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스타리즈,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나?”
그날 아침, 서리스는 스타리즈를 찾았다.
아침잠이 많은 그는 서리스를 자신의 방에 들여놓고도 한참 졸다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아, 그 뭐고, 저번에 도로시 가 얘기 말이제?”
그가 눈을 비비며 되묻자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 보겠다드나?”
“어, 그래서 그런데…… 훈련 들어가기 전에 부탁 좀 해도 될까.”
스타리즈는 기지개를 쭈우욱 켰다.
그러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더니 씩하니 웃어 보였다.
“알겠다. 바로 하자잉.”
그는 매고 다니던 가방 하나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석회 가루가 묻어 나오는 분필 하나를 꺼냈다.
“내는 장거리용은 바로바로 못 만드니까 좀만 기다리라.”
부탁하는 처지에 재촉까지 할 생각은 애초에 없던 서리스는 그가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곧 스타리즈는 바닥에 커다란 진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진의 정체는 바로 별자리였다.
원형의 틀 안에 스타리즈가 힘을 빌려 오는 별자리들을 하나씩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밤하늘 하나가 그곳에 만들어졌을 때, 스타리즈는 분필로 별자리들을 차례대로 이어 나갔다.
“이걸로 준비는 다 됐고.”
손을 탁탁 털며 석회 가루를 날린 스타리즈는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잠시 후, 그의 손에서 별 가루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천칭을 기울여 별의 힘을 인공적으로 만든 밤하늘에 불어넣고 있는 것이었다.
별 가루를 머금은 인공 밤하늘이 서서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밝기 빛나는 밤하늘을 타고 여러 별자리가 제각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황홀한 광경은 사람들이 어째서 마법을 신비의 학문이라 부르는지 잘 보여주는 듯했다.
짝!
양손을 모은 스타리즈가 손뼉을 치고, 그 손을 벌리자 그곳에는 어느새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눈을 감은 그가 한차례 숨을 들이 내쉰 순간, 대기의 진동과 함께 그의 앞에 노이즈가 생겨났다.
잘게 떨리던 허공의 노이즈가 이내 직사각형 형태로 공간을 갈라 내었고, 잠시 후 그 너머가 일렁거리며 나타났다.
서리스가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지내던 마왕의 저택 입구였다.
“후우, 끝났다. 자, 이제 데려오면 될 거다.”
“고마워.”
땀방울을 훔치는 스타리즈에게 감사 인사를 한 서리스는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이제는 익숙한 허름한 저택이 보였다.
아직 등교 시간 전이다.
도로시의 편지에서 워너힐 아카데미에 며칠 동안 개인 훈련을 위해 자율 학습을 신청해 놓았다고 적혀 있었던 만큼.
지금쯤 저택 안에 있을 것이었다.
‘바로 끌고 나와야겠다.’
스타리즈가 장거리용 텔레포트 게이트를 유지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자 서리스가 저택 앞으로 걸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팟!
갑자기 위쪽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잠깐 멈칫한 서리스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도로시가 있었다.
“도로시, 창문으로 다니지 말라니까!”
위쪽에서 서발광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 잘 지내는 모양이다.
“직계님!”
서리스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도로시가 먼저 몸통 박치기를 감행했다.
이게 그녀 나름의 반가움 표시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서리스는 능숙하게 도로시의 목덜미를 낚아채 들어 올렸다.
“잘 지냈냐.”
“지냈어!”
“어, 서리스!”
도로시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 서발광이 그를 발견했는지 반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에게 손을 흔들던 서리스는 내려오려는 서발광에게 말했다.
“미안, 바로 가봐야 해. 인사할 시간도 없을 거 같다.”
“앗, 알았어! 도로시, 잘 갔다 와! 사고 치지 말고!”
서발광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도로시의 사정을 잘 알아서인지 그녀를 더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서발광이나 서리스나 도로시와 함께해온 시간만 해도 벌써 4년이다.
이들 모두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서발광을 보고 서리스는 문득 한가지 말해줄 것을 떠올렸다.
“서발광, 아카펠 곧 아빠 되겠더라.”
“어, 정말!?”
깜짝 놀란 서발광에게 서리스는 씩하니 웃어주었다.
“아기? 누구랑?”
그러고 보니 도로시 녀석은 아카펠이 누구랑 사귀는지 몰랐던가?
서리스는 나중에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서발광에게 말했다.
“태어나면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아하하, 조카가 생겼네.”
그의 해맑은 미소를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은 덕분이겠지.
“갔다 올게.”
서발광과 인사를 나눈 서리스는 도로시를 땅에 내려 주곤 그녀와 함께 스타리즈가 열어놓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탔다.
그러자 주위 배경이 금세 스타리즈의 방으로 뒤바뀌었고, 도로시는 그게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 왔나.”
“마법쟁이, 오랜만.”
도로시와 스타리즈는 나름 같은 조로 활동해서인지 꽤 친해 보였다.
“이제 닫으면 되겠나?”
“어, 고맙다.”
서리스의 대답을 듣고 스타리즈는 다시금 손뼉을 쳐 텔레포트 게이트를 닫았다.
그러자 바닥에 있던 밤하늘의 빛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보면 볼수록 마법은 신기했다.
“여기가 아빠 집인가?”
도로시는 주변을 가볍게 훑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곳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의 집이었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리라.
“훈련 들어가기 전에 만나는 게 어떨까 싶기는 한데. 도로시.”
“응, 직계님.”
“너, 아라만 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생각해뒀어?”
워낙 해맑게 살긴 하지만 도로시는 나름의 아픔이 있는 아이다.
제나디아에서 그녀는 언제나 외로웠고, 가족의 정을 모른 채 자랐었으니까.
오죽하면 서발광과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겠는가.
