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소드란 가문이 사라진 이유에 관해 알게 된 서리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용제가 어디까지 계획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가 짠 이 계획의 주축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나 용신을 막고 싶었던 건가.’
서리스의 시선이 요치아에게 닿았다.
그가 용신에 관해 알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만약 알았더라면 용제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이미 움직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스타린 님은.’
이미 용신을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리스는 어서 빨리 용제의 거처에 가볼 필요성을 느꼈다.
거기에 분명 답이 있다고 자기 감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도와 이것저것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용제를 찾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냐.”
요치아의 질문에 어디까지 말해줘도 괜찮을지 잠시 고민하던 서리스는 결국,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자 그는 서리스를 잠시 바라보다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녀석이 지고 있던 짐이 만약 너에게 옮겨 간 거라면, 책임감 때문에 너무 거기에 매달리지 마라. 이미 다 늙어버린 노친네들보다 네놈 삶이 더 중요하니까.”
그 말에는 서리스를 향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서리스는 그의 핏줄이기 이전에 소중한 제자였다.
비록 그 속은 서리스가 아닌 다른 이라고 해도 스승과 제자로서의 관계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그 진심이 와닿아서일까, 서리스는 괜한 뭉클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저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럼 됐다.”
요치아는 닫았던 방문을 열어주곤 밖을 가리켰다.
“얼른 가보거라. 아까부터 당장 뛰어나가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표정이니.”
‘이런, 티가 났나.’
표정 관리를 꽤 잘하는 자신인데 아무래도 충격적인 상황이 연이어 겹치면서 속내가 그대로 겉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요치아의 손 방향을 따라 밖으로 걸어 나오던 서리스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라 그를 돌아보았다.
“뭔가 할 말이 남았더냐?”
“스타린 님께서 반로환동은 영혼과 육체의 규합이 중요하다고 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요치아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무언가 떠올리려는 듯 골똘히 고민했다.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
그 사실까지는 알 수 없는 서리스였다. 이내 그는 장고에 빠진 요치아에게 한차례 고개를 숙이곤 발걸음을 옮겼다.
부디 다음에도 별 탈 없이 그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부스럭―
그렇게 산에서 내려오며 서리스는 주머니에서 흑마녀가 주었던 검은색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흑마녀.”
새까맣게 빛나는 브로치에 말을 걸자 서리스의 어깨 위로 검은색 공간이 생겨나더니 이내 그때 보았던 개구리가 내려왔다.
“불렀어.”
“그래, 내가 묻는 게 맞는지 답해라.”
서리스는 자신이 깨달은 부분에 관하여 흑마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용제가 용신에게 맞서기 위해 금강잔월을 이용하여 별의 그릇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자신을 불러드렸냐고.
“응, 맞아. 열쇠 말고는 용신과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변절자를 이용해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용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변절자만이 놈을 죽일 수 있단다.
‘용제는 서리스가 용신으로부터 검은별을 받을 거란 걸 예상했던 걸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 부분은 그의 거처에 어떤 흔적이 남아 있기를 바라야지.
“알았다. 난 일단 용제의 거처로 가봐야겠다.”
“따라가도 돼?”
“그래, 지금 당장은 널 믿어 주마.”
성위의 경고도 있고, 흑마녀라는 존재를 완전히 신용할 수 없던 서리스는 일단은 그리하라고 전했다.
그러다 문득 서리스는 때마침 물어볼 만한 게 떠올랐다.
“흑마녀, 내 기억에 의하면 넌 단어를 뒤섞어서 이상하게 말하지 않았었냐?”
그녀가 개구리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이었다.
그런 서리스의 의문을 듣고 흑마녀는 답을 해주었다.
“나는 이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니까. 이 정도의 개입은 멸망한 우리 세계의 파편을 사용했을 때만 가능해.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걸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사용한 건가.
서리스는 적어도 흑마녀가 용신을 처치하는 데는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부분만큼은 믿어줘도 되겠지.
‘내 인생은 언제나 밑바닥이었다.’
몰락한 가문의 가주로서 수많은 손가락질과 비웃음, 멸시를 받았던 삶.
