를 채우고자 발버둥 쳤다.
“허어, 진짜 다 채울 속셈이로구만.”
그리고 그런 서리스를 바라보며 바루그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지금 악스판시온의 총량은 천하오장성조차 버거워할 만큼 늘어났다.
그런데 서리스는 그런 악스판시온을 상대로 별을 퍼붓고 있었다.
단순 별의 총량만 보면 정말 난놈 중에서 난놈이라 할 수 있었다.
“저런 놈이 나오면, 같은 세대 녀석들의 성장 의욕이 전부 개박살이 나겠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지.”
바루그의 말에 아라만이 오히려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불이 붙어있더라고.”
“응? 저걸 보고서?”
전투와는 관련 없는 바루그가 보기에도 서리스는 비정상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대장장이들도 또래 중에 너무 뛰어난 이가 있으면, 자괴감에 무너지는 이들이 속출하기 마련인데.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
“사람을 묘하게 자극하는 아이라서 그래. 그런 사람 있잖아. 옆에 있으면 괜히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나 같이 대단한 사람.”
“네놈이 대단한지는 모르겠고, 저걸 보고도 쫓아갈 생각을 하는 놈들도 보통 놈들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
“이번 세대가 황금 세대래.”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흐흐, 틀린 말은 아니지. 틀딱이 되는 거야.”
“틀딱? 그게 뭔 말이냐.”
“틀딱한테는 안 가르쳐줘.”
두 사람이 그렇게 떠드는 사이 서리스는 악스판시온과의 기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끝도 없이 별을 삼키는 검 때문에 서리스의 이마에도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갔다.
악스판시온 이 녀석 언제까지 처먹을 속셈인 걸까.
“……그래, 마지막까지 다 먹어봐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전부 먹여주겠다는 속셈으로 서리스가 마지막 별을 때려 박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배불러.
아주 짧게 울린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그 순간 화악하고 악스판시온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일순간 쏘아진 빛에 서리스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악스판시온의 검신에 박힌 은하수에 별빛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다 채웠군.”
서리스가 마치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악스판시온을 보고 있으려니 바루그가 다가왔다.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이건 평생, 네 검이다.”
악스판시온이 다시금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소리였다.
“저기, 바루그 님.”
“뭐지?”
서리스는 조금 전에 머릿속에 잠시 들렸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아까 전 악스판시온이 저에게 말을 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만, 혹시 말을 하는 능력까지 주신 겁니까?”
“그게 뭐냐? 무섭게시리.”
만든 본인이 무서워해서 어쩌자는 걸까.
그는 귀신 같은 거에 약하다는 듯 팔을 비비며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다.
바루그를 잠시 바라보던 서리스는 이내 악스판시온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우웅 소리를 낼 뿐 아까처럼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착각인가?’
별을 너무 써서 환청이 들린 걸지도 모르겠다.
“축하해!”
그러는 사이 아라만도 다가와 말을 해주었다.
악스판시온이 강화된 건 전부 그 덕분이었기에 서리스가 고개를 숙이려 하자 그는 손을 젓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이제 검도 생겼겠다. 슬슬 시험해 볼 차례네.”
“용인화 말씀이시군요.”
악스판시온을 강화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용인화에서 오는 신체 부담을 서리스가 더 편하게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이제 가장 중요한 용인화를 시험해 볼 때가 온 것이었다.
“그걸 위해 내가 준비해둔 게 있지.”
혹시 마수라도 준비한 걸까?
그리 말한 아라만을 서리스가 기대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씨익하니 웃었다.
“딸내미!”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맞춰 서리스의 앞에 한 여성이 탁하고 착지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도로시였다.
“도로시?”
서리스가 도로시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는 허리춤에서 세 개의 마수 조각을 꺼내 들었다.
“직계님, 나는 이제 슈퍼 파워 도로시 님이야! 앞으로 그렇게 부르도록 해!”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렇게 자신감이 올라간 걸까.
서리스가 의아하게 그녀를 보던 순간 도로시는 세 개의 마수 조각을 이미 자기 입에 넣고 있었다.
도로시의 마왕화가 이중까지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서리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도로시의 모습이 뒤바뀌었다.
허리 뒤로 솟은 늑대 꼬리 세 개는 윤기 나는 붉은 털을 자랑하며 옅은 불길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갑주를 입은 듯 어깨와 팔 위에 둘린 단단한 껍질.
마지막으로 양손에 쥐어진 뼈로 된 검.
마왕화(魔王化)
삼중(三重)
데이모스•아드랄칸•염화랑(炎火狼)
마왕화를 삼중으로 엮어낸 도로시가 그곳에 있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그녀로부터 느껴지지 서리스의 두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서리스가 훈련했던 동안 도로시도 아라만을 통해 마왕화를 배워 성장한 것이었다.
“이거 깜짝 선물이네.”
“후후, 이게 바로 슈퍼 최강 도로시 님이야.”
“아까는 슈퍼 파워 도로시 님이라면서?”
“자잘한 건 따지지 마!”
서리스는 어이없어하며 악스판시온을 쥐곤 천천히 그림자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 봐줄 거다.”
“바라던 바야.”
도로시의 미소를 보고 서리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오랜만에 하는 도로시와의 대련이다.
서로의 성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러니.
“전력으로 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