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사진산과 만난 서리스는 칼릭스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거로 막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그와 서리스의 관계는 악연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말을 전하라 했다?
당연히 뭔가 음흉한 목적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무슨 볼일이랍니까. 본인이 직접 올 것이지.”
“너무 그러지 마. 우리 단장도 바쁘긴 하거든.”
서리스가 칼릭스와 사촌 관계라서인지 그의 무례한 태도에도 사진산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사촌 관계이니 이런 친숙한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했다.
‘내 경우, 그와는 가족으로서 생긴 정이 아니라 그냥 적의지만.’
사진산이 거기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야기할 게 좀 있다더라. 얼굴 좀 볼 수 있겠냐던데?”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잠시동안 고민했다.
‘무슨 목적일까.’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칼릭스와 관련된 건 죄다 암살이었으니 말이다.
‘사진산을 통해 말을 전했다는 건 일부러 암살이나 뒷공작을 할 의도는 없다는 걸 테고.’
만약 그를 찾아갔다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진산이 증인이 된다.
뭔가, 뒷공작을 저지르고 싶었다면 사진산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다음 훈련 수업이 발리움이었지.’
아이랑과 크라페와 함께 이어질 다음 수업은 다름 아닌 발리움에서였다.
칼릭스는 발리움의 단장.
학생 단장만이 존재하는 발리움인 만큼 사실상 그가 발리움의 실세라고 봐도 무방했다.
‘잘하면.’
요치아를 만나러 갈 시간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칼릭스가 무슨 수작을 부려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자신은 성장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가면 되겠습니까?”
“아, 정말? 고맙다. 바로 가면 돼. 발리움으로 가는 길은 알아?”
“예, 알고 있습니다.”
사진산에게 인사를 받은 서리스는 별거 아니라는 양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유달리 만날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발리움은 워너힐 아카데미 지부에 속해 있는 만큼 본관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다른 지부들은 땅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것에 반해 발리움은 건물 하나 정도.
그러나 아카데미 내에서 그들의 입지를 고려하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사건은 발리움에서 정해진 규칙을 따라 관리하고 판결하기 때문이다.
무려 교장인 성위가 직접 그들의 능력을 보장해 주는 만큼 학생 중 누구도 발리움의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같은 귀족이라도 말이지.’
본인의 선택인 자퇴가 아니라, 뭔가 잘못을 저질러 워너힐에서 퇴학을 당한다면 집으로 돌아가서도 가문의 수치로 취급받기 때문에 귀족들도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음, 누구지?”
서리스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한 남성이 이쪽을 보았다.
발리움 특유에 흰색 바탕에 해태 금색 자수를 새겨 놓은 제복의 그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펜타니엄 서리스입니다. 발리움 단장님이 부르셔서 왔습니다.”
“서리스? 와, 네가 그 칼릭스 단장님 사촌이구나! 반갑다. 얼른 들어가.”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길을 비켜주었다.
서리스는 새삼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지 자각했다.
첫째 형은 테르넬 최연소 단장에다가 사촌 형은 발리움 단장.
거기다가 자신은 입학하자마자 수차례 큼직큼직한 사건을 일으켰으니 유명하지 않으려야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헐, 서리스지? 쟤.”
“칼릭스 단장님 사촌 동생?”
“딱 봐도 다음 기수 발리움 후배님이네.”
그렇다 보니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마다 자신을 알아보며 한두 마디씩 말을 걸어왔다.
‘주목받는 걸 즐기는 것도 슬슬 지치는 기분인데.’
청랑단 때야 새로운 인생에 워낙 들떠서, 그런 것도 즐기고 그랬지만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왜 유명한 사람들이 굳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지 알겠다는 듯 서리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감쌌다.
그러던 그의 눈에 유달리 좋아 보이는 외형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문 앞에 달린 명패에는 발리움 단장실이라 적혀 있었다.
드디어 도착이군.
