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재아의 숲.
마키나의 중심지에서 좀 떨어져 있는 숲에 도착한 서리스는 드넓게 펼쳐진 녹지를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여길 다 뒤지려면 몇 달은 족히 걸릴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위치를 특정한 거야 좋긴 한데.’
말만 숲이지 이건 설산에 가까웠다.
이래서는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
“흑마녀.”
서리스의 부름에 그의 주머니에서 검은 개구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저 숲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겠어?”
흑마녀는 정확한 지명은 몰라도 용제의 거처는 아는 눈치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희망을 걸어 보기로 하자.
이내 개구리는 주머니에서 도약해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러곤 눈밭을 한바탕 뒹군 뒤, 그대로 고개를 눈에 파묻고 한참 있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가능할 거 같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쓸모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흑마녀를 보며 서리스가 말했다.
“그럼 안내해봐.”
“어깨 위에서 말해줘도 될까.”
“올라와라.”
서리스가 손을 내밀자 이를 타고 어깨로 올라온 흑마녀는 서리스에게 우선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길을 바꾸며 위치를 특정해 주었고, 덕분에 서리스는 따로 헤맬 일 없이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눈 한 번 징글맞게 오네.”
아무리 추위에는 내성이 있다지만 서리스는 눈 안에 푹푹 박혀 축축해지는 신발과 젖어 가는 옷에 혀를 찼다.
펜타니엄은 사계절이 있는 도시지만, 마키나는 사시사철 눈이 쏟아지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나 싶었다.
“다 온 거 같아.”
새삼 척박한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흑마녀가 말했다.
걸음을 멈춘 서리스는 아무리 둘러봐도 나무밖에 보이지 않자 고개를 기울였다.
“다 왔다며?”
“아마 숨겨져 있을 거야.”
진법이라도 펼쳐둔 건가.
서리스는 숨겨져 있다는 말에 곧장 앞으로 더 걸어갔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기묘한 느낌과 함께 대기가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듯한 꺼림칙한 감각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확실히 이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 순간, 서리스는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을 해소시키는 기운을 발견했다.
그건 다름 아닌 금강잔월이었다.
‘여기가 맞군.’
이 장소가 용제의 거처임을 확신한 서리스는 펜타니엄과 검은별의 기운을 점차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오로지 금강잔월에만 집중하자 잠시 후 서리스의 몸은 소드란의 별빛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걸 인식하고 서리스가 고개를 든 순간 거기에는 매우 얇은 막이 하나 있었다.
그 위로 서리스가 손을 뻗자 무언가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서리스는 발을 내뻗었고, 그 순간 흑마녀의 개구리가 막에 막혀 어깨 위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보아하니 금강잔월을 다룰 수 있는 이만 출입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반투명한 막 너머에서 흑마녀의 개구리가 이쪽을 보고 눈을 깜빡이자 서리스는 막 너머로 고개만 내밀고 말했다.
“갔다 온다.”
“응.”
흑마녀를 두고 서리스는 용제의 거처로 걸어갔다.
그 안은 신기하게도 맑은 날씨였다.
누가 매일 가꾸기라도 하는 듯 다듬어진 정원을 지나자 저택이 하나 나왔다.
사용인이 없어도 무난하게 생활 가능할 것 같은 저택은 하얀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인가.’
정문을 바라보던 서리스는 조심히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용제의 거처를 드디어 찾아온 거다.
이곳에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비밀이 있을 것이었다.
“그 문고리, 잡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서리스는 고개를 뒤로 돌렸고, 거기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자신만큼 큰 키에 은발의 미중년.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는 서리스와 달리 바짓단에 눈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선조 님께서 그 문고리를 만지는 자는 얼어붙도록 해놨으니까.”
하지만 서리스는 그의 담담한 조언에도 그 어떠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그가 바로 천상사성 중 한 명인 영황 마키나 드페리널이었으니까.
‘영황이 왜 여기에?!’
은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이쪽으로 걸어온 그는 서리스가 당혹해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서리스가 이제껏 겪어 본 것 중 가장 거대하고 광활했다.
“문고리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슬프지 않겠나. 침입자.”
그 말을 들은 즉시 서리스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찼다.
그러는 순간 그가 방금 서 있던 위치에서 대량의 얼음이 솟구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당했을 거란 걸 눈치챈 서리스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감이 좋군.”
그의 말대로 방금 건 순전히 운이었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 서리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서리스는 하늘이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위로 올린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하늘을 수놓은 수만 개의 얼음 칼날들이었다.
뮤리널이 단 하나의 검에 절대영도를 담았다면 드페리널은 저 칼날 모두에 절대영도를 담아 놓았다.
그것도 마치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일말의 사전 준비도 없이 말이다.
‘그야 천상사성이니까!’
후대로 이어질수록 강해지는 별의 특성상 현 세계의 최강자인 천상사성은 단순하게만 따지면 삼무제 보다도 강하다.
언젠가 서리스의 세대에서도 천상사성을 뛰어넘을 인물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다.
하늘과 땅.
아니, 천하오장성은 되어야 그들 앞에서 겨우 하늘과 땅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상대로 서리스는 아직 날개조차 펴지 못한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만 제 얘길 들어주십쇼! 저는 침입자가 아니라……!”
