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신룡월단을 이용해 난쟁이 하나를 해치운 서리스는 야왕의 영체가 휘두른 낫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밤의 안갯속에서 드러난 야왕의 영체는 팔이 여섯 개나 달린 괴기한 모습이었는데.
아이랑의 말마따나 서리스보다 머리 몇 개는 더 큰 거대한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다른 손에 쥔 대포 같은 것에서 충격파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본체가 죽으니 당황스럽냐?”
모습을 드러내며 근접전을 택한 것만 봐도 놈이 당황했다는 게 훤히 드러났다.
그런 놈은 서리스의 도발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마구잡이로 낫을 휘둘러 왔다.
거기에 더해 다른 손들에서도 하나둘 낫이 더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서리스는 혼자서 다수의 사람과 맞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서리스 님! 한 마리 더 잡았어요!”
그러는 순간 영체의 등 뒤로 난쟁이의 머리를 쥔 아이랑이 보였다.
그녀의 힘으로 죽이지는 못하지만 잡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기이이익!”
그걸 보자 영체는 비명과 함께 아이랑에게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서리스가 이미 그 앞을 막고 있었다.
공격은 통하지 않아도 시간은 벌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서리스는 아이랑을 향해 외쳤다.
“아이랑 님! 이쪽으로 던져 주세요!”
“예!!”
척하면 척이라는 듯 아이랑은 투포환을 던지는 자세로 난쟁이를 서리스에게 던졌다.
날아든 난쟁이가 비명을 지르자 영체가 급히 그를 받으려 했지만, 서리스가 놈보다 빨랐다.
서걱!
서리스의 검이 영체의 손과 함께 난쟁이를 동시에 베어 갈랐다.
당연히 거기에는 신룡월단의 기운이 더해져 있었고, 그 덕에 깔끔한 검로가 허공에 그려졌다.
“기어에에에엑!”
영체의 손은 바로 복원되긴 했지만, 순식간에 본체 둘을 잃은 놈은 폭주하듯 함성을 내질렀다.
“네가 죽는 건 시간 문제겠다.”
서리스는 그런 놈을 비웃으며 아이랑에게 흑마녀로부터 전달받은 위치를 계속 브리핑했다.
그 순간에도 영체는 계속해서 서리스를 뚫고 아이랑에게 가고자 했지만.
그는 이를 끈질기게 저지했다.
놈의 공략법을 알게 되니 그 뒤로는 수월하게 전투가 흘러갔다.
그렇게 살아남은 야왕의 본체가 2개가 된 시점.
“서리스 님!”
아이랑이 또 한 번 그를 부르며 난쟁이를 던졌고, 이를 서리스가 그대로 베어냈다.
남은 야왕의 목숨은 하나.
그 순간, 죽음이 코앞에 닥친 야왕의 영체가 갑자기 몸에다가 자기 무기를 쑤셔 박기 시작했다.
저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놈을 저지하려고 서리스가 검을 휘둘렀으나 검은 야왕을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
뭔가 온다.
이것이 마지막 발악임을 깨달은 서리스는 즉시 자세를 바꿨다.
콰앙!
그 순간 서리스는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뒤로 길게 밀려났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서리스는 놈을 바라봤고, 야왕의 등 뒤에는 조금 전까지 놈이 손에 들고 다루던 대포가 세 개 솟아나 있었다.
그와 함께 팔 대신 자라난 다양한 무기들.
놈은 그야말로 괴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야왕은 서리스를 한 번 노려보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 행동은 명백히 아이랑을 노리겠다는 거였다.
놈은 등 뒤로 충격파를 내뿜으며 안갯속을 뛰쳐나갔다.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뺏긴 서리스는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야왕의 영체를 뒤쫓는다 한들 놈을 막아설 수 있을까?
현재 놈에게는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조금 전처럼 검이 그대로 통과해 버린다면 아이랑이 당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리스는 그 즉시 그림자를 전신에 둘렀다.
“흑마녀!”
“오른쪽 20도 방향 350미터.”
흑마녀가 눈치 빠르게 대답한 순간 서리스의 전신이 흑색의 비늘로 뒤덮였다.
기다란 검은 뿔 두 개가 솟아난 그 순간 용의 형태가 완성된 그의 두 다리가 바닥을 우그러트렸다.
그리고 서리스의 인영이 사라졌다.
콰아앙!
뒤이어 소리가 그를 뒤쫓은 순간 그는 한 번의 도약만으로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기익?”
고작 초 단위의 시간이 지난 순간.
서리스의 눈앞에 난쟁이가 포착되었다.
놈은 사태를 파악 못 한 듯 이제야 서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놈의 방어막은 지금까지 난쟁이 놈 중 가장 강력해 보였다.
하나, 신룡월단 앞에서는 전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서리스의 검 위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악스판시온 전체에 두른 그 기운과 함께 서리스의 두 눈이 안광으로 번뜩였다.
신룡월단.
그 첫 번째 식.
신룡월단(神龍狘斷)
일식(一式)
용섬(龍殲)
용을 죽이기 위한 검이 난쟁이를 갈랐다.
“……!”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반 토막 난 난쟁이의 시체가 용섬의 여파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걸 보자마자 용인화가 풀리며 물려온 탈력감에 바닥을 뒹굴다시피 쓰러진 서리스는 그 즉시 고개를 들었다.
“아이랑 님!”
만약 난쟁이를 다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체가 살아있다면 아이랑이 당했을 수도 있다.
“서리스 님?”
