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89화 (189/275)

189화

아이랑과 함께 서리 마탑으로 돌아온 서리스는 곧장 윌즈베르크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힐로즈에게 알려야 하는 것도 있고, 당분간 윌즈베르크에서 지내야 하는 만큼 짐도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랑 쪽에서는 서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도로시와 같이 개인 훈련을 위한 자율 학습을 신청한 뒤, 짐을 챙겨 왔다.

“음, 그런 거라면 허락 안 할 이유가 없는걸.”

다행히 힐로즈는 군말 없이 이를 허락해 주었다.

이번 훈련은 천하오장성인 아라만에게 받는 훈련이다.

그 아라만이 직접 갔다 오라 한 만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서리스는 짐을 챙긴 뒤, 바로 아라만을 찾아왔다.

“왔네. 이쪽은 준비 다 끝났어. 윌즈베르크에서도 허락 떨어졌거든.”

대가문에 방문해야 하는 만큼 아라만은 미리 저쪽에 연락을 넣어 놓았다.

여기에 아이랑이 있는 만큼 허락은 별문제 없이 떨어졌고, 남은 건 아라만이 공간 이동문을 열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도로시, 갔다 올게.”

“엉, 직계님. 다녀오면 나 엄청나게 강해져 있을 테니까 기대해.”

“무지막지하게 기대해 주마.”

그렇게 서리스는 도로시와 짧은 농담을 주고받은 뒤, 아이랑의 옆에 섰다.

아이랑은 잠시 도로시 쪽을 보다가 이내 서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서리스 님은 도로시 님이랑 무척 친하시네요.”

“16살 때부터 매일 같이 얼굴 보고 지냈으니까요. 아무래도 그렇죠.”

“4년, 기네요.”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아이랑을 보고 서리스가 의아해하는 사이에 어느새 만들어진 유리문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갔다 와. 돌아올 때 연락 주면 또 열어줄게.”

아라만이 시간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손을 흔들어주자 서리스는 감사 인사를 하곤 문을 넘었다.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기묘한 감각이 몸을 스쳐 갔고, 이내 둘은 땅을 디디고 섰다.

서리스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까만 성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뒤로 보이는 새까만 거성.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윌즈베르크의 외성과 내성 사이였다.

서리스가 색깔 탓인지 살짝 음침해 보이는 것 같은 성을 올려다보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아이랑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윌즈베르크에 온 걸 환영해요. 서리스 님.”

“감사합니다. 윌즈베르크는 저도 처음이네요.”

“후후, 소녀도 외부인을 직접 데려온 건 처음이랍니다.”

아이랑은 뭔가 즐거운 듯 그렇게 말했다.

왜인지 평소보다 텐션이 높은 그녀였다.

“아이랑 아가씨.”

그러는 순간 두 사람의 앞에 한 노 집사가 나타났다.

새하얀 수염과 머리가 눈에 띄는 그는 아이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었고, 그녀도 이를 익숙하게 받았다.

“리어브레드, 아버님과 어머님은요?”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서리스 님, 우선 저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영원히 그치지 않는 밤은 윌즈베르크에서 담당하고 있는 최흉이다.

그런 만큼 서리스도 윌즈베르크의 가주에게 먼저 인사드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랑은 그 말에 미소 짓곤 ‘따라와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랑을 따라 성 내부로 들어가자 의외로 내부는 새하얀 색이었다.

바깥과는 대비되는 그 색깔을 신기한 듯 보고 있자 앞서가던 아이랑이 말했다.

“저희 가문에는 어둠에 익숙해지되 자신의 빛을 잃지 말자는 말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거든요. 성도 그런 가풍이 적용된 거죠.”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펜타니엄은 이렇지 않나요?”

“저희야 뭐, 대체로 평범합니다.”

아이랑에게 있어서 평범함이 어느 기준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이 복도를 걷던 순간이었다.

또각또각―

복도 끝에서부터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서리스와 아이랑의 시선이 동시에 그 방향으로 향했고, 거기에는 한 미형의 남성이 서 있었다.