힘든 여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문을 두 번 두드리려다가 그냥 문고리를 잡았다.
칼릭스 상대로 예의를 차리기에는 자신이 당한 게 많아서 말이다.
벌컥!
서리스가 다짜고짜 문을 열자 안에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던 칼릭스가 보였다.
그는 서리스가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반가워. 서리스.”
“하나도 안 반갑수다.”
얼굴에 철면피라도 깐 걸까.
뻔뻔한 그를 보며 서리스가 문을 세게 닫자 칼릭스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커피라도 한 잔 내줄까.”
“제가 뭘 믿고 그걸 마십니까. 또 독을 탈 수 있는데.”
서리스가 아무렇지 않게 과거를 꺼내 들자 칼릭스는 또다시 뻔뻔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독왕의 독은 어디에서 공수하셨답니까? 아, 레투앙은 잘 지냅니까? 제가 힘 좀 써봤는데.”
그 말을 하며 서리스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망나니 서리스 모드였다.
칼릭스와 직접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참에 서리스는 그에게 자신의 첫인상을 입맛대로 다루기 까다로운 망나니로 심어 둘 속셈이었다.
“이상하네. 내가 전해 듣기로는 서리스는 선배들을 무척이나 깍듯하게 대한다던데.”
“선배도 선배 나름이죠. 사촌 동생 암살하려는 쓰레기 같은 놈을 제가 뭐 하러 대우해 줍니까?”
“서리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칼릭스는 책상 위를 굴러다니던 주사위 두 개를 자기 손안에 쥐었다.
“나는 너를 암살하려 한 적이 없어.”
그러곤 그 주사위를 손안에서 굴려 나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레투앙의 암살 건은 나도 들었어.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너에게는 트라우마였겠지. 하지만 거기 내가 관련되어 있지는 않아.”
서리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거란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왕인 아버지가 고작 부가주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못마땅했습니까.”
따악―
칼릭스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주사위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리스는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
그렇기에 칼릭스가 처형당하던 모습을 직관했었으며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른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저를 죽여서 펜타니엄 내에 혼란을 가중하고, 저희 형제들 사이에 의심암귀를 심을 속셈이었겠죠.”
그렇기에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이유 또한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칼릭스는 가장 만만하고 죽이기 쉬운 서리스를 처리함으로써 직계들 사이를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사이가 나쁜 펜타니엄 직계들이다.
덜미만 안 잡힌다면 그 일을 계기로 가문 내부는 엉망이 되겠지.
칼릭스는 그 틈을 노려 천천히 자기 세력을 늘리려 한 것이었다.
“그다음 제로와 샬롯의 사이를 이간질해 둘을 동시에 견제하고, 락스카 형님에게 늘 열등감을 가진 알리즈 형님을 써서 사건을 일으킨 뒤 펜타니엄의 이름값을 더럽힌다.”
서리스는 차근하게 칼릭스가 계획 해봤을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름값이 떨어진 펜타니엄 내부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겠죠. 이번 세대 직계들은 문제가 많다. 엉망이지 않으냐. 물론 그런 이야기가 나오도록 유도하는 것도 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칼릭스는 본가 직계를 또 제 손으로 죽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폭주한 알리즈였다.
그의 목을 들고 온 칼릭스는 이번 세대는 직계보다 방계가 우수하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보였고.
그로 인해 펜타니엄 가주 후보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 과정이 칼릭스의 생각대로만 흘러갔다면 또 모르지.’
그가 정말로 가주가 되었을지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고. 최대한 완벽을 고수하던 그도 한 실수로 인해 덜미가 잡혀 처형당했었다.
하지만 덕분에 펜타니엄 내부는 개판이 났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가설입니다. 가설.”
서리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칼릭스 또한 그를 따라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는 서리스의 눈에 훤히 보였다.
“재미있는 가설이네. 그래서는 내가 마치 악당 같잖아.”