“펜타니엄은 영지 심처에 무단으로 들어온 이의 변명을 끝까지 들어줄 정도로 자상한가?”
얘길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 그가 손가락을 아래로 그어 내리자 얼음 검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악스판시온 위로 그림자를 씌우고, 금강잔월과 검은 별까지 끌어 써 육체를 강화했다.
지금 저 괴물과 맞서려면 모든 힘을 아끼지 않고 다 퍼부어야 했다.
‘온다.’
쏟아지는 얼음의 검 앞에 서리스가 악스판시온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곽!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그의 근육이 요동치며 날아드는 모든 얼음 검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의 주위에는 깨져 나간 얼음 파편이 안개로 화해 자욱하게 피어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온 냉기는 자연스럽게 서리스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모든 얼음 칼날에 절대영도가 담겨 있었다.
그게 부서져 만들어진 안개 또한 당연히 절대영도와 같은 냉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서리스에게 이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제외하곤 주변 바닥이 모두 이미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아악!”
가빠온 호흡을 가다듬고자 기합까지 토해낸 서리스가 미친 듯이 검무를 췄다.
끝없이 쏟아지는 얼음검 속에서 서리스는 마치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의 집중력이 한계치까지 올라갔다.
오직 얼음 칼날을 분쇄하는 것에만 몰두한 그는 한계에 다다른 육체를 더더욱 몰아붙이며 담금질했다.
그리고 그 끝에.
챙강!
마지막 칼날 하나까지 부서트린 서리스가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가 절대영도의 영향으로 얼어붙어 삐걱거렸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절대영도의 기운은 서리스의 신체 기능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막았군.”
그리고 그런 그의 귀에 드페리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도 감흥 없어 보이는 그 목소리 앞에 서리스는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서리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넘어온 위기를 떠올려 보았다.
가장 최근에 겪은 위기라 하면 무장공주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서리스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었지만, 스타린을 상대할 때는 그 전력을 보였었다.
그때 그는 무장공주와 스타린을 보며 자신도 저런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갈망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서리스는 그런 생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사람이 절대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을 마주했을 때 느낄 깊은 무력감.
드페리널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무장공주는 그의 앞에서 10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란 걸.
“숨은 붙어 있나?”
그가 질문을 던지는 순간 서리스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악스판시온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신을 침입자라고 생각해 죽이려 하고 있다.
자신이 펜타니엄의 직계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답무용의 태도로 일관하며 말이다.
‘마키나에서 영황의 말은 곧 법.’
그가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마키나 모든 이들이 찬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리스는 제힘으로 여기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
‘락스카에게는 막혔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때를 넘어서 성장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서리스의 몸속 모든 별이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망아꾼의 분신을 사용할 때 터득했던 금강잔월에 검은별을 불어넣는 방식을 통한 각성.
거기에 악스판시온의 특성과 검은별, 펜타니엄을 합쳐 상대가 지닌 별조차 끊어내는 비기.
그리고 제왕월영도를 미약하게나마 사용하기 위해 재창조한 흑월영도까지.
자신이 지닌 모든 걸 다 끌어모으기 시작한 서리스의 발아래로 그림자가 요동쳤다.
떨어지는 어둠을 받아먹은 그림자는 서리스의 발을 타고 올라 그의 몸을 뒤덮었고.
그의 강건한 육체의 근간인 금장잔월이 그런 그림자를 붙잡았다.
서리스의 머릿속에서 가장 두려웠던 존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거대하고 새까만 용이었다.
태악룡.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끝없는 초롱의 가장 강한 주인 중 하나.
놈을 떠올린 순간 그의 그림자가 용솟음치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흐음.”
새까만 그림자로 뒤덮인 서리스를 보며 드페리널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게슴츠레하게 뜬 그의 두 눈에 비친 것은 검은색 꼬리와 뿔을 가진 용인(龍人)이었다.
그 검은 용이 이윽고, 새까만 눈동자를 떠올렸을 때 그가 바닥을 박찼다.
투쾅!
움직임보다 뒤늦게 울리는 소리가 그의 속도를 짐작게 했다.
그림자 용의 손아귀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 흉흉한 살기를 흩뿌리며 드페리널의 목을 노렸다.
태엥!
그러나 검이 노리던 부분에서 생겨난 얼음이 이를 손쉽게 막아냈다.
회심의 일격이었을 테지만 서리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곡예를 부리듯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리스는 평범한 사람의 인지 영역을 벗어난 속도로 드페리널에게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마치 수백 개의 검이 주변에서 몰아치는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생겨난 얼음은 모조리 그의 검을 막았다.
드페리널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서리스는 끝까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서리스의 단 한수로 무너졌다.
몰아치듯 휘두르는 그의 검에 닿은 얼음이 마치 무언가에 집어삼켜 지듯 그 모습을 감추었다.
얼음이 사라진 장소에서 뻗어져 나온 서리스의 검은 이제껏 당해왔던 한을 풀 듯이 모든 별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서리스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수를 선보였다.
흑월귀명도(黑月鬼銘刀)
육식(六式)
흑월영도·단(黑月影刀·斷)
그림자가 얼음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