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마키나 뮤리널.
마키나 가문의 직계 중 둘째이자 그녀의 오빠 엑스널을 따라 일곱별 중 영성이라는 별호를 딴 그녀는 촉망받는 인재였다.
실제로 그녀는 재능 면에서는 엑스널보다도 뛰어났고, 마키나 내에서 그녀가 차기 마키나 가주로 언급되는 일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엑스널이 락스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혔듯이 뮤리널은 샬롯에게 막혀 있었다.
동년배.
같은 천재.
그녀들은 항상 누구 실력이 더 뛰어난지 비교당하며 대중의 입방아에 올랐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이 주제로 떠드는 이들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일곱별의 첫 총회 당시 그녀가 샬롯에게 무참히 깨지고 말았으니까.
압도적인 실력 차 앞에 뮤리널은 순식간에 잊혀갔다.
“너 따위에게 샬롯이 졌다고?”
그래서인지 서리스의 발언을 들은 뮤리널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리스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답해 주었다.
“그래.”
“웃기지 마!”
“너도 소문은 들었을 텐데?”
청랑단 입단 시험 당시 샬롯과 서리스가 붙었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라이벌 가문인 만큼 펜타니엄 쪽 정보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는 마키나에다가 샬롯과 관련된 내용은 집착하듯 반응하는 뮤리널이다.
이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거야 헛소리인 게 당연하잖아.”
그녀는 조금도 그 소문을 신용하지 않는 듯했다.
눈앞에서 지켜본 이가 몇 명인데 저러는지.
“샬롯이 나한테 졌다면 너도 나한테 진 셈이니 인정하기 싫은 거냐?”
“헛소리하지 마! 우리 샬롯이 어떻게 너 같은 거한테 져!”
그 순간 서리스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별을 내고 있다는 것도 잊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뮤리널을 보고 있자 그녀가 이를 바득 갈았다.
“샬롯이 너한테 질 리가 없잖아.”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서리스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분명 서리스는 뮤리널이 샬롯에게 패배한 수치심으로 그녀를 시샘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녀는 샬롯과 관련된 모든 것에 예민하게 군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뮤리널을 직접 본 적이 없었어.’
신문에서나 종종 접했을 뿐 그녀와 직접 마주해본 적이 없던 서리스는 뮤리널을 직접 보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뮤리널은 샬롯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동경과 선망.
뮤리널이 샬롯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집착한 건, 저런 감정의 발로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샬롯을 동경해서 마키나가 포기했던 검마저 다시 쥐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지금까지 그녀가 샬롯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포악하게 굴었다는 소문을 다시 곰곰이 떠올려 본 서리스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출처가 전부 샬롯의 흉을 본 이들이란 걸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의외네.”
엑스널과 같은 타입이라 생각했더니 오히려 이런 쪽이었을 줄이야.
“그 오명 내가 벗겨 주겠어! 나한테 지면 샬롯이 너한테 패배했다는 말이 절대로 안 나올 거니까!”
“그래, 그래.”
버릇없는 꼬맹이인 건 똑같았지만, 살짝 김이 새버린 기분과 함께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들었다.
그 순간 뮤리널이 사라졌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서리스가 고개를 틀자 거기에는 얼음으로 세공된 검을 내지르고 있는 뮤리널이 있었다.
그녀의 검은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는 레이피어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레이피어를 찔러 넣자마자 검날에서 솟아난 수십 개의 얼음 날이 나뭇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어졌기 때문이다.
찌르기에 이은 후속타.
만약 일반적인 검사를 상대해 왔던 이라면 당하기 좋은 연계기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이 정도로 뭘 하려고?”
서리스는 검을 쓰기는커녕 자기 손으로 날아드는 얼음 가시를 전부 부쉈다.
그러곤 그 부서진 얼음 가시의 파편을 다시 뮤리널에게 되덜려주듯 던졌고, 이를 그녀는 레이피어로 전부 깨부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별을 그렇게 적게 담지는 않았는데?’
말로는 서리스를 무시했지만, 그녀는 그가 별을 썼을 때부터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샬롯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그가 타고난 별이 상당하단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처음부터 속전속결로 끝낼 속셈으로 공격했건만 설마 검도 안 쓰고 자신의 공격이 파훼 당할 줄이야.
‘설마 검은 페이크?’
이런 간악한 수로 샬롯을 상대한 건가.
그리 생각한 뮤리널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레이피어를 따라 새하얀 냉기가 묻어 나왔다.
빙천괴령(氷天怪令)
사식(四式)
빙천척뢰(氷天刺雷)
뮤리널의 냉기를 머금은 열 번의 찌르기가 번개같이 서리스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하나가 사람의 급소를 노린 찌르기다.
닿는 즉시 얼어붙을 찌르기를 앞에 두고 서리스가 한 것은 손날을 세운 채 앞으로 뻗는 거였다.
그걸 본 순간 뮤리널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검을 상대로 맨손을 내민다든가 하는 짓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광경을 본 그녀는 자신의 머리털이 쭈뼛 솟는 느낌을 받았다.
챙챙챙챙!
그는 자기 손날이 마치 검이라도 되는 듯, 자신이 내지른 혼신의 찌르기를 모두 다 쳐내 버린 것이다.
그 깔끔한 동작의 연계는 뮤리널의 찌르기를 모두 꿰뚫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뭔 얼빵한 표정을 짓고 있냐? 네 냉기로는 나를 못 뚫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금강잔월이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서리스의 육체는 냉기에도 화기에도 심지어 독에도 점차 피해를 보지 않게 되고 있었다.
하물며 7성에 올라 대해의 주인이자 흑마녀의 기운까지 받은 도을까지 잡아먹은 서리스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또래 사이에서 천재일 뿐인 뮤리널이 그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하지만 뮤리널에게 있어 그 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
그리고 이는 전부 서리스가 일부러 노린 것과도 같았다.
