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마왕이 사는 서리 마탑은 그라말테에 있었다.
그런 만큼 또다시 꽤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될 거로 생각한 서리스는 피로한 기분에 기지개를 쭈욱 켰다.
어제 드웨이진과의 마지막 대련 이후 흥을 탄 서리스는 밤새도록 수련을 이어갔었다.
‘덕분에 성과가 좀 있긴 했지만.’
피로가 안 풀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룡이 오기를 기다리며 서리스는 잠시동안 하체펠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우선, 하체펠을 찾아온 아카펠과 만났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어이없게도 애 아빠가 되어 있었다.
애니쉬아와 커플이 되어 알콩달콩하게 지내더니 결국 아이까지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출산 후에 식을 올릴 거라며 서리스와 모두에게 청첩장을 돌렸다.
‘행복해 보였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아내는커녕 딱히 연인이라 부를만한 이도 없었던 서리스였기에 아카펠의 미소는 꽤 인상적이었다.
애니쉬아나 아카펠이나 둘 다 인물로도, 능력적으로도 떨어지는 부분이 없으니 아이는 똘똘한 녀석이 태어나리라.
‘저마다 각자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 소리인가.’
서리스는 아주 잠시 용신을 쓰러트린 후의 세계를 떠올려 보았다.
너무 먼일인 것 같긴 하나 언젠가 그리된다면 자신도 누군가와 함께하게 될까?
아주 짧은 의문이었지만, 그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런 것보다 검을 휘두르고 몸을 단련하는 게 더 좋았다.
아마 그때 가서도 주야장천 연무장에만 박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힐로즈 단장님, 비룡은 언제 온답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낸 서리스가 힐로즈를 돌아보며 묻자 그는 그 질문에 씩하니 웃어 보였다.
그 자신만만한 웃음에 서리스가 의문을 보인 순간 그가 말했다.
“우리는 비룡 타고 안 갈 거야.”
“비룡을 안 타고 간다고요?”
그러면 어떻게 장거리 이동을 한단 말인가.
“어제 마왕님 쪽에서 연락이 왔어. 그리로 바로 갈 수 있는 공간 이동문을 하나 열어주겠다고 말이야.”
공간 이동문.
사실상 스타리즈가 할 수 있는 텔레포트의 상위 호환 격인 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나름 오래 산 자신도 그런 게 있다고 들어 보기만 했는데, 직접 체험할 기회가 이렇게 생길 줄이야.
서리스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힐로즈는 자기 인증을 손으로 슥 훑었다.
“내가 좀 부탁했어. 된다면 시간 단축이 엄청나게 되니까. 다행히 저쪽에서 수락해 주셨지.”
능력 있구만.
단장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볼 수 있겠다.
“뭐고, 공간 이동문 열어준다나?”
“그런 모양이야.”
같은 마법 분야라서인지 스타리즈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는 순간 우리가 서 있던 공터 중심부 쪽에서 작은 일렁임이 일더니 이내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쪽에 시선을 모은 순간 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마치 찢어지듯 양쪽으로 갈라지며 문의 형태가 나타났다.
반투명한 유리로 된 듯한 문을 보고 모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던 순간,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쪽으로 드러난 공간은 양 벽이 물결치고 있는 복도였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공간이 안정화 되며 물결치던 벽은 서서히 고정되었다.
“들어 오세요.”
그 순간 복도 너머에서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들은 모두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곤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힐로즈를 필두로 모두가 유리문을 통과해 복도에 들어선 순간.
끼익―
작은 소음과 함께 공간 이동문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자신들이 순식간에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한 걸까.
펜타니엄에서 그라말테까지는 비룡을 타도 15일 가까이 날아야 할 만큼 먼 여정이었는데, 이게 한순간에 해결된 셈이다.
마법의 편리함에 서리스가 무척이나 놀라고 있을 때, 불쑥 누군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도로시와 쏙 빼닮은 붉은색의 머리카락.
거기에 마수를 떠올리게 할법한 굽이진 뿔.
그의 외형을 보자마자 서리스는 정체를 알아차렸다.
