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강자들과 싸우는 일이 최근 많아서일까.
드페리널에 이어 드웨이진에게까지 깨진 서리스는 꽤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세상에 괴물 같은 인간들이 왜 이리 많은지.
천상사성과 월하십인에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 문득 자신의 처지가 초라해진 느낌이 들었다.
“강해지긴 했는데, 아직도 모자라네.”
“뭐라노. 또래 중에 니만큼 강한 아가 어딨다고.”
때마침 물병을 들고 오던 스타리즈가 그걸 서리스에게 던져 주며 투덜거렸다.
그가 던진 물병을 받은 서리스는 그대로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이후 서리스와 모두는 좀 전과 같은 방식의 훈련을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드웨이진의 습격 그리고 전멸.
그 결과, 불굴의 미친개 빅토르마저 저기 나뭇가지에 빨래 마냥 걸려 움직이지를 않았다.
드웨이진이 복부에 꽂아 넣은 마지막 삼 타는 아무리 근성 있는 그라도 당분간 못 일어날 만한 수준이긴 했다.
“니 말고는 다 엉망이다. 아이가.”
“엉망인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마지막까지 서 있던 아가 니 말곤 없었다.”
기만 좀 그만하라는 양 스타리즈가 말하자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최근 너무 당한 적만 많아서일까,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 주변 상황이 현 수준에 만족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기도 하고.’
훈련이 끝난 후, 하체펠에서 배정해 준 숙소로 돌아가면, 바로 신룡월단을 익힐 생각인 만큼 그는 쉴 생각이 아직 없었다.
“니 무슨 강박증 같은 거라도 있나?”
그런 순간 스타리즈가 서리스의 표정을 보고 물어왔다.
“세상 살기가 참…… 바쁘다 보니 그런 게 좀 생긴 모양이다.”
“뭐 그리 쫓기면서 사는지는 몰라도, 앞서 달려나갈 때 주변 아들 정도는 챙기라.”
주변 애들이란 말에 서리스가 스타리즈를 돌아보았다.
“도로시도, 서발광 가도 나랑 같이 지낼 때, 맨날 니 얘기만 하더라. 걔들 두고 갈 생각 아니라면, 너무 앞만 보지 말그라.”
“……그러네.”
최근에 큼직큼직한 일들을 한꺼번에 겪어서일까.
서리스 자신도 둘을 잠시 잊고 있었던 거 같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들을 떠올렸다.
청랑단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로시와 서발광은 서리스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언제나 서리스 옆에 서고자 필사적으로 훈련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맛있는 거라도 사 먹여야겠다.”
하체펠에 온 김에 아카펠 녀석도 얼굴 정도는 봐야겠지.
서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지자 스타리즈는 만족한 표정으로 물을 마저 마셨다.
“스타리즈, 너…… 그냥 천하태평으로 사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주변을 잘 챙기는구나?”
“뭐고 내가 그런 이미지가? 주변에 관심 없는 거야 맞다만. 내도 좀 바뀌어보려고.”
“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니 같이 사는 것도 재밌어 보인다 안카나.”
자신 같은 삶?
스타리즈는 서리스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들이 말 안 하드나? 우리 반 아들은 전부 니한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영향받고 있다고.”
“약간 그런 거 같기는 했는데. 내가 뭘 한 게 있냐?”
“너무 많아서 탈이겠지. 아카데미 돌아가서 봐라. 몇 달 사이에 또 다른 놈들 돼 있을 기다.”
그거야 꽤 기대되는 말이긴 했다.
“하아, 친구들…… 그런데 그 전에 워너힐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나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어떨까?”
엎드린 채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엑스널이 조용히 현실을 들이밀자 서리스와 스타리즈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저 멀리 서 있던 디바쉬만이 별을 보며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부디 무사히 워너힐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기를.
* * *
그날 밤, 서리스가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앉아 신룡월단을 읽던 중이었다.
똑똑-
그는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곤 누구세요라고 물으며 방문을 열었다.