뮤리널과 엑스널의 다른 점이 있다면 엑스널은 빙천괴령의 최종 비기인 절대영도를 꺼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반면에 타고나기를 마키나의 별에 사랑받는 뮤리널은 파괴력은 좀 줄어들지언정 시간 제약 없이 검 위에 절대영도를 두를 수 있었다.
평소에도 참을성이 없는 뮤리널답게 그녀는 그 즉시 별을 불러들였다.
폭발적으로 몰려든 별은 순식간에 그녀의 검 위에 냉기를 응축시켰고.
세상 모든 것을 얼릴 수 있는 마키나의 최종 비기가 완성되었다.
빙천괴령(氷天怪令)
십식(十式)
절대영도(絶對零度)
설야조차 얼어 붙일 냉기가 응집된 검이 서리스의 가슴을 향해 정확히 쇄도했다.
비록 검에만 국한된 절대영도라곤 하나 저건 서리스라고 할지언정 맨손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처음으로 검을 휘둘렀다.
별을 잡아먹는 악스파시온을 말이다.
“어?”
악스판시온이 뮤리널의 검과 이어진 마키나의 별을 삼켜 버린 순간 그녀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쨍그랑!
이내 그녀의 검이 박살이 나며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는 자신의 텅 비어버린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서리스의 손이 그녀의 멱살을 잡곤 그대로 엎어 쳐 땅에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아악!”
비명을 한차례 내지른 뮤리널은 등에서 온 충격에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당황해서 몸에 별을 두를 정신도 없었기에 그대로 충격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팍!
그 순간 자기 등을 손으로 감싸며 끙끙거리던 뮤리널의 얼굴 앞에 서리스의 부츠가 내려왔다.
“일어나. 아직 끝나려면 멀었으니까.”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뮤리널이 고개를 든 순간 거기에는 흉흉한 안광을 흘리는 서리스가 서 있었다.
“힉.”
그 모습은 가히 악귀나찰과 같았기 때문에 뮤리널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조금 전 거로 그와 자신의 격차를 한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괴물이다.
여기 괴물이 있었다.
“자, 잠깐, 기다려.”
“안 일어나면 내 쪽에서 간다.”
그가 그 말을 한 즉시 검을 들어 올리자 뮤리널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뮤리널은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할 때까지 서리스에게 혼나야 했다.
그리고 설야가 펼쳐진 도시에서 그런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 * *
악스판시온을 그림자로 되돌려 놓은 서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이곳저곳 멍이 잔뜩 든 뮤리널이 양손을 들고 무릎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꼰대 기질이 있는 서리스는 그녀의 버릇 없는 행동을 철저히 교육했고, 그 결과 뮤리널은 서리스와 눈만 마주쳐도 피하게 되었다.
“뮤리널.”
“으, 응, 아니, 네, 넷!”
반말을 하려다가 서리스의 눈이 날카로워지자 급하게 존댓말을 붙인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그런 뮤리널을 보고 서리스는 본론을 꺼냈다.
“용제의 거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뮤리널이 대답하지 않자 서리스는 어깨를 풀기 시작했고, 그녀는 서둘러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위치는.”
“그게, 그.”
그러자 뮤리널이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혹시 용제의 거처는 마키나에서도 비밀인 걸까?
그렇다면 그녀가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어릴, 때 봐서, 위치를 정확히는 몰라서…….”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뮤리널이 관심 없어서 잊어버린 것 같았으니까.
“기억이 아예 안 난다는 거냐?”
“힉, 어렴풋이는 나요! 재아의 숲에 있어요! 그건 확실하니까!”
서리스가 또 혼낼까 싶어 뮤리널은 급하게 대답했다.
버릇없던 애가 착실하게 변했음에 서리스는 만족하곤 턱을 매만졌다.
재아의 숲이라.
여기는 마키나다.
뮤리널을 좀 혼낸 것이야 그녀가 먼저 무례하게 굴고 덤벼들었으니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 이상 뮤리널을 끌고 다닌다면 마키나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그녀는 마키나의 직계고, 가주 후보자 중 한 명이니까.
‘애초에 설야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못했을 테고.’
설야라서 밖을 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그녀를 망설임 없이 혼낼 수 있었던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가 어딘지 특정 지을 수만 있다면, 혼자서 찾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알았다. 마지막 벌로 내가 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러고 있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낸 서리스가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가자 뮤리널은 정말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그러곤 이내 서리스가 보이지 않자 팔을 내린 그녀의 얼굴은 상처 난 자존심 때문에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내가 이런 꼴을.”
부끄럽기 짝이 없는 꼴을 당했다고 생각한 뮤리널이 욱하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뮤리널.”
그러는 그 순간 그녀는 눈보라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나, 나, 벌서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외치던 뮤리널은 곧 눈보라 속에서 걸어온 인물을 보곤 몸을 굳혔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눈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아 마치 다른 공간에 서 있는 듯한 한 남자.
그가 등장한 순간 그녀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무릎부터 꿇었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천상사성(天上四星)
영황(靈皇)
마키나 드페리널
그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막 최흉에 다녀왔는지 옷에 이런저런 마수의 핏물이 남아 있던 그는 은색의 눈으로 뮤리널을 내려 보았다.
“왜 그런 꼴로 여기 있지?”
그리고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뮤리널은 뼈 내부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말해야 할까?
자신이 서리스에게 어떤 창피한 꼴을 당했는지?
한순간 고민에 잠긴 그녀였지만, 사실 그런 생각 자체가 의미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마키나의 가주였기 때문이다.
마키나에서는 그의 말이 법이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이었다.
“그것이…….”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겪은 상황을 전부 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