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서리스는 쉽사리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느 미친놈이 자기 몸에 직접 검은별을 심는단 말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은 눈앞에 있는 이가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기도 했다.
“이걸 심으니 보이는 게 많아지더라고! 그러니 나한테 숨겨봤자 소용없어. 그림자 아이한테는 너무 진하게 느껴지거든.”
검은별을 지닌 자는 검은별을 지닌 자를 알아볼 수 있다.
망아꾼과 흑마녀, 그리고 광견 또한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라만이 자신의 검은별을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서리스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아라만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를 적대할 생각이야? 그럼 좀 아쉬운데. 난 그림자 아이가 상당히 흥미롭거든.”
“그 흥미의 결과가 조금 전에 본 세계 침식자와 같은 꼴로 이어질지 모르잖습니까?”
“아하핫! 재밌네! 이래 봬도 나 꽤 많이 연구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림자 아이에게 해 끼칠 생각은 없어. 오히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정도야.”
그 말을 하자마자 아라만은 바닥을 자기 발로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그의 발아래에서 뻗어져 나간 공간이 문 하나를 만들어냈다.
보아하니 아까 자신들이 넘어온 거랑 비슷한 마법 같았다.
“천하오장성이라는 이름을 걸면 좀 믿어주려나?”
“저를 세계 침식자로 의심하지는 않는 겁니까?”
“딱히, 세계 침식자를 좀 여러 명 만나봤는데, 걔들이라고 해서 다 세계 침식만 생각하는 건 아니더라고.”
그러면서 아라만은 검은별이 새겨진 자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이걸 내 몸에 직접 심었다는 부분에서 이미 증명되지 않았어?”
그의 말대로 그가 세계 침식자를 다른 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면, 스스로에게 검은별을 심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서도 세계 침식자에 관한 다른 해석이 있으니 저런 거겠지.
“무엇보다 다른 별의 기운도 느껴지는 걸 보면, 그림자 아이도 나처럼 검은별을 인공적으로 심었다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느낀 이유는 저거 같다.
“……대화하는 건 좋습니다. 원한다면 연구에 쓸만한 이야기도 해드리죠. 대신 한 가지만 청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아라만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자 서리스는 줄곧 자신이 떠올리던 사람을 이야기했다.
“도로시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녀석을 한 번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리스의 말에 이건 예상 못 했었는지 잠시 눈을 깜빡이었던 아라만은 곧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자 아이한테는 중요한 거 같으니 그럴게! 그럼 이제 됐지!”
“예, 그러면 이제 진지한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천하오장성이라는 이름이 개나 소나 다는 것도 아니고.
리스크는 있어도 아라만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고민하던 기술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 안되면.’
서리스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검은색 브로치를 쥐었다.
흑마녀는 마제인 스타린을 상대로 무장공주를 빼 온 경력이 있다.
그녀의 힘이라면 마왕 아라만을 상대로도 자신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다.’
마치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아라만이 연 문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아라만이 연 문을 넘어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물건이 잔뜩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생물로 보이는 듯한 것들이 플라스크 병 안에 절여져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질겁할만한 것이었으나.
그가 가진 비기를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이상한 것도 없었다.
마왕화는 마수의 일부가 있어야 발동이 가능한 비기였으니 말이다.
미친 마법사의 실험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을 지나자 햇살이 잘 드는 유리 천장으로 이루어진 테라스가 나왔다.
조금 전에 지나온 장소와는 괴리감이 넘치는 곳에서 아라만은 새하얀 나무 의자를 빼 앉고는 서리스에게도 권했다.
서리스가 그를 따라 의자에 앉자 아라만은 허공에서 찻잔과 과자를 쑥쑥 꺼내곤 쿠키를 자기 입에 하나 던져 넣으며 우물거렸다.
다시 봐도 도로시가 떠오를 만큼 그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그림자 아이야, 혹시 검은별을 운용하는 거 보여줄 수 있어?”
쿠키를 다 먹은 그의 질문에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따라온 마당에 더 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보여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오, 기대되는걸!”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리스가 아라만에게 보여주려는 건 용인화였다.
