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밤피르를 무사히 들고 귀환한 서리스는 하루 정도 휴식하며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윌즈베르크에서는 손님으로서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고, 덕분에 하루 만에 체력을 다 회복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서리스 님.”
밤피르를 챙긴 서리스가 아라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이랑이 다가왔다.
그녀 또한 서리스처럼 아라만을 통해 워너힐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같이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잘 다려진 워너힐 아카데미 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서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어제는 그, 잊어주세요.”
“네, 뭐, 저도 잘못했었으니까요.”
어젯밤, 서리스는 식사와 목욕을 마친 후 하녀에게 방을 안내받았었다.
그러곤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긴 다름 아닌 아이랑의 방이었다.
뒤늦게 방으로 돌아온 아이랑과 마주했을 때는 얼마나 뻘쭘했던지.
‘살롱이 직접적으로 뜻을 전한 수준이잖아. 이건.’
뒤에서 수작질 없이 정면으로 들이댄다는 선택에 서리스는 어이없는 기분마저 들어야 했다.
이건 대놓고 자신을 아이랑과의 연을 이용해서라도 포섭하고 싶다는 소리였으니까.
“아버님께서 멋대로 저지르신 일이라. 정말, 다시 사과드릴게요.”
아이랑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서리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뇨. 나쁜 뜻이 아니란 건 저도 잘 아니까요. 저도 아이랑 님께 실례를 끼쳐 드렸잖습니까. 많이 당황하셨을 텐데.”
“소녀야, 그, 서리스 님만 괜찮으시다면 상관은…….”
말끝을 흐리는 아이랑과 눈이 마주치자 서리스는 한차례 헛기침했다.
가문에 뜻이 있으니 아이랑도 어쩔 수 없이 저리 말하는 거로 생각하지만, 살짝 부끄럽긴 했다.
‘이놈에 인간들은 왜 자꾸 자기 딸들을 이용할 생각부터 하는지.’
물론 혈연이란 게 워낙 강력한 힘을 가졌으니 쓸 수 있다면 최고의 카드인 것은 알지만.
당사자들 처지에서는 난처하기 그지없다.
서로가 어색함에 침묵하고 있던 순간, 때마침 두 사람의 앞에 흐릿한 문의 형태가 나타났다.
“요, 하이하이! 고생했어!”
그리고 덜컥 열린 문과 함께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아라만이었다.
그는 서리스와 아이랑을 번갈아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정분났어?”
“아닙니다. 아이랑 님, 이동하시죠.”
“네, 넷!”
얼굴을 들지를 못하는 아이랑과 함께 서리스는 바로 서리 마탑으로 넘어왔다.
언제 봐도 이런 공간 도약은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다.
“아라만 님, 아이랑 님을 워너힐 아카데미로 이동시켜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렵지야 않지.”
아라만은 윌즈베르크로 향한 문을 닫곤 문 위에 노크를 두 번 하였다.
그러자 문의 색이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그걸 다시 열자 워너힐 아카데미 본관이 보였다.
“자, 여기.”
아라만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리스는 아이랑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섰고, 곧 서리스를 힐끔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럼 서리스 님, 돌아오실 때는 또 얼마나 강해져 계실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아이랑은 아쉬운 듯 서리스를 다시금 바라보았지만, 곧 고개를 숙이곤 문을 넘어 나갔다.
“아라만 님, 여기 밤피르입니다.”
“오, 잘 구해왔네!”
그녀가 돌아가고 나서 서리스는 곧장 아라만에게 밤피르의 시체를 전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야왕의 시체도 넘겨주었고, 그는 이에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괜찮은 게 나올 거 같아! 아, 물론 어차피 내가 만들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토르게아입니까?”
명장 토르게아 일족.
무언가를 만드는데 이골이 난 그들은 수많은 무기를 만들어냈다.
발렌타인의 귀왕령부터 서리스가 가진 악스판시온까지.
그들의 만드는 재능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리 섭외해놨지! 그쪽으로 바로 가보자고.”
아라만은 자기가 쓸 무기가 아님에도 신이 난 듯 말했다.