아이랑과 같이 흑수정 같은 머리색이 뒤섞인 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그는 이쪽을 보자마자 걷는 속도를 올렸다.

이내 그 속도가 달리는 정도에 이르렀을 때, 아이랑은 귀찮은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동생!”

달려오자마자 아이랑을 끌어안으며 들어 올린 그는 키가 서리스와 비슷할 정도로 크고 훤칠했다.

마른 몸이라 체격 차이가 나긴 하나 상당한 키를 가진 그는 아이랑을 품에 안고 한 바퀴 돌았다.

‘윌즈베르크 다이롱.’

윌즈베르크의 직계이자 장차 윌즈베르크를 물려받을 첫째. 그리고 현역 월하신입인 그의 등장이었다.

과거 암성이라 불렸고, 지금은 암주(暗主)라 불리는 그는 아이랑을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응시했다.

그녀는 그것이 부담스럽다는 듯 얼굴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라버니, 그만 놔주세요.”

“아아, 아이랑 너 혈귀를 떼어 냈구나!”

“그만, 그만 좀.”

아이랑의 말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얼굴을 비볐다.

그게 계속되자 열이 뻗친 아이랑은 이내 눈 색이 붉어지더니 그를 그대로 들어 내던져 버렸다.

“놓으라고!”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 바닥을 나뒹구는 다이롱을 보고 서리스는 조용히 눈을 돌렸다.

아이랑은 그제야 자기가 저지른 짓이 떠올랐는지 흠칫하곤 서리스를 돌아보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서, 서리스 님, 죄송해요. 저희 오라버니가 좀 주책이라서.”

그녀가 애써 그리 말하길래 서리스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오빠분과 우애가 참 돈독하시군요. 저도 남동생 녀석이 있어서 잘 압니다.”

“그, 그렇죠. 친해서 이런 거랍니다.”

자신은 제로를 두들겨 패긴 해도 저렇게 날려 버리지는 않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펜타니엄에 들린 김에 제로 녀석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어느새 일어나 옷을 털고 있는 다이롱을 보았다.

“흠흠, 미안해. 아이랑, 오랜만에 내 동생 얼굴을 봤더니 기뻐서 그만.”

그녀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인지 그는 아이랑을 무척이나 아끼는 듯하였다.

펜타니엄 첫째인 락스카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 서리스가 신기하게 보고 있자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 아이랑을 따라온 그쪽은 누구실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웃고 있음에도 상당히 날이 서 있는 듯했다.

“……오라버니, 서리스 님이 온다는 건 소녀가 가문에 미리 말해놨을 텐데요.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말씀하시죠?”

“아, 그랬나. 내가 건망증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정식으로 소개받을 수 있을까?”

그리 말하는 다이롱의 두 눈동자에서는 뭔지 모를 열기가 느껴졌다.

서리스는 어째서인지 독왕 불터렉스 그릭슨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기분을 지금 느꼈다.

마치 시험대에 오른 느낌이랄까.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아아, 펜타니엄 서리스,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나름 유명인이라 기억하고 있었어.”

뭔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느낌인데.

“반가워. 나는 윌즈베르크 다이롱, ‘우리 아이랑이 가장 사랑하는 오라버니’야.”

굳이 강조까지 하는 그를 보고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랑은 이마를 감싸며 기다랗게 한숨을 쉬곤 서리스의 옆에 붙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께서 소녀를 좀 많이 아끼셔서. 서리스 님께 폐를 끼칠 것 같으니 무시하도록 해요.”

“아뇨. 아이랑 님의 오빠분이신걸요. 제가 잘해야죠.”

그는 무려 윌즈베르크의 가주가 될 사람이다.

아이랑이 아니어도 서리스가 그를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가주를 이어받을 생각은 없어도 여전히 이런 처세술이 몸에 배어 있는 서리스였다.

“우리 아이랑이랑 그렇게 가까이 붙어서는 뭘 그리 속닥거리는 걸까?”