천하오장성(天下五長成)
마왕(魔王)
아라만
자신들을 이곳으로 이동시켜 준 장본인이었다.
천하오장성과 마주하는 건 검왕과 독왕에 이어 세 번째다.
서리스가 조금 긴장하고 있자 아라만은 이쪽을 보곤 히죽 미소를 지었다.
“하이하이, 모두 반가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어린애처럼 무척이나 해맑아 보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리스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냥…… 남자 도로시 같은데?’
저 하이텐션의 표정은 도로시와 판박이였다.
“아크단장인 아바리안 힐로즈라고 합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별로 힘든 일도 아닌걸? 그럼 바로 훈련에 들어가도 되지? 다들 따라와!”
그는 발을 쭉쭉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천하오장성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부가주인 검왕과 불터렉스의 태상가주인 독왕은 상당히 무거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듯한 기세의 두 사람은 그야말로 천하오장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눈앞의 마왕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였다.
도로시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도 사십 대는 족히 넘었을 텐데,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해맑은 모습이 나름대로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마왕님은…… 좀 특이한 사람이었네.”
자신과 비슷한 감상인지 엑스널이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엑스널은 천상사성인 드페리널을 보고 자랐다.
그런 만큼 그의 처지로서는 무려 천하오장성이라는 위치에 있는 아라만이 저렇게 방정맞은 걸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리라.
“천하오장성이면 대체 얼마나 쌘 거냐?”
“빅토르 선배님이 천명 있어도 지지 않을까요.”
“내가 천명 있으면 세상도 지배해. 인마.”
서리스는 빅토르 천 명이 한데 모여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세상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스타리즈가 유달리 조용한 것을 떠올렸다.
스타리즈를 돌아보자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라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타리즈, 무슨 일 있냐?”
서리스가 다가와 슬쩍 묻자 그는 자기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이 천칭을 기울여 별의 힘을 빌려 쓰는 방식인 건 알제.”
“그거야 뭐.”
서리스는 마법사가 아니다 보니 이론적으로만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서리스에게 있어서 마법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 기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법사는 그 법칙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천칭을 기울이는 게 재능이라고 불리는 거고.”
“그래서?”
“마왕은 그 천칭의 축이 부서져 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서리스가 그 말을 이해 못 한 듯 애매한 표정을 짓자 스타리즈는 자기 머리를 한차례 긁적였다.
“천칭이란 게 너희 쪽 말로 하면 육체다. 그 육체에 별을 담으면 그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만 담을 수 있겠제?”
“그렇지.”
육체가 견디지 못할 만큼 별을 담으면 자신과 같은 꼴이 난다.
태악룡을 막을 당시의 그는 자기 몸에 담긴 별을 견디지 못해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졌었고, 그때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마왕은 그 한도가 부서진 기다. 그냥 별을 들이부을 수 있게 된 거라 보면 된다.”
“그럼 육체가 깨질 텐데?”
“그래서 내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겠나. 저 인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걸로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서리스는 아라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이 난 듯 앞서 걸어가던 그는 잠시 후 어느 실험실 같은 곳 앞에 멈추어 섰다.
“내가 너희와 할 훈련은 간단해. 세계 침식자와 맞붙게 해줄 거거든!”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당한 것이었다.
모두가 이해 못 할 표정을 짓고 있자 아라만은 실험실의 문을 열었다.
끼익―
열린 문 너머에는 끝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한순간 공간 감각이 이상해진 기분과 함께 멍하니 들판을 보고 있으려니 저 멀리 무언가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남자?
아니, 자세히 보니 저건 사람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온갖 마수들을 뒤섞어 뭉쳐놓은 듯한 기괴한 생명체는 인간의 형상을 간신히 가지고 있을 뿐.
마수에 관해서라면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서리스조차 본 적 없는 괴물이었다.
“세계 침식자로 만든 키메라야. 검은별을 좀 만지느라 저 꼴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세계 침식자거든.”
웃고 있는 아라만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광기가 느껴졌다.
확실하다.
그는 정상이 아니다.
