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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78화 (178/275)

178화

몰아치는 그림자를 품고 내지른 검과 함께 서리스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지닌 별과 아껴둔 힘을 모두 써서일까, 육체는 벌벌 떨리고 있었고, 호흡도 엉망진창이었다.

이대로는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질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서리스는 조금의 긴장도 풀지 못하고 앞을 바라봤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그림자가 전부 사라졌을 때, 서리스는 깊은 허망함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이 전력을 담아 휘두른 검은 분명 드페리널의 목에 닿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방금의 공격으로 그의 목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스판시온이 삼킬 수 있던 최대치는 드페리널이 자신의 공격을 막고자 펼친 얼음 정도였다.

드페리널의 몸에 깃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별을 삼키기에는 악스판시온의 총량이 너무 모자랐다.

그 증거로 악스판시온의 검날이 닿은 곳에는 새하얀 얼음이 피어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무슨 용을 쓴다 한들 그의 목은 베어지지 않으리라.

‘이게 나와 천상사성과의 차이.’

심지어 상대는 진심으로 자신을 상대하지도 않았었음을 알기에 서리스는 천상사성이라는 이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세계 침식자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어떻게 인류가 승리할 수 있었는지도 말이다.

절대강자.

그 말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였다.

“다했나.”

그리고 그의 한마디가 울려 퍼졌을 때 서리스는 자신을 덮쳐 오는 얼음의 해일 앞에 정신을 잃어야 했다.

* * *

한참 뒤 서리스가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몸 여기저기가 통증으로 비명을 질렀고, 간신히 상체만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살아 있다.’

무슨 영문일까, 분명 드페리널은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거 같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

그 사실에 의아해하면서도 서리스는 태악룡 이후 정말로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오한을 느꼈다.

드페리널을 상대로 마지막에 보인 그 검은 분명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해서 보인 한 수였다.

그러나 천상사성이라는 존재는 그 정도로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깨어났군.”

그러던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짝 긴장한 서리스가 고개를 들자 얼음으로 만들어낸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드페리널이 어둠 사이로 보였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가 따로 있음을 눈치챈 서리스는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침입자는 무조건 죽이실 듯하더니, 왜 살려 놓으신 겁니까?”

“그래, 한 번만 더 마음대로 입을 열면 그대로 죽여주마.”

‘미친놈인가?’

하지만 드페리널이라면 진짜로 그럴 것 같았기에 서리스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널 살려둔 건 침입자와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서다.”

서리스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도망칠 기회는 엿보겠지만 지금 전력을 다한 반동으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그가 마음을 바꾼다면 대응할 방법도 없었다.

“우선 여기는 증조할머님과 용제께서 약혼하고 함께 지은 곳이다.”

용제가 마키나 쪽 여식과 연이 있었다는 걸 들은 적 있었기에 서리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증조할머니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드페리널에게 증조할머니라 하면 옛 마키나의 가주라는 소리였으니까.

마키나는 직계중 강한 자라면 남녀 할 것 없이 가주에 오를 수 있는 가문이니까.

서리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드페리널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기에 이곳에는 특수한 진법이 처져 있지. 마키나의 직계이거나 혹은 용제의 별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진법이 말이다.”

서리스의 몸이 굳었다.

서리스가 마키나의 별을 새겼을 리는 없으니.

이곳에 침입한 시점부터 서리스는 자신이 용제의 별을 가지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시험 해봤다. 과연 용제와 선조께서 함께 쳐놓은 진법을 뚫고 들어올 실력인가.”

그걸 위한 공격이었나.

“그 정도는 아니더군.”

무려 마키나의 옛 가주와 용제가 직접 친 진법이다.

세월이 흘러도 남아 있는 이 진법을 지금 수준의 서리스가 뚫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서리스가 침음하고 있자 드페리널은 자기 턱을 매만지다 다시 말을 이었다.

“용제의 별을 지닌 자가 증조할머님께서 가장 증오하던 펜타니엄의 직계라.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않나?”

마키나와 펜타니엄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었다.

옛적부터 라이벌 가문이었고, 거기에 검이라는 별칭을 펜타니엄이 전부 가져가고 나서는 마키나에게 있어 원수와도 같이 취급받았으니.

하지만 드페리널의 말을 들어 보면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마키나에 줄곧 내려오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그리 말한 드페리널이 오래전 용제와 그 당시 마키나의 장녀였던 마키나 오웬리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때 촉망받던 마키나 오웬리널은 가장 강력한 가주 후보로 거론될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한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가주 후보 자리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 당시 삼무제로 칭송받던 용제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용제는 어디에 소속되기를 싫어하는 남자였고, 그녀는 그런 그를 위해 가주 후보 자리까지 내려놓았다.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용제는 그녀와 약혼하게 되었고, 그 결과 마키나에 있는 재아의 숲에 단둘만의 집을 지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낼 줄 알았던 두 사람이었으나.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용제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을 나누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허망함과 슬픔에 그를 찾아 헤매었지만,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 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하루하루 용제를 기다리며 그렇게 살아가던 순간 그녀에게 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건 바로 용제가 펜타니엄에서 큰 상처를 입은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사랑했던 남자의 죽음은 그녀를 미치게 했다.

그 결과, 그녀의 갈 곳 없는 분노는 펜타니엄을 향하고 말았다.

