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워너힐 아카데미.
마키나에서 귀환한 서리스는 들고 다니던 가방을 동여매며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겨우 돌아왔다.”
마키나에서는 비룡의 이동이 제약되는 만큼, 이동 수단에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워너힐 아카데미까지 거의 도보로 이동해야 했던 서리스는 제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겨 놓고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싸우는 것 보다 걷는 게 일이라며 서리스는 자기 어깨를 툭툭 건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흑마녀의 개구리는 성위의 결계 때문에 워너힐 아카데미로는 들어올 수 없는 만큼 검은색 브로치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오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제파림.’
마키나에서 아카데미로 출발했을 때부터 서리스는 그 이름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용제의 동생이자 용신의 수하가 되어버린 열쇠.
끝내 제 손으로 형을 죽이고, 용제의 시체를 뒤집어쓰고 아직도 용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그는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용신을 무찌를 생각인 이상 제파림과는 무조건 마주칠 수밖에 없으리라.
‘선조님의 복수는 해드려야지.’
서리스는 소드란의 별이 새겨진 목 뒤를 툭툭 두드리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스타린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합쳐줬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용제에게서도 같은 증상을 봤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금강잔월의 영향이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는 단련돼도 영혼은 그대로인 상황인 거지.
그러니 육체와 영혼 사이에 괴리감이 당연히 생겨나는 것이고.
‘내 경우는 원래 내 몸이 아니었으니 그게 더 컸을 테고.’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가는 것을 느끼며 서리스는 워너힐 아카데미에 있는 마왕의 저택을 찾았다.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건만 기숙사는 이제 완전히 집과 같이 느껴졌다.
“어, 직계님!”
그러는 순간 때마침 저택에 있었던 듯 문을 열자마자 거실 쪽에 앉아 뒹굴뒹굴하던 도로시가 벌떡 일어섰다.
“오랜만이다.”
그녀와 마주한 서리스는 손을 들어 인사해 보였고 도로시는 그 즉시 육탄돌격을 감행해 왔다.
“우리 두고 가서 재밌었어?”
“너무 재미 넘쳐서 죽을 뻔했다.”
실제로 드페리널에게 죽을 뻔했던 기억이 있는 서리스였기에 농담은 아니었다.
“서발광은?”
“장 보러! 오늘 밥 담당이야.”
“그럼 크라페는 어디 있냐.”
“몰루? 맨날 혼자서 어디 나가던데.”
다들 바쁘게 사는구만.
자신을 반겨 주는 건 도로시밖에 없다는 생각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는 강아지처럼 좋아했다.
어째 갈수록 개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왔단 거 알리기 힘들구만.”
똑똑―
그러던 순간 누군가 저택 문을 두드려 왔다.
서리스가 의아함을 품고 문을 열자 거기에는 오랜만에 보는 인물이 서 있었다.
“소녀가 주변에 다 알려 드려요?”
윌즈베르크 아이랑.
여전히 빼어난 미모가 눈에 띄는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서 있었다.
윌즈베르크답게 아카데미 내의 정보를 꽉 쥐고 있는 그녀는 서리스가 돌아왔을 때부터 이를 알았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복면을 아예 안 쓰고 다니는 걸 보니 그녀가 혈귀를 거의 다 떼어 냈음을 서리스는 눈치챘다.
“그사이 또 성장하셨습니까?”
“저도 이제 6성 중반까지 왔답니다. 대단하죠?”
“대단하네요.”
서리스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아이랑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으니 그녀의 재능과 노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맙네요. 사실 전부 서리스 님 때문이지만요.”
“저 말입니까?”
“네, 서리스 님 때문이요. 사실 소녀만이 아니라 저희 학년은 다 같은 상황이죠.”
“제가 뭘 했다고…….”
“도올을 상대했던 그 기점부터예요. 다들 변해 버렸죠.”
서리스는 한차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야 기연도 잡아먹고, 연륜과 미래의 기억까지 다 써서 여기까지 온 만큼 또래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최근 금강잔월이 용제가 만들어낸 비기라는 것까지 알아냈으니.