그래서인지 서리스도 도로시가 걱정되긴 했다.
그저 막연하게 아라만을 만나기만 하면 그녀에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오히려 무책임한 걸지도 몰랐다.
이번 만남을 통해 오히려 골이 깊어질지도 몰랐으니까.
“조금은.”
도로시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 속에 담긴 감정을 느낀 서리스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에게 있어 샬롯 보다도 더 여동생 같은 도로시다.
“잘해.”
그제야 서리스의 손에서 온기를 느낀 도로시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너보다 특이한 사람이니까 당황하지는 말고.”
“직계님, 무슨 소리야? 나는 안 특이한데?”
“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선에서 가장 특이한 인물이 도로시건만 정작 그녀는 그런 자각이 전혀 없는 듯하였다.
이 녀석을 어찌해야 할까.
‘아카펠은 벌써 가정을 만들며 자리를 잡았는데.’
과연 도로시가 누군가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얼굴이 예쁜 편이라곤 하나 속이 이러니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됐다. 아라만 님에게 가보기나 하자.”
이런 걱정은 나중 일이라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곧장 도로시와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스타리즈는 좀 더 자겠다며 손을 흔들곤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수고해준 그에게는 나중에 뭐라도 하나 챙겨 줘야 할 듯싶었다.
“아빠가 죽으면 여기는 내 집이 되는 거야?”
“처음 보는 아버지 집을 보고 하는 말이 그거냐.”
해맑은 표정의 도로시가 던진 질문에 서리스는 기막혀했다.
무슨…… 강탈할 것처럼 말하는구만.
‘그것보다, 아라만 님은 도로시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이가 사십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도로시보다 자유분방한 그였다.
서리 마탑주나 천하오장성이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먼 그는 그야말로 괴짜라 불릴 만했다.
그래서인지 서리스는 도로시와 아라만의 만남이 꽤 걱정되었다.
혹시나 그가 도로시를 딸 취급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손으로라도 쥐어박는다.’
자기가 아버지란 자각도 없는 이는 맞아도 싸다.
그렇게 생각하던 서리스는 어느새 아라만의 실험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늘 이곳에서 먹고 자고 하는 만큼 오늘도 여기에 있을 것이었다.
서리 마탑에는 하인이 없다.
청소는 서리 마탑 건물에 걸려 있는 자체 클린 마법으로 필요 없고, 그나마 요리사 몇 명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서리스는 아라만을 만날 때 하인을 통해서 일정을 잡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직접 찾아와야 했다.
똑똑―
약간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며 서리스가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한 번 울려 퍼지더니 이내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라만 님…….”
끼익하고 열린 문을 보고 서리스가 입을 열려던 순간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멈췄다.
거기에는 알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동안인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몸만 작아진 아라만이 있었다.
“오, 좋은 아침!”
그 꼴로 힘차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또 그딴 모습인 겁니까?”
아라만의 기행에 슬슬 익숙해져 가기 시작한 서리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묻자 그는 자기 몸을 둘러본 채 말했다.
“영생을 연구해 보고 있었어. 마수 중에 자기 세포를 먹고 배출하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녀석이 있거든! 그 녀석을 이용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상상 이상의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서리스는 옆에 있던 도로시가 뒤늦게 생각났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도로시는 아라만을 보다가 곧 스윽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이런 게 내 아빠?”
그래, 네 아빠다.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나?”
알껍데기를 벗어 던진 아라만이 묻자 서리스는 잠시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런 망설임을 느낀 것인지 도로시는 서리스를 보곤 고개를 젓더니 이내 팔짱을 착하니 꼈다.
그러곤 이내 턱을 당겨 당당히 가슴을 펴더니 아라만을 향해 외쳤다.
“나는 최강 도로시! 당신 딸이야!”
이 녀석…… 어디서 이런 걸 배워온 거지.
아라만은 다짜고짜 딸 선언을 해버린 도로시를 황당하게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이내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내 딸?”
“응, 당신 딸.”
이게 딸과 아버지의 상봉이 맞을까?
서로를 한참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도 시선은 상대방에게 고정한 채였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서리스는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때, 아라만이 갑자기 발을 앞으로 내밀었고, 그에 맞춰 도로시가 발을 뒤로 뺐다.
“헐, 진짜네?”
방금 걸로 대체 뭘 알았는지는 몰라도 아라만은 도로시가 자기 딸임을 인정했다.
하긴, 둘의 기행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누가 봐도 딸과 아버지처럼 보였다.
특히 저 붉은색 머리카락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좋아! 내 딸 도로시! 따라와!”
그는 서리스 때와 같이 경쾌하게 외치며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서리스는 도로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라만은 어떨지 몰라도 도로시가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직계님, 나 손 한 번만 잡아줘.”
“그래.”
아라만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도로시의 말에 서리스는 순순히 손을 들어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아 주었다.
그러자 도로시는 한 번 깍지를 꽉 끼더니 이내 그 손을 마구 휘둘렀다.
“좋아. 풀 파워.”
뭔지는 몰라도 만족한 듯 도로시는 그 손을 놓곤 미소를 지었다.
“가자. 직계님.”
그걸로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안함의 잔재를 털어놓은 듯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걸 눈치챈 서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시에게 있어 이제는 소중한 것들이 넘치고 넘친다.
눈앞의 서리스도 있고, 서발광도 있으며 청란단도 있다.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있어 아라만이 어떤 사람이든 더 이상 큰 의미가 되지 못하기에 도로시는 여전히 씩씩하게 행동했다.
‘녀석, 언제 이렇게 컸대.’
이제는 아이가 아닌 도로시를 보며 서리스는 자신의 불안감이 쓸데없던 것임을 자각하며 그녀와 함께 걸었다.
앞으로도 도로시에게 든든한 아군으로서 살아가 주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