광견을 보고 난 뒤, 자신의 목숨을 끊었던 태악룡에게서 비롯된 용인화는 서리스가 보기에도 아직 미숙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드페리널을 상대로도 써먹을 수 있었던 만큼 반드시 완성하고 싶었다.
‘이걸 완성한다면.’
분명 제왕월영도의 완성에도 한 발짝 더 다가갈 것이 분명했다.
서리스는 그림자에서 악스판시온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아라만의 두 눈에 더욱 흥미가 감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악스판시온이 검은별을 깎아 만들어진 검이라는 것을 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뒤로한 채 서리스는 차분히 심호흡했다.
깊게 들이쉰 호흡을 타고 금강잔월의 흐름 속에 검은별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광견과 같이 육체가 마수처럼 변해 버린다.
그 사실을 알기에 서리스는 뒤이어 그림자 속에 그 흐름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악스판시온을 쥔 팔을 타고 서서히 모든 그림자가 전신을 뒤덮어 갔다.
그러자 그림자는 서서히 그 형태를 뒤바꾸어 나갔다.
곧은 뿔과 등, 마치 용의 머리 같은 투구가 얼굴을 감쌌고 손과 발 부분 장갑에서는 마치 날카로운 발톱 같은 칼날이 돋아났다.
동시에 등허리 부근에서 생겨난 용의 꼬리는 칠흑 같은 비늘을 자랑하며 그 위용을 뽐내었다.
용인화(龍人化)
드페리널을 상대로 한계를 넘고자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던 기술이 또 한 번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윽.”
강렬한 부담을 느낀 서리스의 호흡이 흐트러지자마자 용인화는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그림자 갑옷은 사라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서리스는 몸을 잠식하는 탈력감에 거칠어진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그러곤 아라만을 돌아보자 그의 눈은 무척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저, 아라만 님?”
“대박이야!”
서리스가 그를 조심스레 부르자 아라만은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고민하고 있던 것을 그림자 아이는 직접 실현하고 있었구나! 이건 대박이야! 완전 대박이라고!”
뭐가 그리 기쁜지 모르겠지만, 아라만은 서리스의 용인화를 새로운 영역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내 옛날 제자 중에 그쪽 영역에 손대다가 조력자가 된 놈이 있었거든! 그 녀석은 결국 미쳐버리긴 했는데, 그림자 아이는 괜찮아 보이네? 마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야.”
제자와 조력자.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제자란 이가 혹시 광견이라 불리던 자입니까?”
“어, 맞아! 잘 알고 있구나!”
“제가 이 기술을 만들게 된 것도 광견과 맞선 뒤였으니까요.”
“헉! 그럼 그림자 아이와 나는 진작부터 인연이 맞닿아 있었던 거네! 이건 운명이야!”
그쪽 운명은 도로시지만.
너무 신나 보이는 그에게 조금 부담감을 느끼면서 서리스는 말했다.
“그래서 이걸 유지하는데 고생을 좀 하고 있습니다. 자칫했다간 광견과 같은 꼴이 날 것 같아서요.”
“확실히 불안정해 보이긴 하네.”
“혹시…… 마왕님의 고견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서리스가 조심스레 묻자 아라만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좋아. 조언할 거 생각났어! 정확히는 실험해 볼 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신나서 말한 아라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로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려니 아라만은 이내 여러 마수의 파편을 잔뜩 들고 테라스로 다시 나왔다.
그걸 본 서리스가 의아함을 품고 있자, 아라만은 그것들을 바닥에 늘어놓으며 이야기했다.
“그림자 아이가 그 기술의 모티브로 삼은 건, 아마 용 쪽 마수지?”
“아, 예, 맞습니다.”
서리스 인생에 있어 가장 강한 적은 태악룡이었으니 말이다.