서리스는 자신의 두 번째 인생이 얼마나 축복받았는지 몸소 체험 중이었다.
그런 만큼 또래와 자신을 비교하는 건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곳 천재들 눈에는 다르게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많이 바뀔 거예요. 황금 세대에서 정말 별의 세대가 되어 버릴 정도로요.”
“영광이라고 해도 되겠죠?”
“어느 정도 따라갈 수만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서리스가 그리 말하자 아이랑은 한차례 웃곤 그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뇨. 그냥 또 금방 떠나시겠다고 하셔서, 제대로 기억 좀 해두려고 해요.”
“제가 무슨 기러기도 아니고 또 어딜 떠난답니까.”
“그건 곧 알게 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아이랑은 이후 서리스를 따라 저택 내부로 들어와 더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 서발광이 돌아오고, 크라페까지 오며 실내는 금방 떠들썩해졌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대화하고 있으니 서리스는 새삼, 이 삶의 소중함을 느꼈다.
지킬 가치가 있는 삶.
그것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다시금 다짐할 수도 있었다.
‘흑마녀도 이렇게 지키고 싶었을까.’
서리스는 자신이 살던 세상을 잃어버린 흑마녀를 짧게나마 떠올렸다.
똑똑―
그러는 순간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내가 나가볼게.”
서발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다.
그런데 열린 문 앞에는 못 보던 이가 서 있었다.
“저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던 아이랑은 이내 올 게 왔다는 듯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서리스 님 손님이에요.”
“저 말입니까?”
그는 의아함을 가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눈의 흉터가 눈에 띄는 연푸른 머리카락의 사내가 있었다.
일행보다 한참 연상인 듯한 그는 서리스를 보곤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네가 펜타니엄 서리스니.”
“예, 그렇습니다.”
“반가워. 나는 이번에 창설된 세계 침식 전문 단 아크의 단장을 맡게 된 아바리안 힐로즈야.”
아바리안.
양손에 도끼를 쥐고 싸우는 특이한 비기를 지닌 거로 유명한 대가문이었다.
그중에서 아바리안 힐로즈는 다름 아닌 차기 가주로서, 실제로 서리스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세계에서 아바리안이 가주가 된 이였다.
‘차기 천하오장성으로 거론되더니 독왕이 내려온 그 자리를 정말로 차지했었지.’
이 시점이면 월하십인에 근접한 경지 정도가 아닐까.
겉보기에도 상당한 별이 느껴지는 그를 보고 서리스는 왜 아이랑이 자기 손님이라 하였는지 깨달았다.
칼릭스가 제안했던 새로운 단 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래 하나는 확실하게 이행하는 게 역시 그다웠다.
“오늘은 간단한 인사 및 약간의 실력 확인 정도를 할 생각으로 방문했는데…… 가능할까?”
힐로즈에게 있어 서리스는 소문은 무성하나 직접 마주해본 적 없는 후배였다.
왜냐하면, 그는 임무를 받고 악스달에서 자리를 비우고 있다가 최근에 막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윈터가 은퇴한 뒤, 악스달의 단장을 맡게 될 그였지만.
새로운 단의 창설로 인해 이쪽으로 빠지게 된 거였다.
“그러시죠.”
앞으로 같이 활동할 단장인 힐로즈의 부탁이기에 서리스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미래에 아바리안의 가주가 될 힐로즈의 실력이 그도 궁금했다.
‘월하십인을 앞뒀다는 건.’
지금 자신의 가장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저택 앞에서 해도 괜찮을까?”
하나하나 묻는 걸 보면 상당히 친절한 성격인 듯한 그의 말에 서리스는 이를 수락했다.
돌아오는 길에 세계 침식을 몇 번 막고 오긴 했지만, 사람과의 대련은 오랜만인 서리스는 어깨를 풀었다.
힐로즈가 가볍게라고 한만큼 전력을 내지는 않아도 괜찮겠지.
“그럼 해보자.”
그 순간 힐로즈는 허리춤에서 두 개의 도끼를 빼 들었다.