또 한 번의 공간 이동을 한 서리스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공방을 보고 크게 놀랐다.
호흡기를 달구는 강한 열기와 비릿한 쇳덩이 냄새.
거기에 귀를 강렬하게 때리는 망치질 소리와 담금질로 피어난 뿌연 연기.
용암이 흐르는 산 하나를 통째로 공방으로 만들어낸 이곳이 바로 공방 토르게아였다.
‘나도 여긴 처음인데.’
듣기만 들어봤지 직접 오는 건 처음이었던 서리스는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대장장이들을 힐끗 보았다.
저들 전부가 토르게아 소속인 걸까?
“그림자 아이, 거기서 뭐 해? 얼른 가자!”
“아, 예.”
아라만의 부름에 서리스는 넋 놓고 구경하던 걸 멈추고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라만을 알아본 대장장이들이 종종 인사를 해왔다.
아라만은 이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인사를 대강 흘려 넘겼지만, 그는 상당한 유명인사인 듯하였다.
“아라만 님, 토르게아에 자주 오셨습니까?”
“종종? 구상한 걸 만드는 데 내 마법이 필요한 때도 있으니 말이야.”
일종의 협력 관계였구나.
주변을 신기하게 보던 서리스는 잠시 후 커다란 문 앞에 섰다.
마치 절벽을 직접 깎은 듯한 거대한 문은 서리스가 한참을 올려다봐도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예약을 잡았는데.”
“예, 마왕 아라만 님, 확인하였습니다.”
그런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아라만의 신분을 확인하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마치 절벽이 열리는 느낌과 함께 문이 사람 한 명 정도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렸다.
그것을 신기하게 보고 있다가 아라만이 성큼성큼 발을 옮기길래 서리스도 그의 뒤를 따랐다.
토르게아가 처음이라 그런지 뭘 봐도 신기하게 느껴지는 통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후우웅!
그러는 순간 서리스가 지나가는 바로 옆에서 뜨거운 연기가 한 번 샘솟았다.
서리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고, 저 멀리 화산 속 용암이 울컥거리며 흘러내려 가는 모습이 보였다.
과연 소문대로 화산의 열기로 무기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여기야! 다 왔어!”
그러는 사이 아라만이 도착을 알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천으로 대충 막아 놓은 입구를 아라만이 손으로 젖히며 들어가자 서리스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밝은 발광석 빛이 내리쬐는 그곳에는 수많은 무기가 장식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질이 남다른 무기들을 보고 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아라만은 안으로 걸어가 작은 쪽문을 두드렸다.
“바루그, 나왔어.”
“늦었군.”
그 순간 문 중앙에서 사람의 입이 나타나며 대답하였다.
그 기괴한 모습에 서리스가 몸을 굳히고 있자 아라만은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하게 웃었다.
“늦기는 무슨, 금방 왔는데.”
“네 기준으로 금방이라는 건 언제나 늦는 거다.”
그렇게 말한 입이 수욱 사라지고, 안에서 누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끼익하고 문이 열리자 거기에는 작은 키에 딸막한 몸매를 가진 노인이 서 있었다.
숯검정이 잔뜩 묻은 장갑을 낀 그는 고글 하나를 쓰고 있었는데 그 렌즈 너머로 아라만과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한 게 저 녀석이냐?”
“맞아. 이쪽 출신 무기도 하나 가지고 있어!”
아무래도 아라만과 상당히 친한 듯한 바루그는 턱을 매만지곤 이쪽으로 걸어왔다.
머리 세 개는 족히 차이 날 서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보여봐라.”
“아, 예.”
역시 아라만과 친분이 있는 이라 그건가.
서리스가 그 즉시 그림자에서 악스판시온을 꺼내자 바루그의 눈이 한차례 번뜩였다.
“펜타니엄 녀석이로군.”
“맞습니다.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아직 어린놈이 그림자가 잘 단련돼 있어. 악스판시온 녀석이 이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처음 보는군.”
그 말을 듣고 서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혹시 악스판시온을 만드신 게…….”
“나다. 토르게아 만 바루그. 그 녀석을 만든 대장장이지.”
그의 풀네임을 듣자마자 서리스가 입을 벌렸다.