“용 쪽 마수는 결국 인간과는 다른 몸을 지니고 있잖아? 용 마수로 이미지를 잡았는데 육체가 다르니까 반발이 있는 거야. 그러니 네 기운은 현재의 몸을 용처럼 바꾸려고 계속 움직일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한 감각이 가슴 한편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이대로 계속 용인화를 했다면 자기 육체가 태악룡처럼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이미지부터 조금 더 추가해 보는 거지. 용이 인간의 모습일 때를 떠올릴 수 있도록. 아, 찾았다!”
아라만은 마수들의 부산물 사이에서 비늘 하나를 들어 올렸다.
금색의 비늘을 든 아라만은 서리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잘 봐. 용이 인간의 모습이 된다면 어떤 모습인지를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모습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금빛의 비늘이 온몸에 돋아남과 함께 머리 위로 우뚝 솟은 여섯 개의 뿔 그리고 금색의 꼬리와 등 뒤로 돋아난 날개까지.
용이 인간이 되면 딱 이 모습이지 않을까.
마왕화를 사용한 아라만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게 바로 마왕 아라만이었다.
“그림자 아이가 지금 하는 건, 사실상 용의 형상을 한 갑옷을 겉에 두르는 것에 가깝거든.”
그러면서 그는 꼬리와 날개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보였다.
“그러니 이미지를 확실하게 하자 이거지. 갑옷이 아니라 진짜 용인으로서 말이야.”
충분히 일리는 있다.
서리스는 지금까지 태악룡을 떠올리고 그걸 몸에 둘렀을 뿐.
실제로 그 모습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 부담이 크기도 하고, 자칫하면 광견 꼴이 날 수도 있으니, 지금까지 자제해 왔었다.
“광견 모습이 되지 안 되도록 내가 옆에서 보조해 줄게.”
하지만 지금은 무려 천하오장성이 직접 봐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천운은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
서리스는 이번 기회에 기필코 용인화를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서리스와 아라만의 용인화 완성기가 시작되었다.
* * *
낮에는 아라만과의 용인화 수련.
그리고 밤에는 강기수식과 신룡월단을 익혀 나가며 서리스는 며칠을 보냈다.
덕분에 미적지근했던 성장 속도가 엄청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훈련의 피로감은 극심했으나, 그걸 뛰어넘는 성취감이 매일 같이 있으니 서리스도 홀린 듯이 훈련에 임했다.
‘7성 초입을 지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서리스는 자신의 성장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7성 초입에서 놀던 자신이 어느샌가 한 계단 더 올라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건 좀 너무 가파르긴 하네.”
최근 여러 기연이 겹친 덕분일까, 서리스도 사실 꽤 떨떠름한 기분이긴 했다.
아크 단원으로 들어와 받게 된 훈련들이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돌아올 게 돌아왔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기연이 우연히 한 번에 겹쳤을 뿐.
서리스에게 온 기연들은 전부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체펠 드웨이진의 만남과 그의 흥미를 끈 것부터 시작해.
광견과 드페리널의 전투로 깨달은 용인화.
용제가 만든 금강잔월의 다음 단계인 신룡월단까지.
모두 다 서리스가 행한 것들에서 비롯된 기연들이었다.
이게 한 번에 몰려온 덕분에 정신이 없긴 하지만, 서리스는 어미의 밥을 받아먹는 새끼 새 마냥 차곡차곡 자기 몸에 기연을 담았다.
‘8성이 그렇게 멀게 만은 안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마치 힘껏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의 성장을 체감하며 흐른 시간 속에서 서리스는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건 바로 얼마 전에 도로시에게 보낸 편지의 답신이었다.
얼마 전 마법사들이 새로운 걸 개발해 내며, 사람이 직접 전달할 필요 없이 각지에 세워진 우체국에 가면 상대의 우편함으로 편지가 바로 전송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미래를 겪어 본 서리스 입장에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점차 마법 물품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도로시에게 편지를 금방 보낼 수 있었고, 답신 또한 빠르게 받을 수 있었다.
[ 직계님, 나 거기로 갈래.]
편지의 내용을 읽고 서리스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괜찮겠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나 도로시도 이제 마냥 어린 애가 아니다.
내 친구 도로시의 과거를 깔끔하게 정리해 줄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