그러니 두 번째로 얻은 이번 삶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
친구들과 동료, 그리고 스승과 형제들도 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오직 가문밖에 없었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인 것이다.
“나는 그 몰락한 가문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던졌던 놈이란 말이지.”
스스로 되뇌듯 혼잣말을 내뱉은 서리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환하게 빛나는 소드란이 보였다.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준 것이 용제일지는 몰라도.
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지금 서리스 자신이다.
그리고 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 또한 자신.
‘당신이 준 기회…… 반드시 지켜 내보이겠습니다.’
선조를 평생토록 원망만 해왔던 서리스였다.
그러나 이제는 원망이 아니라 감사 한마디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이것은 짐이 아니다.
서리스 또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로써 이곳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용신은…… 내가 반드시 죽이리라.’
그런 결심과 함께 서리스는 마키나를 향한 여정에 올랐다.
* * *
항상 눈이 내리는 북부에 위치한 마키나.
다른 곳은 이제 여름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겨울인 마키나의 성벽을 넘은 서리스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키나에 진입하고부터는 추운 날씨 때문에 비룡을 타고 이동이 불가능해졌던 탓이다.
‘나야 어느 정도 견딜만하지만.’
금강잔월을 익힌 덕일까.
마키나의 추위에도 큰 문제가 없었던 서리스는 주머니에서 약도를 꺼냈다.
잔루크를 통해 미리 마키나의 지도를 받아 놨던 서리스는 약도와 최근 지도를 대조해봤었다.
하지만 워낙 옛날에 그려진 약도이다 보니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었고, 덕분에 직접 발로 뛰어야만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중심지에 있단 거겠지.’
수소문하다 보면 이 장소를 찾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하고 서리스는 속도를 높였다.
달리는 거에는 이골이 난 그이기에 이제 웬만한 말보다 빠르고 오래 뛸 수 있었다.
거기에 추위에 대한 제약도 없는 만큼 서리스는 금방 중심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눈이 많이 오긴 했지만, 그에게는 딱히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름 때문에 어둑한 하늘. 서리스의 눈에 마키나의 중심지에 다 왔다는 증거인 새하얀 성벽이 보였다.
저기만 넘으면 도착이라는 생각에 서리스는 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서리스는 한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마키나 영지 외곽이야 비싼 비룡을 타고 온 만큼 귀족이라는 신분을 확신한 위병소 근무자들이 별다른 검문 절차 없이 통과시켜 주었지만.
중심지에 들어갈 때는 분명 신분 검사를 할 게 분명했다.
‘소란이 좀 날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신분을 위조하고 들어갔다가 걸리면 더 골치 아파진다.
펜타니엄과 마키나는 사이가 무척이나 나쁘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둘 다 오대가.
서리스는 펜타니엄의 직계인 만큼 여기서는 일이 좀 복잡해지더라도 차라리 신분을 제대로 밝히고 마키나 위쪽에 보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맞았다.
“응? 뭐야. 저거, 사람?”
“설야가 시작됐는데,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고?”
서리스가 관문 앞으로 다가오자 꽁꽁 싸맨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안쪽에 갖춰진 난로 앞에 앉아 있던 문지기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눈이 너무 와서 어둑한 하늘이 반복되는 일주일을 설야라고 하는데.
이때는 들짐승들도 자기 굴에서 안 나오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거 아닌감?”
“혹시 귀신이라던가.”
“죄송하지만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서리스가 답하자 흠칫한 문지기들이 눈을 끔뻑이며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저 눈을 뚫고 왔는데도 조금의 지친 기색이 없는 그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신분 검사 안 합니까?”
“아차.”
서리스에게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압박감 때문에.
그를 바라만 보고 있던 문지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자신들의 일을 수행하려 다가왔다.
“미안하오.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에 방문객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말이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 좀 보여주겠나?”
서리스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패를 본 그들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서리스가 꺼낸 것은 펜타니엄 직계를 상징하는 패였기 때문이다.
마키나에 펜타니엄이 나타났다.
그것도 직계가!
“죄,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문지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상부에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이 이리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서리스는 그냥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키나 쪽에서 도와준다면 일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서리스가 한동안 무척이나 긴장한 문지기와 함께 있으려니 저 멀리서 병사 한 명이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고급스러운 코트를 입은 이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키나 쪽 귀족인 듯하였다.
