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거래?”
“예, 거래 말입니다.”
칼릭스가 반문하자 서리스가 웃으며 답했다.
그 미소를 보고 한동안 침묵하던 칼릭스는 여러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리스, 네가 나한테서 얻어갈 만한 게 있었나?”
칼릭스가 보기에 서리스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거래 상대였다.
이 사촌 동생은…… 원하는 게 있다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쟁취하는 타입이었고.
평범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금전욕이나 재물욕, 심지어 출세욕조차도 별로 없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좋은 제안을 수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안을 에둘러 거절해 왔다.
“애초에 내가 주려는 자리도 따지고 보면 절대 낮은 게 아니야.”
새로 창설되는 단에 들어간다는 것은, 물론 처음에 고생도 많이 하겠지만, 초창기 일원이라는 메리트는 무척이나 크다.
하물며 무려 세계 침식자만을 전문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창설되는 단이다.
각 단 여기저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가 모일 텐데, 거기서 활약한다면 무슨 득을 볼 수 있을지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런 좋은 자리로 보내주겠다는데도 조건을 거는 서리스였다.
칼릭스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좋아. 일단 말해봐.”
그런 그를 보고 서리스가 어려운 게 아니라는 양 웃었다.
“제 다음 훈련이 발리움에서이지 않습니까. 그 한 달, 개인적으로 좀 쓰고 싶습니다.”
“한 달씩이나 훈련을 빠지겠다라. 어디 놀러라도 갈 생각이야?”
“그런 거라면 차라리 훈련이 낫겠죠.”
칼릭스의 농담을 적당히 받으면서도 서리스는 끝까지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서리스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보던 칼릭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하지. 내가 교관에게는 따로 말해놓을 테니까.”
“하하, 핏줄이 좋긴 좋네요. 사촌 형 덕도 다 보고.”
“대신.”
“창설하는 단에는 들어가 주도록 하죠.”
서리스는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는 양 쉽사리 말했다.
방금까지 가주니 뭐니 하면서 자신을 한껏 도발했던 주제에 무척이나 가벼운 태도였다.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여기저기서 자기 일을 망치며 워너힐 아카데미에서도 성장하는 모습이 계속 걸렸지만.
‘어쩌면.’
미래에는 현재 가장 큰 산이라고 할 수 있는 락스카보다도 서리스가 더 문제일지 모르겠다.
칼릭스의 시선에 방긋 웃어 보인 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고생하십쇼.”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우뚝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뭐지.”
“저야 뭐, 가주 자리에 목매지 않기는 합니다만 다른 형제들은 다르거든요? 특히 첫째 형님 말입니다.”
락스카는 자신이 가주가 될 것이란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펜타니엄 가주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이였다.
“첫째 형님을 꺾을 자신이 있긴 합니까?”
칼릭스는 분명 검사로서 실력이 모자란 편은 아니었다.
그가 발리움의 단장인 것만 보아도 그 실력은 충분히 증명됐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게다가 서리스가 전부 망쳐 놓아서 그렇지, 머리 회전도 빠르고, 뒤에서 처리하는 일솜씨도 절대 모자라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뒷공작으로 방계라는 족쇄를 벗어 던지고 가주가 될뻔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락스카는 위에 있었다.
그가 지닌 재능은 샬롯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기에 서리스는 물어보았다.
이만큼이나 틀어진 상황 속에서 그가 락스카를 꺾을 방법이 있긴 하냐는 의미를 담아.
“하.”
서리스의 질문을 들은 칼릭스의 얼굴 위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뒤틀린 미소는 서리스조차 한순간 기분 나쁘게 만들 정도였다.
“호랑이는 이빨만 뽑으면 가진 게 없는 법이야. 서리스.”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 이상은 네게 말해주지 않겠다는 듯 칼릭스가 입을 다물자 서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문고리를 돌렸다.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인 걸 기억하십쇼.”
그 말을 남기고 서리스가 떠나가자 칼릭스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내 열려있는 서랍 안쪽으로 향했다.
서랍에 들어 있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함이 느껴지는 새까만 비늘 하나였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서랍 문을 닫았다.
* * *
칼릭스와의 거래를 통해 어쩌다 보니 한 달간 시간적 여유를 얻은 서리스는 짐을 싸고 있었다.
이 한 달간 해야 할 건, 용제의 거처를 찾는 것.
그걸 위해서 우선 요치아를 만나러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준비를 해두는 것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서리스는 바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서리스, 정말로 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준 서발광의 말에 서리스는 미안한 듯 웃었다.
도로시나 서발광은 자신이 아카데미로 데려온 것과 다름없는데, 그들을 두고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워야 하니 내심 신경 쓰였다.
“미안, 앞으로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서.”
자세한 것은 말해줄 수 없었지만, 이번 일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용신이라는 존재도 존재지만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이유에 관해 확실하게 확인할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쌓인 의문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이니, 기회가 왔을 때 놓치면 안 되었다.
“직계님! 이것도 가져가!”
그러는 사이 직접 만들어 온 건지 도로시가 주먹밥 하나를 주었다.
뜻밖의 선물에 서리스는 피식 웃으며 주먹밥을 받아 잘 넣어 두었다.
“가는 길에 먹으마.”