흉흉한 기운이 서린 도끼를 본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들자마자 힐로즈의 인영이 흐려졌다.
콰앙!
큰 폭발음과 함께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에서 오는 충격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폭성투뢰(爆星鬪磊).
공격 하나하나에 폭발을 깃들게 하는 비기이자 전 세계 가문을 통틀어 가장 공격성이 높은 비기였다.
그러는 순간 도끼의 폭격이 연쇄적으로 시작되었다.
서리스의 검과 힐로즈의 도끼는 부딪칠 때마다 폭발음이 울려 퍼졌고, 주변은 어느새 매캐한 검은색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폭발만이 아니다.’
그리고 서리스는 그제야 폭성투뢰의 진짜 위험한 점을 깨달았다.
폭성투뢰의 기본은 자신의 별이 깃든 모든 곳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별이 깃드는 곳은 그가 들고 있는 도끼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육체 내부였다.
내부에서 터져 나온 별은 엄청난 속도로 육체를 돌고, 그럴 때마다 그의 육체는 한층 더 빨라졌다.
휘둘러지는 도끼의 속도가 가면 갈수록 빨라져 가는 것을 느끼며 서리스는 힐로즈의 강함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자신 또한 출력을 아끼지 않고 내도 괜찮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 순간 서리스의 팔 위로 그림자가 휩싸이기 시작했다.
드페리널과의 전투에서 살아남고자 모든 걸 쏟아냈던 그날.
드페리널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서리스는 그 과정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밟았다.
과거, 광견과 망아꾼의 분신을 통해 깨닫게 된 금강잔월에 검은 별을 심는 법.
그리고 그 부하를 펜타니엄의 그림자로 받아 내는 것을 드페리널과의 전투 중에 서리스는 터득한 것이다.
‘드페리널 때처럼 했다간 또 몸이 엉망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이 되겠지만.’
전력 전개가 아닌 일부 전개라면 가능하겠지.
콰앙!
터져 나오는 폭음 속, 새까맣게 물든 서리스의 팔과 악스판시온이 도끼와 맞부딪쳤다.
이번에 놀란 것은 힐로즈 쪽이었다.
‘왜 그렇게 소문이 무성한가 했더니.’
자신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맞서는 서리스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같은 대가문이자 한참 선배인 자신이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별 출력.
거기에 그런 별 출력을 감당하고자 만들어진 강건한 육체.
누구에게 배운 건지 기복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의 검술 실력까지.
‘분명, 20살이었지?’
그 나이대를 겪어 본 입장에선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다.
락스카마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건 이미 거의 완성된 수준이지 않은가.
‘과연, 추천할 만하네.’
10년 안에 규격 외의 거물이 하나 탄생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 서리스라는 후배는 20대에 천하오장성에 오르는 업적을 이룩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 이상도.
힐로즈의 마음이 술렁였다.
재능 있는 이와 마주하면 괜히 더 자극해 보는 그의 고질병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좀 더.’
시험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의 눈 속에서 광기가 번뜩거리던 순간이었다.
콰앙!
내려친 도끼의 폭발음과 함께 힐로즈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섰다.
‘안되지, 안돼.’
이 이상 했다간 자신도 진심이 되어버릴 거 같아진 힐로즈는 감정을 제어하며 물러섰다.
이건 실력 확인을 위한 가벼운 대련이다.
굳이 전력을 다 쓰면서 부딪칠 필요가 없었다.
서리스에게도 민폐이고, 자신도 어디까지 힘을 조절할 수 있을지 몰랐다.
자칫하면 아바리안에 내려오는 광폭화까지 넘어갈 정도로 서리스는 탐나는 인재였으니까.
“대련은 여기까지 하자.”
그렇기에 힐로즈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대련의 끝을 선언하자 서리스도 그를 따라 악스판시온을 그림자에 집어넣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힘을 바로 갈무리하는 모습 또한 훌륭했다.
미소 지은 힐로즈는 서리스에게 내일 와야 하는 장소를 일러두곤 몸을 돌렸다.
좋은 단원이 생겨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