열린 방문 앞에 서 있는 건 하녀 한 명이었다.
그녀는 서리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용무를 전하였다.
“펜타니엄 서리스 님, 드웨이진 님께서 잠시 방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알았어. 잠시만.”
아무리 자신을 아껴주신다고 하더라도 잠옷 차림으로는 갈 수 없었기에 서리스는 대강 옷을 갈아입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하녀는 기다렸다는 듯 앞장서 안내해주었고, 서리스는 얼마 안 있어 드웨이진의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님, 서리스입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오거라.”
돌아온 대답에 서리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드웨이진이 있었다.
여름인 만큼 열심히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던 드웨이진은 이내 서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낮에 훈련은 어땠느냐?”
“죽을 맛이었죠.”
“뭐라? 크하하!”
서리스가 솔직하게 답하자 드웨이진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보았던 그는 좀 더 점잖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웬만한 이들보다도 웃음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이유는 당연히 서리스때문이었다.
“기특하게도 청랑단에 이어 워너힐 아카데미까지 갔다 오더니 경지가 상당한 수준에 올랐더구나.”
“과찬이십니다. 아직 월하십인도 아닌걸요.”
“이놈, 월하십인이 어디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느냐?”
그러면서도 드웨이진은 입가에 미소를 않았다.
서리스의 재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월하십인은 무슨, 천하오장성은 물론 천상사성까지 넘볼 수 있는 그런 재능.
자고로 사내대장부라면 저 정도 포부는 품고 있어야 큰일을 하는 법이다.
그런 생각을 지닌 드웨이진에게 있어서 지금의 서리스는 오히려 호감투성이였다.
“내가 왜 부른 것 같으냐.”
“하체펠이라면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하하하! 그건 오래전에 이미 포기했다.”
다시 만나자마자 하체펠을 이어받으라고 강요할 줄 알았더니 이리 깔끔하게 포기할 줄이야…… 의외라면 의외였다.
“물론 언제든 생각을 바꾼다면 넘겨줄 생각이 있지만 말이다.”
“할 일이 많아서요. 개인적으로 한곳에 메이는 게 그리 달갑지 않기도 하고요.”
“대가문 직계란 녀석이 이리 자유만을 추구하다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드웨이진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서리스가 우물 안보다 큰물에서 놀았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마.”
드웨이진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그러곤 서리스에게도 자리를 권했고, 그도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나는 서리스 네가 하체펠의 강기수식을 이어받았으면 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제가…… 하체펠은 이어받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별을 심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내 육체라면 강기수식의 원리만 알아도 어느 정도 응용할 수 있을 테니까.”
서리스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별도 이어받지 않은 이에게 비기만 전해 주겠다니.
이래선 사실상 하체펠의 별이 저버려도 상관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서리스, 너도 알다시피 나에게 자식은 네 어미 한 명밖에 없다. 그러니 하체펠을 이을 녀석도 네 형제 중 하나인데…… 솔직히 너 말고는 내 눈에 차지 않는다.”
그리 말한 드웨이진의 얼굴에는 진심이 묻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하다못해 가장 마음에 드는 네가 강기수식을 익혀 더 완성된 비기를 만들기를 바란다.”
“……진심이십니까?”
“거짓말로 보이느냐.”
그럴 리가 없었다.
그의 두 눈은 누가 보아도 진심이라 할 만큼 진지했으니까.
“어찌하겠느냐.”
드웨이진의 물음을 듣고 서리스는 침묵했다.
과거로 막 돌아왔을 당시 드웨이진은 그가 하체펠을 이어받기를 바랐었다.
그때 서리스가 이를 거절했던 이유는 당장 금강잔월을 익히기 급급했기도 했고.
강기수식을 배우는 순간, 하체펠에 묶일 가능성은 염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금강잔월이 다 자리 잡았고, 드웨이진 또한 자신을 하체펠에 묶어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정말로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리스는 드웨이진을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진지한 그의 눈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서리스에게 있어 부러움과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아무리 그라도 사람이었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이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그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한 사람의 동등한 무인으로서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배우겠습니다.”