그리 말한 서리스는 둘의 배웅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펜타니엄까지는 비룡을 타고 갈 생각이기 때문에 비룡장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서리스.”
그때, 저택 입구에 서 있는 크라페가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였다.
배웅 정도는 해주려는 모양인가.
그런 크라페를 보고 서리스는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크라페, 너 다음에 가문비기를 쓸 때, 그 힘을 응축시키려고 노력해봐.”
“응축?”
“그래, 저번에 나한테 강해지는 법 좀 가르쳐 달라며? 그 과제다.”
“……알았어.”
응축이라는 단어를 곱씹는 크라페를 보니 한 달 뒤면 그 또한 꽤 달라져 있을 것 같았다.
애들은 빨리 성장하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비룡장에 도착해 있었다.
예약해 놓은 비룡에 올라타려던 서리스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눈치챈 듯 쓴웃음을 짓곤 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비룡이 날개를 펼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비룡의 모습이 점으로 사라지자 서리스의 시선이 닿았던 장소에서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건 아이랑이였다.
서리스가 한 달간 떠난다는 소식을 접했던 그녀가 배웅을 나온 것이었다.
“참, 너무하신 분이네.”
자기가 그림자에 숨어서 엿보고 있단 걸 눈치챘던 것이겠지.
그러다 아이랑은 저 멀리 비룡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한 소녀, 발렌타인을 보곤 짧게 웃었다.
그래도 자신은 늦지 않게 얼굴 정도는 봤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첫날밤, 비룡을 타고 서리스가 가장 먼저 간 장소는 미개척 지역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한 마을이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래빗 마을.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 전, 서리스가 용병 잔루크와 만났던 마을이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하루 쉬어갈 겸,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다.
최근 세계 각지의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잔루크의 덕이 컸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비룡 조종사와 함께 서리스는 잔루크가 터 잡았다는 용병 사무소 붉은 이리를 찾아 거리를 걸었다.
다행히 그 간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고, 서리스는 용병 사무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내부는 꽤 한산했다.
아마 대부분은 어디 가서 술 한잔 걸치고 있는 거겠지.
“뭐야. 저 애송이는?”
“덩치는 꽤 좋은데.”
그래서인지 서리스가 용병 사무소 안으로 들어오자 자리에 앉아있던 용병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가 카운터 쪽으로 향하자 탁자 앞에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용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어이, 귀족 나으리 오늘은 업무 시간이 지났는데, 내일 다시 오지 그래?”
덩치는 좋아도 아직 얼굴에 앳됨이 남아 있는 서리스라서 그런지 어디 귀족 아들내미쯤 되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잔루크는 어딨지?”
그들의 오해를 풀어줄 이유가 딱히 없었기에 서리스는 질문으로 답했다.
그 말을 들은 용병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잔루크? 잔루크으? 이봐, 귀족 나으리, 우리 단장님이 당신 친구야? 이름을 막 부르면 나와야 하게?”
그는 카드 게임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오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삼류 양아치였다.
이런 녀석들을 직접 상대하는 게 귀찮은 서리스였지만, 그는 이런 족속을 잘 알고 있었다.
“이따가 눈 뜨고 나면 사과하러 와라.”
남성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서리스는 들어 올린 주먹으로 그의 턱을 후려갈기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빠악!
서리스 앞으로 다가온 용병의 머리통이 두 쪽으로 쪼개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가 고꾸라졌다.
물론 서리스는 아직 주먹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이게 돌았나. 이분이 누군 줄 알고 막 뻗대고 있어!”
그의 머리를 내려친 이는 서리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잔루크.”
“하하, 서리스 님! 반갑습니다!”
예전에 봤던 푹 패인 눈매와 폐인 같이 엉망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서리스의 지원으로 다시 용병단을 일으킨 것이 그의 인생에서 큰 반환점이 된 모양이었다.
“이놈이 좀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제가 좀 더 직원 교육을 똑바로 하겠습니다.”
“괜찮아. 내가 여기 자주 올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쪽이 갑자기 불쑥 나타난 거다.
용병들 입장이 꼭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하나하나 설명하기 귀찮으니 한 놈을 본보기로 쓰려고 한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뭐야. 누군데 저 잔루크 단장님이 저렇게 쩔쩔매?”
“서리스? 방금 서리스라 하지 않았냐?”
“설마 단장이 매일 말하던 그 펜타니엄 서리스?”
용병들이 놀란 눈으로 소곤소곤 떠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잔루크가 그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좀 해놨던 모양이다.
“큰일이구만. 나 무례한 짓 안 했지?”
“귀, 귀족은 어떻게 대하는 거냐?”
동시에 그들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만 보아도 잔루크가 용병들 사이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하단 사실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눈을 돌린 서리스는 잔루크에게 말했다.
“잔루크,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안내하겠습니다.”
서리스가 입을 떼자마자 잔루크는 눈치 빠르게 안쪽으로 이동했다.
쓸만한 부하를 뒀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그의 뒤를 따라 방 하나를 안내받았다.
손님 응대용 방인지 그는 손수 다과를 내오며 서리스가 편히 있을 수 있도록 도왔다.
“원하시는 정보가 어떤 건지…….”
“용제와 관련된 정보가 얼마나 있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주는 것까지 서리스는 만족하며 물었다.
평범한 대중에게 용제가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알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