‘세계 침식자에게 딱히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지만.’
흑마녀와 함께 뭔가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인지 살짝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세계를 위협하는 건 변함 없으나, 서리스는 그들이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인제 와서 놈들의 사정을 생각해 줄 생각도 없긴 하지만.’
세계 침식자를 잡아 저 꼴로 만들 수 있는 걸 보니 새삼 천하오장성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도로시를 떠올리게 할 법한 가벼운 태도이긴 하나 그는 천하오장성인 마왕 아라만이었다.
“세계 침식자와 직접 맞설 수 있다니. 이건 큰 도움이 되겠군요.”
힐로즈는 단원들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겼는지 단장으로서 눈을 반짝였다.
“그럼 다들 안으로 들어가!”
아라만이 싱글벙글 웃으며 외치자 모두가 경계심 섞인 표정으로 문을 넘기 시작했다.
저 괴물이 세계 침식자라고 했던 만큼 모두가 자연스럽게 긴장한 것이다.
이 중에서 서리스 말고는 세계 침식자와 직접 맞부딪쳐 본 사람은 힐로즈를 제외하면 없다.
힐로즈조차 혼자서가 아닌 윈터와 함께 세계 침식자에게 맞서본 적이 있을 뿐, 단신으로 상대해 본 적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모두의 긴장은 당연하였다.
“그림자 아이는 스톱.”
그렇게 서리스도 자연스럽게 들판으로 걸어 나가려던 순간, 자기를 지칭하는 듯한 아라만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엉, 그림자 아이.”
도로시를 닮아 별명으로만 부르는 그였다.
아니, 이건 도로시가 그를 닮았다고 봐야겠지.
“왜 그러십니까?”
서리스가 묻자 그는 자연스럽게 실험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림자 아이는 나랑 대화 좀 하고, 안에 들어간 너희들은 훈련 시작!”
그리 말한 그는 안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어느샌가 복도에 아라만과 둘이서 남은 서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자신을 불러 세운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아이는 어쩌다가 몸에 그런 칙칙한 걸 심게 되었을까?”
그러는 순간, 아라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서리스는 얼굴을 굳혔다.
이내 아리만을 중심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비기라 할 수 있는, 마수의 힘을 빌리는 비기 마왕화.
서리스는 마왕화를 볼 때마다 광견의 모습을 떠올렸었다.
광견은 자기 육체를 강화하고자 검은별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환상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모습이 되긴 했으나, 어쨌든 그는 강한 힘을 얻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서리스 또한 최근 광견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서리스는 금강잔월과 청운귀명도가 검은별을 동시에 부담함으로써 광견과 같이 급격한 육체적인 변화는 없긴 하나.
겉에 두른 그림자가 용인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은 언뜻 보면 그림자로 만들어진 마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흐름은.
‘마왕화와도 비슷했어.’
마왕화는 아라만이 직접 만들어낸 비기다.
그런 그가 과연 검은별과 관련이 없을까?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그가 검은별과 관련이 있다면 혹시 용신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서리스는 딴청을 피우듯 말하면서도 감각을 곤두세웠다.
만약 그가 자신의 적이라면 천하오장성이라 한들 맞설 생각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아라만은 잠시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천천히 그리기 시작했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괜찮은데. 난 그걸 문제 삼을 생각 없어! 나는 내가 자체적으로 만들어 심어서, 그림자 아이한테 있는 칙칙한 게 보이는 거거든.”
그 순간, 자체적으로 심었다는 그의 말에 서리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미친놈 설마.
그 말을 하자마자 아라만이 옷 목 부분을 살짝 들춰 자기 어깨를 슬쩍 보여줬다.
거기 박혀 있는 선명한 검은별. 이를 본 서리스가 경악하듯 입을 벌렸다.
“어때, 똑같이 느껴지지?”
그랬다.
다른 세계 침식자에 비하면 미약하긴 하나 그것은 분명하게 검은별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아라만은 지금.
‘자기 스스로 세계 침식자가 되었다는 건가?’
그는 상상 이상으로 미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