“아, 죄송합니다. 아이랑 님께서 다이롱 님의 칭찬을 자주 하셔서요. 저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 정말? 우리 아이랑이 내 이야기를 자주 해?”

그 말을 하자 아이랑이 서리스를 쏘아 보았다.

그러나 서리스가 그녀에게 미안한 눈빛으로 미소를 짓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다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했죠. 서리스 님한테는 이것저것 이야기 많이 했으니까요.”

그렇게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만 서리스는 그녀가 입을 맞춰줬음에 감사했다.

“아이랑 님께서 누구를 닮아 이렇게 예의 바르시고 곱게 자라셨나 했더니 아무래도 다이롱 님을 닮은 모양입니다.”

“하, 하하! 그렇지. 우리 동생을 내가 어릴 때부터 업어 키워서 말이야! 워낙 혼자 잘하는 아이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내가 열심히 돌봤거든!”

그는 아이랑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 서리스는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정말입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서도 아이랑 님의 활약은 대단했거든요. 언제 차나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해 드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아이랑의 아카데미 이야기? 어, 좋아! 좋지! 너 좋은 녀석이구나! 이야, 보기 드문 친구야!”

다 넘어왔군.

“예, 정말 누구한테 시집을 가실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동생분을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말이 이어진 순간 다이롱의 미소에 금이 가더니 이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이랑은 혼자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나가.”

“예?”

“나가!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악!”

그가 별까지 끌어모으며 미친 듯이 날뛰자 서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뭐에서 실수한 거지?

“오라버니, 그쯤 하세요.”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보다 못한 아이랑이 다이롱에게 호통을 쳤다.

“서리스 님은 소녀의 손님이에요.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이리 무례하게 구시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아, 아이랑! 하지만, 저 녀석이!”

“됐어요.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앞으로 오라버니랑 아무 얘기도 안 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

아이랑의 두 눈이 차갑게 식자 다이롱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면서도 서리스를 향해 보내는 적의는 숨기지 않았기에 그는 조용히 눈을 피했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이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이만 가시죠. 서리스 님.”

더 이상 다이롱을 상대해 주지 않겠다는 듯, 아이랑이 매몰차게 발걸음을 옮기자 서리스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뒤통수로 다이롱의 강렬한 시선이 꽂혔지만, 서리스는 이를 애써 무시했다.

“저, 서리스 님.”

그런 도중 아이랑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서리스가 그녀를 돌아보자 아이랑은 딴청을 피우듯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아까 누구한테 시집갈지 모르겠다고 하신 말.”

“아, 그거 말입니까.”

너무 입에 발린 소리였나.

“서리스 님은 소녀가 누구한테 가는 게 좋을 거 같나요?”

아이랑의 말을 듣고 서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이내 아이랑도 그런 걸 신경 쓸 나이라는 것을 서리스는 뒤늦게 인식했다.

그녀도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스무 살인 것이다.

“아이랑 님이 원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소녀의 욕심이지 않나요.”

“아뇨. 아이랑 님은 매력적이신 분입니다. 연심을 품은 상대에게 그 마음을 전하기만 한다면, 상대가 누가 됐든 바로 받아들이겠죠.”

이럴 때는 어른으로서의 조언이 필요한 법이다.

비록 결혼도 못 해보고 죽은 몸이긴 하나 이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저, 정말요?”

아이랑이 놀란 표정으로 서리스를 돌아보자 그는 덤덤히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죠.”

“다행이네요.”

서리스가 보기에 아이랑은 여태 주변인들의 칭송을 들으며 자랐을 것 같은데 의외로 자존감이 낮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둘은 어느새 가주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랑이 먼저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렴.”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아이랑이 문고리를 잡고 밀자 끼익하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서리스는 천하오장성 중 네 번째 인물과 대면했다.

암왕(暗王)

천하오장성(天下五長成)

윌즈베르크 살롱

윌즈베르크의 가주인 그가 서리스와 아이랑을 맞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