“제가 약간 염세적으로 살아왔던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악의적인 걸 상상하는데 재능이 넘칩니다.”
“걱정하지 마. 서리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당연히 그렇겠지.
제로와 샬롯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제로는 자신이 빼 와 버렸고.
알리즈 같은 경우에는 일의 원흉까지 해결해 버리며 오히려 몇 단계나 더 성장시켰다.
‘애초에 제일 첫 단추부터 꼬였지.’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암살당했어야 했을 서리스가 살아 있다는 점.
거기다가 가주 후보 자리를 넘볼 만한 실력의 자신이 칼릭스의 모든 계획과 목적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넌지시 밝힌 것이다.
칼릭스 입장에서는 마치 이렇게 들렸을 것이다.
나는 네가 할 개짓거리를 모두 알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하지 마라.
“그래서 왜 부르셨습니까?”
칼릭스를 쥐고 흔들어 놓은 서리스가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 여유로움을 보며 칼릭스는 다음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이번 세계 침식자 사건 때문에 새로운 단을 하나 창설한다는 말이 있어.”
“세계 침식자라면 악스달이 있잖습니까?”
“악스달은 잠식자와 조력자와 같은 대인전에 특화되어 있을 뿐이야. 세계 침식자와 같은 규격 외 괴물과 싸우는 걸 상정하고 움직이지는 않는 곳이지.”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세계 침식자는 서리스가 보기에도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거기에 맞는 전문적인 조직을 키우자는 안건이 발의되었어. 그리고 나는 새롭게 창설되는 그 단의 일원으로 서리스 너를 추천하고 싶어.”
“아하.”
서리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히죽 하고 웃었다.
“새롭게 창설되는 단 요직에 꽂아 넣어 줄 테니, 펜타니엄 쪽은 신경 쓰지 말고 워너힐 아카데미에 쭉 남아 있으라 이겁니까?”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져서 질릴 정도다.
그런 서리스의 해석을 듣고 칼릭스는 짧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곤 곧 그의 두 눈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의 속내를 이렇게나 끄집어내었다.
칼릭스는 계속 뻔뻔한 자세를 고수했었지만, 이내 그는 서리스 앞에서라면 그게 다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이놈에게는 이런 계략이 아닌 정면 돌파가 더 잘 막힐 거라는 걸 금방 눈치챈 것이다.
“나는 방계지만, 펜타니엄 가주를 목표로 하고 있어. 그렇다면 직계들을 견제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밟아놔야 하지 않겠어?”
“와∼ 이제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행동할 생각이십니까?”
“그걸 원하는 것 같길래. 물론 서리스가 네가 말한 암살 건과 그 가설들은 전부 억측이야.”
이것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실제로 그 사건들 자체가 아직 이 세계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었으니.
서리스도 더 따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의도가 어찌 되었든 거기까지 머리가 굴러가는 서리스 너라면 알 거로 생각해.”
칼릭스의 두 눈동자 속에 마치 경고하는 듯한 살기가 깃들었다.
“너라면 굳이 가주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걸 말이야.”
그러니 가주 자리만 넘보지 마라.
그렇게만 한다면 자신 또한 너와 대적할 일이 없을 것이다.
칼릭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서리스는 자기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칼릭스 단장, 제가 원래 가주 자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거든요?”
오만 정치질과 암투를 직접 겪어본 서리스다.
그렇기에 평소에도 펜타니엄 가주 자리에는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은 그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가주는 덤으로라도 제가 가져가는 게 좋아 보이네요.”
그리고 그 말이 이어진 순간 칼릭스와 서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두 눈에 깃든 살의는 마치 적을 보는 듯했다.
“일단 당신이 원하는 대로 새로 창설된다는 그 단의 초창기 일원으로 들어가 주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서리스는 검지를 들었다.
“대신, 하나 거래하죠.”
그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걸 하나 얻기로 하면서 말이다.