토르게아와 바루그 사이에 들어가는 만.
그 단어는 토르게아 내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들에게만 붙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받기가 얼마나 까다롭냐면 아무리 토르게아 소속의 장인이라 한들 실력이 모자라면 가차 없었다. 그 대에 이를 아무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락로드가 누구에게 이런 걸 만들어 왔나 했더니.’
설마 만이 들어간 명장의 작품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긴, 악스판시온의 성능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뭘 만들어 달라고?”
악스판시온을 다 훑어본 바루그가 아라만을 돌아보자 어느새 탁자에 올라앉아 있는 그가 미소 지었다.
“그림자 아이가 기술 하나를 사용하는데, 그게 몸에 가는 부담이 심하거든. 그걸 좀 줄여 줄 물건이 필요해.”
“부담? 이런 녀석한테 무슨 부담이냐. 몸에서 별이 쏟아져 나오다 못해 터져 나오고 있는데.”
이미 서리스의 기운을 눈치챈 바루그가 어이없어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바로 보여주면 그만이지.”
아라만이 서리스를 돌아보자 그는 잠시 쓰게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명장의 무기를 받게 될 상황인데, 용인화 하나 못 보여 주겠는가.
서리스가 자세를 잡자 바루그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대충 가져와 앉았다.
그러곤 시큰둥하게 이쪽을 보자 서리스의 몸 위로 그림자가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생겨난 그림자는 그의 육체 위를 뒤덮으며 비늘을 만들었다.
용인화.
이제는 발동 시간도 상당히 빨라진 서리스가 숨을 내쉬며 용인화를 발동시키자 쿠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바루그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당황한 서리스가 급히 용인화를 풀며 다가가자 그는 끅끅 소리를 내며 허리를 매만지곤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네 녀석, 그 힘은 어디서 얻었냐.”
“힘 말입니까?”
설마 검은별을 말하는 걸까?
무려 검은별을 이용해 악스판시온을 만들어낸 그다.
서리스가 조금 긴장한 채로 그를 보고 있자 바루그는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파림, 그 이름을 아느냐?”
그리고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서리스의 눈이 부릅떠진 순간 그는 혀를 찼다.
아라만만이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제파림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이를 가르쳐 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네가 개죽음만 당하지.”
“그건 압니다. 단지, 그냥 알 수 있다면 알고 싶어질 뿐입니다.”
용제의 힘을 이은 이상 서리스는 적어도 그의 넋두리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그 넋두리 중에는 그의 동생이자 용신의 열쇠가 되어버린 제파림 또한 존재한다.
설마 바루그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서리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모른다. 20년 전에 갑자기 여길 찾아와 난장판을 만들고, 나한테 무기를 만들라고 한 뒤로는 본 적도 없으니까.”
20년 전.
서리스가 막 태어난 시기다.
너무 오래된 옛날이었기에 인제 와서 정보를 얻는다 한들 도움은 되지 않으리라.
“나만 지금 상황이 뭔지 모르는 거야?”
아라만이 소외감을 느낀다며 말을 걸자 바루그는 그를 한심하게 보다가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만들어주마.”
“예?”
“제파림 놈에게는 우리 토르게아가 당한 게 있다. 꼴을 보아하니 네 녀석도 원한 아닌 원한으로 이어져 있지?”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토르게아의 몫까지 복수해 주면 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에 토르게아가 조금 더해졌을 뿐이다.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된 거지?”
아라만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바루그는 서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져온 거 다 내놔라. 그리고 악스판시온도.”
“악스판시온을 말입니까?”
“만드는 거, 처음부터 만들 필요 있나. 딱 맞는 소재가 있는데 안 써먹을 이유는 없지.”
아무래도 그는 악스판시온에 무언가 심어 줄 모양이었다.
“대작을 만들어주마.”
동시에 서리스는 알 수 있었다.
장인의 혼에 강렬한 불이 붙었다는 것을.
아무래도 제파림을 향한 그의 원한은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뜻밖의 수확이라 봐야 할지.’
제파림 덕에 이름에 만이 들어간 명장이 진심으로 망치를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