서리스의 대답을 듣고 드웨이진은 인자한 웃음을 띠었다.
하체펠의 별이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의 진심은 무거웠지만.
서리스에게 있어 강기수식은 무척이나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럼 바닥에 앉아 보거라. 내가 하나씩 확실하게 가르쳐주마.”
드웨이진이 신난 표정으로 서리스에게 말하였다.
외손자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이 즐거운 듯한 그의 표정을 보니 서리스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드웨이진은 본격적으로 서리스에게 강기수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금강잔월이 모든 힘의 흐름을 흘려내는 비기라면.
강기수식은 그 힘의 흐름을 몸에 받아들여 축적하는 비기였다.
강기수식의 핵심을 전해 주는 드웨이진과의 수련은 하루가 다르게 서리스를 성장시켜 나갔다.
‘금강잔월로 흐름을 잡고 강기수식으로 그 흐름을 몸에 담는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서리스는 서서히 강기수식과 금강잔월을 융화해나갔다.
둘 다 육체 단련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닮은 듯하면서도 중심 핵심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신룡월단.
금강잔월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이 기술은 모든 흐름을 절단하는 비기였다.
세상과 단절을 시켜 버리듯 존재하는 모든 기운의 흐름을 끊어 버릴 수 있는 신룡월단은 터득하면 터득할수록 서리스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거 완전…… 악스판시온의 상위 호환 격이잖아.’
동시에 용제가 어떻게 자신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가라는 의문점 또한 서서히 해소되고 있었다.
용제는 신룡월단을 이용해 시간의 흐름마저 끊어냈다.
그 경악스러운 경지 앞에 서리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런 용제마저 쓰러트리지 못한 용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지 또한 서리스는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덧 한 달.
낮에는 드웨이진을 쓰러트리기 위해 매일 같이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며 합을 맞춰나갔다.
밤에는 강기수식과 신룡월단을 익히는 그런 시간.
“서리스 후배, 내가 요즘 후배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뭡니까?”
오늘도 드웨이진에게 깨진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엑스널이 다가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를 보고 서리스가 의문을 품자 엑스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서리스 후배는 아무래도 우리랑 다른 시간을 살기라도 하는 거 같단 말이야.”
최근 서리스는 드웨이진과의 전투에서 끝까지 서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튼튼해져 가는 그의 육체와 그로 인해 생겨난 더욱더 괴물 같은 체력이 체력을 보유시켰기 때문이었다.
금강잔월과 다르게 강기수식은 내부에 단련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괴물 같았던 체력이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서 버렸다.
“제가 좀 튼튼해서 말입니다. 엑스널 선배님도 체력 훈련 좀 더 하시죠.”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 생각은 못 했지만, 서리스 후배 괴물이야? 사실 인간이 아니라 세계 침식자지?”
이 인간 은근히 예리하구만.
갑자기 정곡을 찌른 그에게 서리스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악! 안돼. 이대로 계속 졌다간 내가 먼저 망가진다! 서리스 나랑 한판 붙자! 썅, 너라도 꺾어서 나를 증명해야 해!”
그러는 순간 기절해 있던 빅토르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정말 바퀴벌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회복력이었다.
“진짜 괴물은 저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기절한 사람이 바로 일어나서 저럴 수 있는 건, 비정상이긴 하네.”
엑스널도 빅토르만큼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행 중에서 전투 능력이 가장 밀리는 빅토르이기에 매일 제일 먼저 당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는 하루가 다르게 그 회복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순수 성장 속도는 빅토르가 가장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계속 지기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동의해.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부채를 팔랑거리던 디바쉬가 서리스의 말에 대답해왔다.
벌써 한 달째 당하기만 했다.
슬슬 반전이 있어도 될 시기이다.
“이제 해보죠. 내일.”
그동안 당한 것들을 다 합해, 설욕전을 할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