사실상 도박 수를 던진 것이었기에 서리스가 급히 영체가 튀어 나간 쪽으로 가려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다름 아닌 뒤쪽이었다.
놀란 서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고개를 내미는 아이랑이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서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변한 영체가 소녀 쪽으로 오길래 급히 이동했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네 마리째가 죽으니 폭주하더군요. 아마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거였군요. 큰일 날 뻔했네요.”
그리 말한 아이랑은 몸이 갈가리 찢긴 난쟁이를 내려다보았다.
“저희가 야왕을 잡았네요.”
“아이랑 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혼자서는 못 이겨냈을 거니까요.”
“소녀가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도움이 되다마다.
사실상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아이랑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6층 구역부터는 모든 감각이 무뎌져서 본체를 찾을 수 없었는데, 놈이 4층까지 올라와 준 거 자체가 운이 좋았네요. 돌아가는 대로 본가에 보고해야겠어요.”
야왕은 자기가 살던 구역의 이점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노리고 올라온 건가.
그만큼 서리스의 검은 별은 마수에게 예민하게 작용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계 침식은 결국 용신에 의해 멸망한 세계의 잔재니까, 그곳에서 태어난 마수들은 용신과 관련된 거에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품은 서리스는 야왕 때문에 놓쳤던 밤피르를 떠올렸다.
야왕 자식, 마지막에 나타나서 방해해 버리기는.
“아이랑 님, 죄송합니다. 지치신 건 알겠지만, 밤피르를 찾는 데 조금만 더 도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랑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으며 서리스가 그리 말하자 그녀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미소와 함께 어딘가를 가리켰다.
“서리스 님, 저쪽으로 같이 가보시죠.”
그가 의아함을 품으며 그녀를 따라가자 밤안개 한구석에 피부가 다 벗겨진 마수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놈은 머리가 돌아가 있었는데, 한참 전에 절명했던 듯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밤피르?”
“아까 야왕이 처음 저희를 기습했을 때, 거기에 당했던 모양이에요. 소녀가 미리 봐뒀었어요.”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뜻밖의 상황에 서리스는 실소를 터트리곤 밤피르를 들어 올렸다.
“헛고생은 아니었단 거군요.”
“그런 셈이죠.”
서리스와 아이랑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윌즈베르크 가주실.
의자에 앉아 자신에게 보고된 서류들을 읽고 있는 윌즈베르크의 가주 살롱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랑과 서리스가 귀환했다는 소식과 함께 자기 딸이 올린 보고서 내용 때문이었다.
‘야왕을 쓰러트렸다라…….’
오늘 들어온 보고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코 야왕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랑이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에 들어가기 직전 보고된 내용.
그건 바로 야왕의 본체인 난쟁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보고를 올린 건, 다름 아닌 둘째 아들인 디오랑이었다.
형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준수한 실력을 지닌 그는 6층 구역에서 마주친 야왕과 그 근처를 배회하던 난쟁이를 발견했었고.
조심히 가문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가 물러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난쟁이에게 있는 방어막 때문이었다.
어떠한 공격을 퍼부어도 뚫리지 않는 절대적인 방어막.
디오랑은 난쟁이의 비웃음 소리를 들으며 야왕을 피해 결국 도주해야만 했다.
‘그런 야왕을 둘이서 잡아 왔다.’
디오랑도 깨지지 못한 방어막을 아직 미숙한 아이랑이 깨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전히 서리스 혼자서 야왕을 해치웠다는 소리가 되는데 그의 나이를 떠올리며 살롱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스무 살.
고작해야 스무 살인 녀석이 혼자서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에 6층 구역까지는 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 더 들어갈 수 있을 거다.’
디오랑과 달리 서리스는 야왕을 쓰러트렸다.
그 말인즉슨 더 아래로 내려가도 문제가 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어이가 없군.’
윌즈베르크의 정보력은 뛰어나다.
일곱별조차도 닿지 못하는 새로운 신성이 나타난 거야 진작 파악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그도 상상 못 했다.
‘시대가 바뀐다. 이 소리인가.’
그는 가볍게 탁자 위를 검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머지않아 월하십인에 한자리를 꿰찰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천하오장성을 노릴 것이고.
‘현재 천하오장성은 검왕을 제외하면 모두 다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머지않은 시간 안에 자신은 지금 저 새파랗게 어린 스무 살 청년과 자웅을 겨루게 된다는 걸까.
이거 참, 너무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런 천하오장성조차 길지 않을 거다.’
거기서 더 시간이 흐른다면 그는 분명히 천상사성의 자리까지 노리겠지.
저건 재능의 덩어리 그 자체였으니까.
만약 자신이 서리스였다면 마치 모든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자신과 아내를 마주한 그의 눈에서 오만함 따윈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저 밑바닥에서부터 악착같이 기어 올라온 듯한 집념이 가득 담긴 눈.
그리고 그런 자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살롱은 알고 있다.
자신이 딱 한 번 죽을 뻔했던 무황 강혼도 꼭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인 줄 알았더니. 전부 제 손으로 쥐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혼잣말을 조용히 내뱉은 살롱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아직은 그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인물은 아니나 지닌 것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윌즈베르크조차 정보가 부족한 용제의 후계자를 자칭할 정도라 하니.
길지 않은 시간 내에 그를 중심으로 시대가 바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시대에 맞춰서 움직여야지.’
늙은 노장이 되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는 것을 택할 생각은 없다.
천하오장성 암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흐름에 편승해 나아가리라.
어둠 속에서 붉은색으로 물든 살롱의 두 눈이 그렇게 조용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