“헉, 허억, 펜타니엄 서리스 님, 본인이 맞습니까?”
눈을 뚫고 달려오느라 고생한 그가 묻자 서리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펜타니엄 서리스라고 합니다.”
“반, 갑습니다. 마키나 중심 성문 대장 아르코 도리스입니다.”
그는 고개 숙여 서리스의 인사를 받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바로 본론입니다만, 확인해 보니 오늘 마키나 방문 예정자 중에는 펜타니엄이 없어서 그런데, 여기는 어떤 경위로 오신 건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개인적인 볼일이라 사전에 따로 연락을 넣을 시간이 없었군요. 방문 목적은 마키나에서 찾아볼 게 있어서입니다.”
은연중에 다른 이에게 목적을 말하기를 꺼리는 태도를 보이니 그는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이상 성문 대장은 절차상 이곳에 온 것일 뿐이고, 대가문 직계의 목적을 캐물을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정식으로 출입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마키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중간에 낀 그만 고생했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감사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키나는 새하얀 눈의 도시 같았다.
설야가 몰아치고 있는 만큼 거리에는 사람 대신 눈만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집들의 천장에는 따로 문이 하나 더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눈이 너무 쌓여 일반 문이 막힐 것을 대비해 설계한듯하였다.
삶의 지혜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듯한 거리를 보며 서리스가 용제의 거처를 찾기 위해 거리를 걸었다.
서리스는 그러다 이내 이쪽으로 똑바로 달려오고 있는 인기척을 느끼곤 발걸음을 멈췄다.
흩날리는 눈 때문에 가시거리가 짧았지만, 이내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은발을 보자마자 서리스는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영성(靈星)
마키나 뮤리널
엑스널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자 콧대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 천재.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눈보라를 뚫고 와서인지 코끝이 살짝 빨간 뮤리널의 시선이 이쪽에 닿았다.
혹시 마키나에서 자신이 허튼짓할까 싶어 감시 차원으로 보낸 걸까.
그녀와 얼마간 눈을 마주치자 뮤리널은 곧 인상을 찌푸렸고, 서리스를 쏘아보며 외쳤다.
“펜타니엄 직계가 찾아왔다 해서 와봤더니 샬롯이 아니고 너였어?”
그녀의 불만이 담긴 노골적인 시선을 마주하고 서리스는 깨달았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아, 헛걸음했잖아. 어떡할 거야? 짜증 나게.”
그녀의 버릇 없는 태도를 보고 서리스는 앞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너, 삼 남이었나? 지금이면 워너힐 아카데미에 다닐 시기 아니야? 여기 있는 걸 보니 워너힐 아카데미도 떨어졌나 보네.”
“뮤리널, 한 가지만 물어보자. 용제의 거처가 어디 있는지 아냐?”
뮤리널의 말을 무시하며 서리스가 자신의 목적부터 던지자 그녀의 얼굴이 더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감히 너 따위가 자기 말을 무시했냐는 모습이었다.
“용제의 거처는 왜…… 그것보다 네가 너한테 그걸 왜 가르쳐줘야 하는데?”
저 녀석 알고 있다.
“그럼 충고 한 가지만 하지.”
서리스의 몸에서 서서히 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버릇없는 녀석들이 질색인 그는 뮤리널의 첫 태도에서 이미 상대를 배려해 줄 이유를 잃었다.
서리스가 범상치 않은 별을 흘리기 시작하자 뮤리널 또한 멈칫하고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뮤리널, 넌 샬롯한테 진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복수하고 싶은 거로 알고 있다.”
그 순간 그의 그림자가 설야조차 집어삼킬 듯 사방으로 퍼졌다.
“그 샬롯은 나한테 졌다.”
그 말로 충분했다.
뮤리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천재이나 같은 나이 또래의 그보다 더 높은 천재가 존재했기에 열등감이 가득 차 있던 마키나 뮤리널.
그녀에게 있어 샬롯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 분노를 터트릴 기폭제였기 때문이었다.
“덤벼. 버릇 좀 고쳐주마.”
한 살 위 연장자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