펜타니엄이 용제라는 용을 품게 될 마키나를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는 낭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이후, 그녀는 마키나의 가주 후보 경쟁에 다시 끼어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강했던 그녀는 모든 후보를 짓누르고 마키나 가주 자리에 올랐으며 그러자마자 펜타니엄을 마키나의 최대의 적으로 지정했다.

그것이 마키나와 펜타니엄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 번 더 마음대로 입을 열면 죽인다고 했을 텐데.”

서리스가 서둘러 자기 입을 가리자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다.”

농담이면 표정이라도 좀 바꿔라.

“그때부터 마키나에서는 대대로 이곳을 지켜오고 있다. 선조에 대한 예우지.”

서리스가 침입했을 때 그가 왜 적대적으로 나왔는지 알겠다.

마키나 오웬리널에게 있어서 이 장소는 소중한 추억과 함께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이 떠오르는 애증의 장소였겠지.

“너는 용제가 어째서 죽었는지 알고 있겠지?”

오웬리널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용제의 사인을 몰랐었다.

마키나에게 있어서도 그 사실은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겠지.

하지만 용신과 관련된 것인 만큼 서리스는 망설였다.

용신과 관련된 건 떠들어 봤자 괜한 혼란만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서리스의 생각을 읽은 듯 드페리널이 말을 막았다.

그는 대신 얼음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몸을 돌렸다.

“너무 어지럽히지만 말아라.”

그걸로 충분한 건가.

다행히 그는 마키나 오웬리널에게 이 장소가 중요하듯 용제 제롬에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다 그는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다는 양 서리스를 돌아보았다.

“딸 아이를 꽤 엉망으로 만들어놨더군.”

서리스는 잠깐 움찔하고 몸을 떨었지만, 그건 정당방위였으므로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를 보고 드페리널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키나와 펜타니엄도 슬슬 화해할 때가 됐지.”

뭔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서리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동안 드페리널은 그대로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이 농담이 아닌 것 같아 서리스는 간담이 서늘했지만, 그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것보다 내가 용제와 관련 있는지 확인할 거면 말로만 해도 되겠건만.”

왠지 시험당한 기분이라며 투덜거린 서리스는 바닥에 다시 누웠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쉬어야만 했다.

* * *

냉기는 드페리널이 해결해주었지만, 몸의 피로는 쉬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던 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이렇게까지 모든 걸 쥐어짜며 싸운 건 처음이라 생각하며 서리스는 현관 앞에 섰다.

‘그러고 보니 문을 만지면 얼어붙을 거라 하지 않았나?’

서리스는 문고리를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드페리널이 너무 어지르지 말라고 한 걸 보면 뭔가 조치를 해놓고 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대책 없는 사람은 아닐 거고.”

그래도 걱정이 된 서리스는 시험 삼아 악스판시온을 뽑아 문고리를 툭 건드려 봤고, 검이 별을 삼키는 기색은 없었다.

그걸로 안도한 서리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깨끗하네.”

누군가 정기적으로 관리한 듯 실내는 깔끔했다.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선 서리스는 곧 집 안을 조심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드페리널에게 경고받은 만큼 최대한 주의하며 살피기 시작한 서리스는 곧 한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꺼진 벽난로가 있는 방은 책들과 가구 몇 개가 있었다.

가구를 쓸어보니 마법적인 처리가 된 듯 쌓인 먼지는 없었다.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용제의 거처에는 딱히 있는 게 없던 걸까.

의문스럽게 주의를 둘러보던 서리스는 문득 용제가 대놓고 뭔가를 놔뒀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관련된 건 금강잔월.

집 앞에서 마주쳤던 진법과 같이 서리스는 금강잔월을 몸 안에 가득 채워나가며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자신의 금강잔월과는 반대의 흐름을 벽난로 옆에서 발견했다.

‘이건?’

놀란 눈으로 그쪽으로 다가간 서리스는 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금강잔월은 흐름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 흐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별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틀어놓은 듯한 기묘한 감각.

어찌 보면 악스판시온과도 유사한 이 느낌에 서리스는 홀린 듯 금강잔월을 거기에 흘려 넣었다.

그 순간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벽난로 내부에 계단이 생겨났다.

명장도 아니고 잘도 이런 걸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여긴 먼지가 잔뜩인데.”

코를 괴롭히는 먼지를 손으로 털며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서리스는 곧 한 문 앞에 도착했다.

끼익.

다행히 잠겨 있지 않은 문을 밀어 연 서리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서리스의 몸이 굳었다.

바깥이 먼지투성이였던 만큼 내부는 더 엉망이었고, 그는 곧 내부 광경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오래전에 말라붙어 여기저기 남아 있는 핏자국과 두 권의 책.

하지만 그것만 있었다면 서리스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밤하늘이 있었다.

수많은 별이 공존하며 서로의 위치에서 돌고 있는 작은 우주.

마치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별을 올려다보며 서리스의 눈이 커다랗게 떠져 있었다.

‘같아.’

한때 별을 갈망하며 수없이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던 서리스다.

지금의 밤하늘은 그의 기억 속, 정확하게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밤하늘과 똑같았다.

“어떻게.”

용제가 자신을 부르던 날과 똑같은 밤하늘을 보니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용제가 자신을 과거로 불러들였음을 말이다.

그런 서리스의 시야에 두 권의 책이 들어왔다.

저기에 용제의 모든 것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한 권을 먼저 들어 올린 서리스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곧 서리스는 이것이 용제가 기록해둔 스스로의 일대기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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